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위][성명] 성차별의식과 강간통념에 기초하여 해군내 성폭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강력히 규탄한다.
성차별의식과 강간통념에 기초하여 해군내 성폭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강력히 규탄한다.
- 십여년전 해군에 복무하는 성소수자 여군 대위를 수차례 성폭행한 직속상관인 박아무개 소령에 대해 2022. 3. 31. 대법원 제3부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확정했다(주심 대법관 김재형). 위 판결은 같은 날 불과 1시간 전, 박아무개 소령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사정을 악용하여 2차 성폭행을 자행한 김아무개 대령에 대해서는 원심의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고등군사법원에 환송한 대법원 제1부 판결(주심 대법관 박정화)과 정면으로 상반된다. 같은 날 선고된 모순된 판결은 피해자에게 ‘반쪽짜리 정의’마저 돌려주지 않았다.
- 대법원 제3부는 각 범행에 대한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거나 범행상황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가해자의 변명과 더불어 사설업체가 가해자의 유상의뢰를 받아 자의적으로 작성한 ‘피해자 진술분석보고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위 재판부는 전제되는 사실관계가 동일한 2차 성폭행 사건과 진술 신빙성을 정반대로 판단하면서도 ‘각각 범죄에 따라 범죄 성립 여부를 달리 판단할 수 있다’는 논거만 제시하였을 뿐,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면서 그 이유조차 따로 설시하지 않았다.
- 2018년 대법원은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 이후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위 기준을 거듭 인용하며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대법원 2005. 7. 28. 선고 2005도3071 판결, 대법원 2018. 10. 25. 선고 2018도7709 판결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제3부는 절대적인 상명하복이 요구되는 군대조직내에서 직속상관인 가해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성소수자인 부하 여군을 상대로 자행한 ‘교정강간’(Corrective rape: 이성간 성폭행을 통해 성적 지향 혹은 성별 정체성을 ‘치료’한다는 증오범죄)의 특수성과 그 정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반하는 것임은 물론 기본적으로 성범죄를 양산하는 성차별적 고정관념과 강간통념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피해자에 대한 2차 성폭행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그 전제가 된 1차 성폭행을 무죄라고 본 이번 대법원 판결이 실체적 진실 발견과 정의실현이라는 형사사법제도의 최우선적인 목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성범죄 재판에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실질적인 심판대상으로 삼거나, 피해자에게 완벽한 피해자다움과 무결점을 요구하는 법원의 태도를 볼 때 과연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판단원칙이 모든 법관에게 충분히 습득되고 구현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은 성차별적 사회통념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해당 진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 과정에 자의적인 판단과 인식적 오류가 개입되지 않도록 고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같은 날 선고된 두개의 모순된 판결은 사건의 심리가 법관 개인의 자의에 맡겨져있다는 강력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비판을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성범죄는 성별 권력관계는 물론 이를 용인하는 성차별적인 제도와 문화, 불처벌의 관행으로 유지되고 발전한다. 피해자의 보호 및 구제를 위해 존재하는 형사사법 기관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기존의 성차별적 사회통념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는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와 유감을 표한다. 대법원의 성차별의식과 강간통념이 유지되는 한 피해자는 사법기관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정당히 부여받아야 할 자리를 잃을 것이며, 차별과 혐오에 기반한 폭력을 행사하고 묵인하는 자들만이 남아 사회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차별적 사회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성범죄에 대한 사법기관과 사회의 불처벌과 온정주의를 강력히 규탄하며, 군의 엄중한 가해자 징계와 피해자 보호를 강력히 촉구한다.
2022년 4월 1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