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위][성명] 잊었던 100년, 기억할 100년-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성명

2022-05-04 110

[성명]
잊었던 100년, 기억할 100년
–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성명

이번 2022년 5월 5일은 100번째 어린이날입니다. 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는 많은 어린이 (여기서 ‘어린이’는 만 19세 미만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들이 이번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린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어린이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라고 하면 어딘가 미숙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는 존재라며 쉽게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경기도 인권센터 등 인권 관련 공공기관에서 노키즈존을 운영하거나, ‘-린이’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린이를 차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런 영업장과 표현들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원하는 것이 있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할 때, ‘버릇없다’, ‘의무는 지지 않고 권리만 요구한다’든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라, 참아.’라고 하는 어른들도 있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료시민으로서 이런 현실을 매일 마주할 때마다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사실 ‘어린이’라는 말은 나이가 적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17세기부터 쓰였고, ‘어리다’라는 말에는 ‘어리석다, 미숙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습니다. 늘 무시당했던 어린이라는 존재를 젊은이, 늙은이보다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자고 했던 방정환 선생님과 그 뜻을 따른 어린이의 마음은 우리 사회가 늘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1923년 어린이의 자존과 안전, 즐거움을 보장해달라는 내용의 어린이 선언을 발표하고 노동절과 같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한 방정환 선생님이 분주하게 활동했던 그 무렵, 국제사회도 어린이의 복지와 권리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1954년부터 유엔과 유네스코는 매년 11월 20일을 세계 어린이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11월 20일 유엔총회는 어린이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게 됩니다. 우리의 어린이날과 세계의 어린이날은 모두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이날이라고 하면 ‘어린이가 하루 즐겁게 노는 날’이라고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선언한 1923년 5월 1일 수많은 어린이들은 집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권리를 알리려고 했고, 경찰이 이를 금지하자 거리를 돌아다니며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고 외치며 위 어린이선언에 들어 있던 ‘어른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선전문을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1925년, 1933년의 어린이날에도 어린이들이 전국에서 집회를 열거나 새벽나팔을 불며 어린이날의 의미를 알렸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매년 여성의 날(3월 8일), 노동절(5월 1일)이 되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차별을 없애고, 평등하고 안전하게 노동하기 위해 모이는 시간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우리는 어린이날의 이런 의미를 많이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조선의 어린이를 어떡하냐’고 유언을 남겼다던 방정환 선생님은 지금의 어린이날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리 모임은 이번 100주년 어린이날을 뜻깊게 기억하고자 합니다. 지난 100년 동안 어린이는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어린이의 권리를 위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싸웠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어린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마침 올해는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가 들어섰고, 지방의 삶을 책임지는 시장, 도지사, 도의원, 시의원들을 새로 뽑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린이의 권리를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고 보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린이가 스스로의 권리를 알고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 모임은 이 글을 통해 앞으로의 100년간 우리 사회가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어린이의 권리를 밝힙니다.

1. 어린이는 태어난 후 모두 빠짐없이 태어날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등록’될 권리가 있습니다. 태어났지만 등록되지 않은 어린이는 의료와 교육 등의 분야에서 꼭 필요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출생 후 등록되지 못한 채로 학대를 당하다가 겨우 발견된 사건도 많았고, 한국 국적이나 영주권이 없는 이주배경 어린이 중 2만 여 명이 미등록 상태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나 한국에서 태어난 어린이를 등록할 수 있는 보편적 출생등록제도를 법으로 정하려 했지만 아직까지 국회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시흥시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에게 출생확인증을 발급해주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시흥시의회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어린이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보편적 출생등록제도는 꼭 필요합니다.

2. 어린이는 태어난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자라날 권리가 있으며, 태어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없을 때에는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충분히 제공해야 합니다. 민간이 운영하면서 익명으로 아동유기를 허용하는 베이비박스를 금지하고, 아동보호조치 중 하나인 입양은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입양된 어린이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언제라도 친부모의 정보를 알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3. 어린이는 자유롭게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껏 놀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놀 권리는 늘 중요하다고 강조되지만 현실에서 제일 쉽게 침해되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어린이가 즐겁게 놀 수 있으려면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에게 과도한 학습을 강요하는 교육 과정과 관행을 꾸준히 살펴본 후 개선하고, 장애가 있는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어린이가 무료로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놀이터와 같은 놀이시설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충분히 마련해야 할 의무를 법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4. 어린이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간섭이나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학교 안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생활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학교를 다니지 않는 어린이도 학생과 동등하게 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 시행하였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각종 학생인권 침해행위를 실질적으로 막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이 학칙 제·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인권을 침해하는 학칙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며, 학생의 자치활동을 보장하고,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구제절차를 마련하는 내용의 학생인권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와 학교에 없는 어린이 모두가 차별 없이 필요한 교육을 받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며, 특히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배경, 가정 밖 어린이 등 취약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소수자들에게도 안전한 시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5. 어린이는 투표를 통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표자를 뽑거나 자신이 직접 후보로 나올 수 있어야 하고, 정당에 가입해 다양한 정치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18세 이상의 어린이는 공직선거에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고(국민투표권 연령은 여전히 19세 이상이라 개정이 필요), 16세 이상의 어린이는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가 정당에 가입하려면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선거권이 없는 어린이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등 불합리한 법적 규제와, 적지 않은 학교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를 학칙으로 금지하는 관행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어린이의 권리를 침해하는 법과 관행을 고쳐나가면서, 더 많은 어린이가 정치에 참여해 목소리를 활발히 낼 수 있도록 참정권 연령 기준도 앞으로 더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6. 어린이는 법을 위반했다 하더라도 어린이로서 마땅히 누리는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받아야 하며, 적절한 처우와 지원을 받으며 사회로 복귀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발달과정 속에 있으며,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잠재가능성이 많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법을 위반한 어린이가 충분히 반성하고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특별한 사법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일부 자극적인 사건을 들어 어린이도 엄벌에 처하자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등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정부에게 사법제도에 놓인 어린이의 인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처벌받는 연령대를 낮추지 말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7. 어린이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학대 피해를 입었다면 국가로부터 적절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 부모 등 보호자의 징계권이 삭제되는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집과 학교, 시설, 학원 등 어린이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서의 아동학대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아동학대 사건에 분노하고 사법 기관은 아동학대범죄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만, 아동학대 사건의 재발과 부실한 대응을 막기 위해서는 아동학대 사건의 진상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동시에 학대 피해를 입은 어린이가 또 다른 학대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학대를 가한 보호자와 분리할 것인지는 어린이 최상의 이익 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는 아동학대 대응 절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8. 어린이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과도한 상속 채무와 건강보험료 부담에서 보호받고, 의료 서비스를 충실하게 받으면서 건강하게 생활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부모 등 보호자가 채무를 남겨놓고 사망한 경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채무를 고스란히 상속받게 되어 성장과 자립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 상속인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을 겪거나, 아동학대 피해를 입은 어린이에게 부모가 체납한 건강보험료를 같이 내도록 하는 연대납부 의무 규정도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는 어린이 상속인이 상속채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법안들이 발의되어 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어린이에게 부모의 건강보험료를 같이 납부하게 하는 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린이가 책임 없는 상속 채무와 건강보험료 부담을 지지 않고, 더 나아가 어린이라면 누구나 무상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9. 어린이는 국적과 상관없이 현재 살고 있는 국가에서 함부로 쫓겨나지 않고 가족들, 친구들과 차별 없는 삶을 이어나갈 권리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국적이 없는 어린이가 아동수당이나 보육비 지원을 받지 못하고 보육시설 입소를 거절당하기도 하며 건강보험의 혜택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어린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체류 자격을 잃어버리면 같이 보호소에 갇히거나, 강제로 쫓겨나기도 합니다. 현재 일정한 요건을 만족한 미등록 이주배경 어린이에게 한시적인 체류 자격을 인정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이보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모든 이주배경 어린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입법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 말씀드린 어린이의 권리들은 사실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또한 지면 관계상 여기에 모두 싣지는 못했지만 꼭 살펴보아야 할 어린이의 권리도 많습니다. 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방의회는 이러한 어린이의 권리를 보장하고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할 동료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어린이와 함께 어린이의 권리를 위해 고민하고 말하고 연대할 것을 약속합니다. 앞으로의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인권 과제를 기억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2022년 5월 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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