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그 후 6개월…”여기 사람이 있다”
글_이재호 변호사
7월 20일,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6개월 째 되는 날, 순천향대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을 보았습니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다고, 다섯분을 모시고 시청으로 가겠다고, 다섯분이 있는 영안실로 가는 유족들을 보았고, 정작 영안실 문꼬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돌아서던 유족들을 보았습니다.
사진 출처_프레시안
전투경찰대원들도 보았습니다. 겹겹이 영안실 입구를 막아선 채 ‘그 누구’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전투경찰대원들을 보았고, 유족들 역시 ‘그 누구’에 해당되는 것을 보았고, 전투경찰대의 장벽 뒤에서 ‘그 누구’를 찾던 카메라도, 장벽을 향해 독려하는 대장쯤 되는 자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빈 관이라도 들고 시청으로 가겠다며 병원 장례식장을 나서던 유족들을 다시 보았습니다. 장례식장 입구를 가로 막아 서 있던 순찰차를 어렵게 보았고, 그 입구를 아예 가로 막던 또 다른 전투경찰대 장벽은 쉽게 보았습니다. 유족과 그 옆에 있는 신부님을 행해 뭔가 연신 뿌려대던 경찰도 보았고, 눈이 매워서인지, 아니면 눈물 때문인지, 수건을 찾는 유족과 연신 눈을 닦아 내던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길을 열어달라면서 힘들게 서 있던 국회의원을 보았고, 주저앉아 오열하던 유족과 전투경찰대의 장벽에 막혀 있는 故 이상림, 故 윤용헌, 故 양회성, 故 이성수, 故 한대성 다섯분의 영정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집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삶을 마감했습니다.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그 망루에 오른 것이 불법이라서, 망루에 오른 지 하루 만에 개시된 경찰특공대의 작전 중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6개월입니다. 영안실 차디찬 냉동고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주권자인 국민이 그대로 굳어있는 시간이. 길도 막혔습니다. 영안실 가는 길도, 장례식장을 벗어나는 길도 모두 막혔습니다.
그 국민의 자식도 주권자인 국민입니다. 그 국민의 어린 자식이 쓴 글을 읽은 변호인도, 그것을 듣던 변호인도 모두 울었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올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들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행복을 형체화시키는 데 있어서 대표적인 모습인 오붓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인 사회에서 우리 가족은 하루 만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불법시위? 테러?
10년 넘게 식당을 하시며 수많은 손님들의 침들과 땀을 닦은 휴지들을 맨손으로 치워가며 돈 한 푼 아끼기 위해 파출부도 안 써가며 단 둘이 일하셨던 우리 부모님이십니다. ‘음식이 맛이 없다. 벌레가 나왔다. 머리카락이 나왔다.’ 냉정하게 외면하던 손님들에게 등 굽혀 사과하고 진심으로 죄송해하던 우리 아버지였고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장난을 거시며 다음에는 어디로 놀러가자 저기로 놀러가자 말씀하셨던 아버지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비록, 저와 동생은 학교에서 학비를 지원받는 지경이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염병? 시너?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술을 마시고 있던 아버지가 울먹이며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용역이 쳐들어왔어… 근데, 너 같은 또래 나이 애한테 얼굴을 얻어맞았어.’
억 돈을 들여가며 십여 년간 장사를 한 사람들에게는 삼천만 원을 줄 테니 나가라 하고 빚까지 져가며 가게를 내어 장사하던 사람에게는 천만 원을 줄 테니 나가라 하고
여러분 같으면 나가시겠습니까? 천만 원이면 단순한 분식집도 차리지 못하는 액수입니다. 저희 가족 같은 경우에는 식당 겸 가정집이었습니다. 돈 천만 원에 식당과 집을 잃게 생긴 것입니다.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용역들이 장사를 방해했습니다. 손님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벽마다 빨갛게 해골들을 그린다거나 밤마다 몰래 가게 유리를 부시고 간다거나 심지어는 이미 비운 집에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아랫집 아저씨가 용역들에게 둘러싸여 맞고 있을 때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저희 동네는 중구. 5분 안 되는 거리에는 크고 커다란 서대문 경찰서가 있습니다. 경찰들이 무슨 도움을 주었는지 아시나요?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왜? 안 나간 게 죄니까. ‘용역들은 합법적이다.’라는 말들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겪어 보셨나요?
학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배우지도 못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우리 가족, 내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 가족은 그 해 겨울 새벽 강제철거를 당했습니다. 기르던 강아지도 강제 이송당했고 사진 앨범등도 사라졌습니다. 북아현동 높은 위치에 달동네에 열 평 남짓한 부동산을 집으로 꾸며 살고 있습니다. 항상 미안하다며, 봄까지만 기다려달라며 전철연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사건 전 날 내게 마지막으로 하시고 갔던 말씀입니다.
‘아빠 5일 정도 못 올지도 모르니까 밥 잘 챙겨먹고, 아르바이트 늦지 않게 일찍 자고 엄마랑 잘 있어.’ 1월 20일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영정 사진이 없어서 갓 난 나를 업고 있는 사진의 얼굴을 합성하여 영정 사진을 마련했습니다.
시민들에게 화염병을 던졌다고요?
용산 참사 주위 역시 재개발 지역으로 참사 건물 주위에는 주거하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으며, 화염병은 무장한 경찰들이나 도로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절대 무자비한 테러마냥 사람들에게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 않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도 원하시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저희 다섯 유가족 모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 장례식 계획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며, 확실한 원인과 규명을 밝혀내고 싶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시끄럽던 코골이가 이렇게나 그리운 소리가 될지는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아버지께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아버지는 없는 사정에도 내게 새 핸드폰을 사주셨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키가 작으셨지만 키가 큰 나를 매일같이 남들에게 자랑하셨던 아버지입니다. 이제 제게는 ‘아빠’ ‘아버지’라는 단어가 세상 그 무엇보다 슬픈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죽어 지옥으로 간다는 조건이 붙는다 해도, 내 삶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조건이 붙는다 해도 나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양복도 맞춰드리고 낚시도 가고 싶습니다. 많이 야윈 엄마의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미치겠습니다. 애써 참는 열여덟 살 동생의 모습이 안타까워 미치겠습니다. 그저 죄송해서,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못해드리고 보내드렸다는 게 너무나 억울해서, 죄송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용기가 서지 않습니다.
제발 들어주세요. 저의 아버지, 우리 유가족 모두는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오늘은 평택에 갔습니다. 정문을 막고 있던, 마스크를 쓰고 있던 노동자들을 보았습니다. 그 너머 건물 위에 있던 또 다른 쌍용차 노동자들도 몇 보았습니다. 그 너머 건물 위에 있던 또 다른 쌍용차 노동자들이 많이 아프답니다. 약이 필요한데, 약이 없답니다. 물이 필요한데, 물도 없답니다. 정문 앞을 막고 있던 노동자들이 그 너머 건물 위에 있던 또 다른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줄 약도, 물도 건네지 못하도록 거칠게 막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투경찰대원들을 보았고, 물대포도 보았습니다. 자연스레, 용산 희생자 5분의 영정이 그려졌습니다. 그 너머 건물 위에 있던 또 다른 쌍용차 노동자들도 불법이라는데, 그래서 경찰특공대원들이 진압한다는데, 그 노동자들도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인데.
기자회견 중에 하나 외쳤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