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0. 민주항쟁의 날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누군가는 차별금지법은 일부 소수자를 위한 법이라고 말하며 법 제정이 그렇게 중요한지 묻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의 근저에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소수자로 이미 정해져있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법이 차별금지법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자는 사회적 지위의 문제입니다. 누구도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타고 나지 않습니다. 사회의 권력과 위계가 사람을 소수자의 지위에 놓이도록 만듭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과 같은 차별금지법안의 23개 사유, 평등법시안의 21개 사유는 사회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확인해온 사유의 목록입니다. 이러한 사유의 목록을 찬찬히 읽어볼 때 우리는 특정한 사회구성원 일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사유들을 둘러싼 위계의 자장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실감합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하며, 삶의 어느 국면에서는 반드시 성별, 나이, 인종, 종교, 학력, 병력 등을 둘러싼 위계에서 소수자의 지위에 놓이게 됩니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91.1%가 ‘코로나19 계기로 나도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이렇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 먼저 경험하는 차별에 대한 증언들을 경청하고, 그러한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발견하여 그 구조를 계속 시정해나가기 위한 위한 법입니다. 특정한 소수자 집단을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라는 지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차별금지법은 일부를 위한 법이 아니라 평등권 실현을 위한 사회의 기본적인 기틀을 세우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한국에 남녀고용평등법,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같은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이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차별의 위계는 다양하고 늘 교차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노인으로서 차별을 겪더라도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 경험하게 되는 연령 차별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같은 여성이라도 그 여성이 선주민이냐,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느냐, 그 중에서도 출신국가/출신민족이 어디냐에 따라 경험하는 성 차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여성 차별을 심의하는 위원회이지만 2018년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채택할 것을 한국에 권고했습니다. 여성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도 현실의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복합차별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양한 차별의 위계를 중층적으로 경험하는 여성일수록 자신의 경험을 성차별만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위 권고는 ‘빈곤 여성, 소수 인종·종교 그룹 및 성적 소수자에 속하는 여성, 장애 여성, 난민 및 난민 신청 여성, 무국적 및 이주 여성, 농촌 여성, 비혼 여성, 청소녀, 여성 노인과 같은 소외 계층에 영향을 미치는 교차적인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채택’하라고 하였습니다.
6. 10. 민주항쟁의 날에 우리 사회는 언제나 보다 더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나아가자는 다짐을 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가고자 하는 민주주의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마주하는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인식하고 바꾸어나가는 과정 없이 불가능합니다. 존엄, 평등,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진척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주어진 무거운 시대적 요구입니다. 차별금지법만으로 이를 이룰 수는 없지만, 차별금지법의 제정 없이는 제대로 된 출발조차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평등의 약속, 민주주의의 약속인 차별금지법을 더이상 미루지 않고 제정할 것을 국회에 다시 한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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