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학생인권법안의 발의를 환영하며,
21대 국회는 학생인권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라!
2021. 11. 3. 박주민 국회의원은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안(이하 ‘학생인권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우리 모임은 이번 학생의 날(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이해 위 법안이 발의된 것을 환영하며, 학생 인권이라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헌법적 가치를 위해 21대 국회가 ‘학생인권법안’을 조속히 통과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학생인권법안’은 학생에게 보장되는 인권과 이러한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제17조, 제17조의2), 학생인권실태조사 실시, 학생인권종합계획 수립 등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교육감의 의무를 규정하였으며,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신청 제도와 더불어 학생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조사 및 구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학생인권옹호관 제도를 신설하였다(제18조의4~7). 또한 학칙에 대한 통제 수단을 규정하고(제8조 제1~5항), 학생에 대한 징계사유와 절차 규정을 구체화하였으며(제18조, 제18조의2), 학생의 자치활동권을 보장하면서 총학생회의 법적 근거와 권한을 마련하였다(제17조의3~4).
이러한 ‘학생인권법안’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1991년에 UN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이래 학교 현장에서는 학교체벌 금지, 두발자유화, 학생회 법제화, 일제고사 반대 등 학생인권 보장을 주장했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제17대 국회에서는 최순영 의원이, 제18대 국회에서는 권영길 의원이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지만 당시 국회는 2007년에 ‘학교의 설립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라는 선언 조항 하나를 신설하는데 그쳤다. 오히려 정부는 2008. 4. 15.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학교에서 실시하는 각종 인권 침해 행위를 ‘학교 자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2012. 4. 20.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를 개정하여 학칙으로 학생의 용모, 소지품 검사와 같은 사항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학생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조차 존재하지 않는 입법의 공백 속에서 2010년 이후 경기, 광주, 서울, 전북 등 일부 시도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시행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러한 학생인권조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서울, 전북 학생인권조례 등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고, 직권으로 학생인권조례의 실효 선언을 하여 일선 학교들의 학칙 개정을 막는 등 학생인권조례가 학교 현장에 안착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또한 학생인권조례는 조례 자체의 규범적 한계로 인해 끊임없이 상위법 위반 시비에 시달리면서 조례가 시행되고 있는 지역에서도 학교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막기 어려웠고, 이러한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의 학생인권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최근에도 사회면을 가끔 장식하는 소위 ‘괴상한 학칙’ 뉴스는 학생들에게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이다.
이번 ‘학생인권법안’ 은 바로 이러한 조례의 한계를 극복하고, 학생인권을 보장하라는 학생들과 시민 사회의 염원을 담아 중앙정부 차원에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원칙과 기준을 정한 것이다. 비록 그동안 학생들이 요구했던 내용이 모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①학생인권의 개념과 그 침해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학생 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시도 교육감에 인권 침해 구제 제도 및 예방 정책을 시행할 의무를 부과했다는 점, ②학교에서 학생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았던 학칙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함과 동시에 학생에 대한 징계사유를 명확히 하고 징계 절차에서의 학생의 권리를 강화했다는 점, ③학생들의 자치 활동과 학교 운영 과정에의 참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학생인권법안’은 지금까지 국제 사회가 한국 사회에 아동인권 보호를 위해 지속적으로 권고했던 내용을 실천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UN 아동인권위원회는 한국 정부에게 ①아동권리협약 제2조에 따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취약하고 소외된 상황에 있는 아동에 대한 차별을 방지할 것, ②성적에 상관없이 학교 내 모든 아동에게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할 것, ③학교 안팎 모두에서 의사결정과정과 정치 활동에 대한 아동의 능동적 참여를 허용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법률과 교육부의 지침, 학교 교칙을 수정할 것, ④법률과 관행이 모든 환경의 간접체벌 및 징계적 처벌을 포함한 모든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도록 할 것, ⑤성적에 따른 차별을 포함한 학교에서의 차별을 예방하고 근절하며 차별 행위를 효과적으로 조사하고 조치할 것 등을 권고했다. ‘학생인권법안’은 한국 사회가 이러한 국제 사회의 인권 기준을 준수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좌표이다.
‘학생인권법안’ 에 대해 학교의 자치 등을 내세운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UN아동권리협약 제3조에 규정된 아동에게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과 「헌법」 제34조 제4항 및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4에 규정된 학생 인권 보호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학교의 자치와 자율이라는 건 어디서도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 그동안 학교 자치라는 명목하에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학생 인권 침해에 침묵하거나 오히려 동조했던 이들의 주장에 우리는 이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학생인권법안’을 ‘교권 침해’라고 보는 주장 역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교사를 포함한 교육 노동자가 학교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권리는 애초에 학생 인권과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고, 학생 인권과 독립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그들의 인권이며, 오히려 학생인권은 이러한 교육 노동자의 인권과 비례한다. 존중받은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다른 학생이나 교육 노동자를 존중할 리 없고, 일상적인 폭력과 차별 속에 있는 학생이 다른 학생이나 교사에 대한 폭력이 왜 문제인지 이해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또다른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두발·복장의 자유를 침해받은 학생이 교육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행사하는 것은 학교 현장에서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학생인권법안’ 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출발점이다.
또한 학생이 다른 학생이나 교육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한 경우 합당한 지도와 징계 등을 받아야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 조치는 법령에 그 사유와 조치의 종류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하고, 교육적 조치를 결정하는 절차와 처분은 학생의 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그동안 교육 당국은 소위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격리에만 집중했을 뿐, 학교 구성원들의 인권 침해 행위를 어떻게 예방하고, 인권 침해 행위로 인해 손상된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학생인권법안’은 감시와 통제의 관계로 왜곡되어 있었던 학생과 교육 노동자의 관계를 소통과 존중의 관계로 전환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1992. 11. 3. 광주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고등교육 제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금지, 조선 사회에 대한 비하와 멸시 등 학교에 만연했던 차별 행위에 저항하여 집회에 참여했다. 이 역사는 교과서와 달력 안에만 머물지 않는, 2021. 11. 3. 의 학생 인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학생들을 인권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와 시혜의 대상으로나 보았던 90년 전의 현실에서 조선 학생들이 느꼈던 분노와 좌절은 지금의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21대 국회는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학생 인권을 보장하고 회기 내에 반드시 ‘학생인권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모임은 제21대 국회에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과, ‘학생’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함께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
학교는 인권에게 교문을 열라. 학생의 인권은 우리 모두의 인권이다.
2021년 11월 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