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성명] 학생인권 사냥을 멈춰라!
– 초등 교사 사망 사건 악용해 학생인권조례 후퇴를 기도하는 정부·여당을 규탄한다
지난주 서울에서 초등 교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타까운 죽음에 고인과 그 유족에게 조의를 표한다.언론 및 관련 단체의 입장문 등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고인은 올해 학교 업무에 힘들어했으며 특히 일부 학생 보호자들의 과도한 연락과 무리한 요구 등이 있었다고 한다. 교사단체들은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고 경찰이 사건을 수사 중이기도 하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그 일터인 학교 및 교육당국의 책임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사건이 알려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우려스러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인사들은 ‘교권이 땅에 떨어진 탓’이라며, 학생인권조례와 진보 교육감을 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과 윤석열 대통령도 학생인권조례를 훼손할 것을 예고했다.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국민의힘) 등도 학생인권조례 개악 또는 폐지에 힘을 싣는 발언을 꺼냈다. 대통령실은 언론에 대고 학생인권조례를 가리켜 ‘종북주사파의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라는 음모론을 펴기까지 했다. 그 비합리적 태도와 극단적 진영논리에 우려를 넘어 황당함마저 느껴진다.
이른바 ‘학교붕괴’ 현상과 현장 교사들의 고충이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는 주장은 기본적 사실관계와 인과관계도 틀린, 견강부회이다. ‘학교붕괴’와 ‘교육불가능’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90년대부터이며, 학생인권조례 등의 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고 계속 악화되어왔다. 지역별로 학생인권조례 존재 여부에 따라 ‘학교붕괴’ 관련 문제나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에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학생인권 신장과의 인과관계가 없음을 방증한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교육의 의미가 퇴색하였고 신뢰가 사라진 것이다. 교육을 일방적·단편적 ‘서비스’로 이해하는 정책과 문화도 문제를 심화시켰다. 점점 심각해진 경제·사회적 불평등의 확대와 사회적 불신으로 인한 관계의 해체 역시 불안정하고 공격적인 상태의 학생·보호자를 증가시키고 학교의 부담을 가일층시켰다. 이번 비극적 사건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겹겹이 쌓이고 꼬인 모든 모순과 부담을 ‘독박 교실’에서 교사 개인이 감당하도록 전가하고 체계적 지원은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학교와 교육당국의 무책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교육의 문제들을, 그런 학교를 지탱하고자 교사들이 겪는 고충을 단순히 ‘교사가 학생의 인권을 재량껏 짓밟지 못해서’라 요약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교권 강화’를 외치며 학생인권을 후퇴시키려는 것은 교사를 인권을 침해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사가 체벌과 폭언을 하고, 차별하고, 학생 용모를 단속하고, 소지품을 압수하면 교육주체 간 갈등이 줄어들고 교사의 고충이 해결된단 말인가? 오히려 더욱더 갈등과 분쟁의 소지가 되지 않겠는가? 교사에게 학생인권을 제한할 권력이 법적으로 주어진다 해서 학생들이 교육에 적극 참여하게 되거나 보호자들이 협력적으로 바뀌진 않는다. 과중한 업무나 교육 제도의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 등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는 교사에게 재량권을 줬다는 명분으로 교육활동과 갈등 대처 등의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돌리며 방관할 공산이 크다.
정부·여당, 일부 교육감 등이 학생인권조례 폐지·축소가 해법인 양 꺼내든 모습은, 비극적·충격적 사건을 도구 삼아 반대 측을 공격하며 자신들의 입맛대로 보수적·억압적 교육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교사 충원,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등의 요구를 외면해온 정부가 학생인권 후퇴를 대책으로 삼는 것은 결국 교사 개인에게 학생을 억누르고 통제하라고 주문하는 셈이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인권을 침해할 권력, 학생을 함부로 대하거나 폭력을 써도 된다는 의미의 교권 개념은 더 이상 쓰이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주장과 달리 학생인권은 전혀 과도한 상태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는 「헌법」과 국제인권법에 명시된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표현의 자유,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 가장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 존엄이 침해돼선 안 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강제성도 그리 강하지 않아 실제 조사 결과나 사례들을 보면 조례 시행 중인 지역에서도 체벌이나 두발·복장규제, 휴대전화규제 등이 근절되지 않았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도 전국 시·도 중 과반으로 학생인권 침해가 일어나도 도움을 청할 구제절차도 마땅치 않은 형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반복해서 보편적 가치로 ‘자유’를 강조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어째서 초·중·고 학생들에게도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자유를 보장하고자 하는 학생인권조례를 공격하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는 가짜 자유, 강자만의 자유, ‘내로남불’ 자유였는지 묻고 싶다.
우리는 초등 교사의 자살이라는 비통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두고서, 그 원인과 문제점을 면밀히 진단하지도 않은 채 섣불리 학생들의 인권을 표적 삼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는 수십 년간 누적된 교육 제도와 정책 등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책임져야 할 정부가 정작 자신들은 쏙 빠진 채, 소수자의 인권을 제물 삼아 사실과 문제를 호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우선 필요한 조치는 교사들이 부당하거나 무리한 민원에 외롭게 대처하지 않도록 학교가 지원하는 것이다. 수사나 쟁송 등 사법적 절차에서 부당하게 괴롭힘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처우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성평등, 기후위기 등을 주제로 민주주의 교육을 실천한 교사들이 부당한 민원과 신고, 정치세력의 외압 등에 시달리는 일도 빈번하다. 학교 시험문제나 도서관 책까지 검열하려 드는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이나,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외치는 단체들이 그 주요 주체이기도 하다. 정부는 학생인권 사냥을 멈추고, 학교와 교육당국이 교사의 교육활동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지, 교사가 부당한 위험과 압력에 홀로 노출되지 않도록 지원할지부터 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부와 제 정당들, 교육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교사의 노동조건은 학생의 교육조건이기도 하다. 교육활동의 보장과 문제 대응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교원인력 충원,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등 교육 환경과 교사 노동조건을 개선하라!
- 학생인권은 교육의 기준이자 출발점이지, 마음대로 침해하거나 빼앗아도 될 부록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개악·축소 시도 즉각 중단하고, 정당한 교육활동의 기준이 될 ‘학생인권법’을 제정하여 학생들에게도 보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하라!
-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주체들의 책임 있는 참여와 건강한 갈등 조정이 필수적이다.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 회복과 학교공동체 강화를 위해, 정부는 책임지고 교육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라!
2023년 7월 27일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
외 189개 인권·시민사회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