지난 24일, 권영국 변호사는 재판정에 섰습니다.
변호인으로서가 아니라 피고인으로서 겪는 1심 재판이었습니다.
권 변호사는 작년 6월, 일방적 정리해고에 맞선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현장을 찾았습니다.
민변 노동위원장의 자격으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노동법률전문가 기자회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무집행방해죄 및 상해죄의 현행범인으로 체포, 기소되었습니다.
경찰이 이유를 고지도 하지 않은 채 수 명의 노동자들을 방패로 둘러싸고 억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헌법에서는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권영국 변호사는 이러한 사태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하면서 체포이유를 고지해줄 것과 피체포자들과의 접견을 요구했으나,
결과는 경찰을 폭행하고 공무를 방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구금’이었습니다.
작년 5월, 용산 참사 관련 기자회견장에서 연행된 이후 두 번째 체포였습니다.
촛불시위 현장, 용산 참사 현장, 쌍용차 파업 현장 등에서 시위대의 최전선에서 부딪치는
권영국 변호사를 혹자는 ‘거리의 변호사’라고 칭합니다.
권 변호사도 시위 현장의 갈등상황이 두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이나 정치적인 상황이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인권침해상황이 발생했을 때,
변호사라는 사람이 옆에서 보고만 있는 것도 참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없는 용기를 내게 되는 겁니다.”
권영국 변호사를 재판 다음 날,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뉴스레터 독자 여러분께 띄우는 권 변호사의 메시지 또한 받아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권영국 변호사입니다.
민변은 변호사 단체로서,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시민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나마 여러분께 저희의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호흡하려 하니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호사법 제1조에서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변호사의 직분을 망각하지 않고,
변호사법 제1조에서 부여하고 있는 사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 작년 6월에 쌍용자동차 노조 조합원을 체포한 경찰에게 변호사 접견을 요구하다
공무집행방해죄 및 상해죄로 고소를 당하셨는데요, 재판 과정과 경과가 궁금합니다.
재판 결과 때문에 변호사직을 박탈당하실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년 11월 달에 기소됐는데, 올 초에 인사이동 때문에 재판부가 한 번 바뀌고, 판사 사정으로 또 한 번 바뀌어서 이번 재판부가 3번째입니다. 그래서 재판이 상당히 늦어졌습니다. 공판 준비 기일을 거쳐 화요일(8월 24일)에 1회 공판이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민변 노동위원장으로서, 정리해고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노동법률전문가 기자회견에 참여하기 위하여 파업 현장에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공장에서 나온 조합원들이 이유를 고지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경들에게 둘러싸인 채 체포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조합원들을 ‘고착’시켰을 뿐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신체를 잡아두는 것은 ‘체포’이고 일정한 장소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감금’이었죠. 이를 발견한 제가 체포 이유를 고지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이유도 없는 체포에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한참 후 체포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을 퇴거불응죄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고 해서, 체포된 조합원들에 대한 접견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무조건 “막아”, “밀어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연행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변호사의 접견요구에 대한 최소한의 안내 절차도 생략한 채 말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변호사 신분을 밝히며 접견 요청을 하였으나 경찰은 이를 완벽하게 묵살하였고, 접견요구에 대해 아무런 안내도 없는 경찰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저를 공무집행방해죄의 현행범인으로 체포·구금한 것입니다.
변호사가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자격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요, 현재 재판진행상황이 썩 매끄럽지는 않습니다. 경찰의 공무와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에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 현 정부 출범 이후 용산참사사건, 쌍용차 사건, 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사건 등
많은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권영국 변호사님을 ‘거리의 변호사’라고 칭한 기사를 보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적극적인 활동은 촛불집회 때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당시 민변에서는 인권침해감시단을 만들어 경찰의 인권침해행위를 감시하는 활동을 했었죠. 그 과정에서 저도 열심히 참여했고, 그 결과 경찰과 시민들이 부딪히는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용산 사건에서는 검찰이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죠.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을 온전하게 행사할 수 없고, 그 결과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불의한 재판에 협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수사기록조차 공개되지 않는 잘못된 재판 진행을 막기 위해서는 여론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쌍용자동차 파업시, 경찰의 고립전략에 의해 노동자들이 공장 안에 갇히고 물, 의약품, 음식 등의 공장 안으로의 반입이 전면 차단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경찰과 용역들이 위험한 진압장구들을 사용하여 파업노동자들을 전면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매우 위태로왔습니다. 이에 저는 민변 노동위원장으로서 파업 현장을 찾아 파업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인권보장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거죠.
저는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된 현실이, 특히 MB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속되고 있는 강압적인 통치행태가 저를 비롯한 시민들로 하여금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 같습니다. 공권력이나 물리력을 동원한 폭력적 진압행태가 나타나고, 거리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외면하지 않는 이상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제가 거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웃음)
– 변호사라고 하면, 사무실에 앉아서 업무를 보거나 법정에 서는 모습을 많이 떠올립니다.
격렬한 집회현장에 참여하실 때, 갈등은 없으셨나요?
기존의 변호사 상이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상담하고, 법정에서 재판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실제 시민들이 원하는 변호사 상은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고통을 공유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변호사들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측면이 큽니다. 저도 시위 현장에 설 때 부담을 느낍니다. 격렬히 부딪히는 현장에 있으면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두렵고, 긴장되기도 하죠. 저는 강심장도 아니고 용감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피해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맞는가’하는 생각 때문에 같이 항의를 하게 됩니다. 인권침해상황이 발생했을 때 변호사인 사람이 옆에서 보고만 있다는 것도 참기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없는 용기를 내게 되는 겁니다.
– 용산참사사건은 법원의 등사거부기록, 변호인단의 공판참석 거부 등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재판은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나요?
초기의 변호인단은 수사기록 공개요구를 하면서, 이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공판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심 재판은 검찰의 수사기록 비공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재판은 공정한 재판이 되기 어렵고, 피고인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는 재판은 정의에 반하다고 판단해 전원 사임계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새로운 변호인단이 꾸려졌고, 현재 사건은 항소심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초 변호인단에서는 검찰의 수사기록 비공개에 맞서 수사기록 열람등사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변호인단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검찰의 수사기록열람등사거부행위는 위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올해 7월에 수사기록열람등사거부처분은 위헌 판결이 났는데, 안타깝게도 1심 재판이 끝난 후였기 때문에 실제로 재판에서 효과를 보지는 못했죠. 헌재의 결정이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현재 사건은 상고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민변 회원들은 권 변호사님을 온화하고 사려깊은 ‘젠틀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목소리도 크시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등 엄청난 활동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권영국 변호사님을 바꾸어놓는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좀 야누스 적인가요? (웃음) 평소에 성격이 외향적이라거나, 목소리가 큰 것은 아닌데, 항의할 때에는 정확히 항의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항의를 점잖게 한다면, 그것은 항의로 보이지 않거든요. 사람은 때와 장소에 따라 자신이 전달하고자하는 말의 톤에 진심을 담아야 합니다. 부당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기교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의할 때는 저의 마음이 실리기 때문에 이중적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 현재 민변 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시고, 2005년까지 민주노총 법률원 원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시고 나서 계속 노동전문변호사로 활동해 오신 셈인데요,
노동전문변호사가 되신 계기가 있으십니까?
저는 법대생이 아니었고, 금속공학을 전공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직으로 ‘풍산금속'(현재는 주식회사 풍산)이라는 회사에 취업을 했지요. 집이 어려웠고, 제가 맏이여서 생계를 벌며 군대문제 또한 해결해야했기 때문에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에 기술직 공채시험에 응시하여 특례보충역으로 입사하게 된 것입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풍산금속에서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결성된 노동조합의 초대 집행부가 매우 어용성이 강하였기 때문에 저는 노조위원장을 불신임시키기 위해 다수의 대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노력을 하다가 결국 다른 공장으로 강제전보를 당했습니다. 강제전보된 공장에는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그곳에서 노동조합(지부) 설립을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해고를 당했죠. 해고된 상태에서 노동조합(지부)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였고, 조합원들의 단결된 투쟁으로 저도 복직했습니다. 그 후 제가 불신임을 시도했던 바로 그 위원장이 제가 전보되어 온 공장의 단체교섭 대표들을 따돌리고 회사와 몰래 단체협약서에 직권조인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요구를 배반하였고, 저는 제가 속한 지부 조합원들과 함께 위원장이 직권조인 단체협약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고 재교섭을 요구하는 파업투쟁을 벌이다 구속되었고 두 번째 해고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 자신이 형사피고인으로, 부당해고를 다투는 당사자로 법정에 서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법’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접하게 됐고 인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해고되고 나서 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던 탓에 취업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죠.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고향의 대학선배가 사법시험을 권유해 법률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 노동 현장에서 그야말로 직업과 삶이 하나가 되신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기존의 경험이 제 진로를 결정할 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저는 회사에 다니며 노동조합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직접 노동조합을 설립해보면서 노동자의 삶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인간적인 근로조건, 관리자들에 의한 부당한 대우 등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여전히 노동자는 사용자에 비해 미약한 존재이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것이 변호사로서 나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사시에 합격하고 난 후 끝까지 노동운동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 때문에 계속해서 관련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해고되고 구속되는 생활을 거치며 가족들이 힘들어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볼까’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저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저를 부르는 사람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아내도 제 결정을 이해해 주었고요. 제가 연수원에 있을 때, 금속연맹 법률원에서 사회봉사를 했는데 그 활동이 결국 민주노총 법률원 설립으로 연결이 되었죠.
– 그동안 몸소 느끼신 노동 현장은 변화는 어떠한가요? 진일보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계속 퇴보일로를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희가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활동이 현장을 바꾸는데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노동조합이 활력을 가졌던 시기는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90년대 초반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이 1995년인가에 출범하여 체계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 87년 때와 같은 활력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96년 12월에 여당이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하자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을 벌여 노동법을 재개정하는 일대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때가 아마도 노동자들의 투쟁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97년 연말 IMF 사태가 터지고 경제논리로 모든 것이 재단되기 시작했죠. 노동조합에 대한 규제, ‘노동의 유연성’을 명분으로 해고를 쉽게 하는 법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때부터 계속되었습니다. 파견법이 통과되고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것이 김대중 정부 때입니다. 노무현 정부는 그토록 반대했던 기간제법을 만들었습니다. 비정규직법 등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정부’에서 법제화되는 것을 보며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담보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회의가 들기도 했죠.
MB 정부 들어서서는 노동자들이 노동3권이 전면적으로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아무리 절차적 합법성을 갖춘다 하더라도, 대통령부터 나서서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 버립니다. 정권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동조합의 합법적 투쟁조차 설 자리를 잃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억압당하는 시대로 회귀한 것이지요. 지금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주역들이 40대, 50대, 심지어 60대가 되었기 때문에 현장의 생동력이 퇴보한 면도 있고요. 근로조건,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노력이 세대간 순환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청년실업이나 고용문제 때문에 젊은 노동자들이 대단히 위축되어 있습니다. 현재 20-30대는 자신들에게 닥친 고용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의식들이 강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저변이 확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계신 노동관련 현안이 궁금합니다.
최근 문제되는 것은 타임오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문제인데, 타임오프가 노조전임자를 대폭 축소시켜 노동조합 활동을 제약하겠다는 의도가 강했던 시도였다면, 창구단일화 문제는 노동조합의 교섭권 자체를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교섭창구단일화는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섭권을 하나로 묶음으로 해서 이를 제한하겠다는 의도이지요. 때문에 저는 창구단일화 문제를 더 심각하게 봅니다. 어용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민주화된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빼앗는 상황이 올 수 있는데, 교섭권은 노동조합의 존립문제와 연관된 것입니다. 창구단일화가 시행된다면, 교섭권을 행사하기까지의 절차가 어려워질 뿐더러 교섭도 하기 전에 노동조합의 기력이 쇠해 자중지란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 사업장 단위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산업별노조와 사용자단체 사이의 산별교섭이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거부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산별노조로의 노동운동 발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의 경우 ‘배타적 교섭대표제’를 두고 있는데, 소속 근로자들이 투표를 해서 과반수의 지지를 받는 노조가 교섭권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선거에 개입하여 조합원들을 매수하는 등 엄청난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였고 노동조합들이 포섭됨으로써 미국노동운동이 침체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큰일입니다. 시간이 있다고 결코 그냥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권영국 변호사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요.
변호사가 되면서 제 꿈은 민주노총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과, 민변에서는 노동위원장으로 일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꿈이 있다면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노동3권을 제대로 보장하도록 노동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 노동법은 헌법에서 정한 노동3권을 보장하는 법률이 아니라 통제하고 규제하는 법률입니다. 하위 법률은 헌법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 노동법은 거꾸로 노동3권을 통제하고 규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민변에서 노동법 개정을 위한 입법청원이나 개정안을 아무리 제출하여도 잘 수용되지 않더군요. 그런데 정부입법은 그런대로 국회에서 통과가 되기에 농담삼아 노동부장관이 되어서 노동법을 제대로 개정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제 소망은 시골에 가서(어느 곳에서든)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이 시민들을 억압하고 자본이 노동자들을 착취해가는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로운 삶을 꿈꾼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글 / 출판홍보팀 박초롱 인턴
사진 / 출판홍보팀 김란아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