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정부는 ILO 핵심협약에 반하는 노조법 개정안을 즉시 철회하고,
핵심협약 비준을 즉각 추진하라
1. 정부는 지난 6월 30일 결사의 자유에 관한 ILO 핵심협약(이하 ‘ILO 핵심협약’)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법률을 개정한다고 하면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법률안(이하 ‘정부안’)을 제출했고, 당장 10월 말부터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심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부안은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계기로 노동기본권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노동기본권을 심각하게 후퇴시키는 시대착오적이고 주객이 전도된 법안이므로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2. 먼저 정부안은 ILO 권고 및 국제노동기준에 훨씬 못미친다. ILO 핵심협약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법률을 개정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ILO가 한국 정부에 지속적·명시적으로 개선을 권고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노조법 제2조 제1호 근로자 정의규정 개정), 하청·간접고용노동자가 원청 사용기업을 상대로 노조할 권리(노조법 제2조 제2호 사용자 정의규정 개정),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는 노조설립신고제도 개선(노조법 제12조 제3항 노조설립신고서 반려규정 삭제), 공익사업장의 파업권 보장, 파업과 민·형사책임에 관한 내용이 모두 누락되었다.
3. 그나마 정부안에 담긴 해고자의 기업별노조 가입 허용, 노조 임원자격, 전임자 급여지급 내용도 여전히 ILO 기준에 위반되고 현재와 별반 차이가 없다. 해고자는 사용자의 허가를 받아야만 사업장, 기업별노조 사무실에 출입할 수 있고, 기업별노조의 임원과 대의원도 될 수 없다. 기업별노조의 해고자에게 허용된 것은 그저 조합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조합비를 납부하는 권리 없는 의무만 인정될 뿐이다. 또한 정부가 여전히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유지하여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전임자 급여지급에 간섭하고,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초과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이나 사용자의 동의는 무효로 하고 있다. 교섭의 일방인 사용자가 임의로 교섭방식을 선택하는 교섭창구단일화 강제제도의 문제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4. 반면, ILO 핵심협약과 전혀 상관없는 노동기본권을 후퇴하는 내용은 명확하고 명백하다. ▲ 먼저 정부안은 생산 및 그 밖의 주요업무에 관련되는 시설과 이에 준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설은 그 전부 또는 일부를 점거하는 형태로 쟁의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한다(정부안 제42조제1항). 쟁의행위 태양을 가리지 않고, 아무리 평화롭게 진행하더라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설은 직장점거를 100%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대법원 판례가 인정하는 부분적·병존적 직장점거가 금지될 뿐만 아니라, 사업장 내 평화로운 피케팅, 현장 순회, 생산시설에 위법한 대체인력 투입 감시 등 현재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조합활동도 위법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 나아가 정부안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는 ‘종사근로자인 조합원’과 ‘종사근로자가 아닌 조합원’을 구분하여 사업장 출입과 조합활동을 차별한다(정부안 제5조). 해고자, 산별노조의 임원 및 조합원 등을 종사근로자가 아닌 조합원으로 분류하여 사용자의 허가를 받아야 사업장에 출입시키겠다는 것이다. 현재는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산하 지부·지회 사업장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소속 사업장이 아닌 사업장에 출입하더라도 정당행위에 해당하지만(대법원 2020. 7. 9. 선고 2015도6173 판결 참조), 정부안에 의하면 이러한 산별노조의 지원활동이 전면금지될 염려가 있다. ▲ 그 뿐이 아니다. 정부안은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상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한다(개정안 제32조).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이 교섭창구단일화 제도와 결합할 경우 소수노조는 교섭대표노조가 결정된 날로부터 최소 4년 이상 교섭요구를 할 수 없다. 통상 단위노조 위원장의 임기가 2년인 점을 고려하면, 임기 중 단체교섭 한 번 못하는 위원장이 태반일 것이고 소수노조는 임원이 2번 바뀌어도 교섭을 할 수 없다.
5. 정부안에 규정된 비종사자 조합원 차별, 직장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ILO 핵심협약 비준을 핑계로 노동기본권을 후퇴시키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ILO 헌장 제19조, 제87호 협약 제8조 위반에 해당한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노조법을 개정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ILO 헌장과 핵심협약을 위반하고 있는 정부안은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6. 정부안에는 유럽연합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분쟁절차에서 지적한 사항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한-EU FTA에 따른 전문가패널 소집을 요청하면서 특수고용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관련 노조법 제2조 제1호, 노동조합설립신고 관련 노조법 제12조 제1항 내지 제3항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했고, 현재 한-EU 전문가패널에서 이 문제들에 관한 심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정부안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통째로 누락되었다. 정부안은 현안으로 떠오른 한-EU FTA를 비롯한 통상문제 해결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7. 한국 정부는 1996년 OECD 가입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고, 2006년, 2008년 UN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될 때에도 비준을 약속했다. 한-EU FTA에 따른 비준의무 위반까지 논의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자 대한민국의 국격이 걸린 문제다. 그러나 현재 정부안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전혀 상관없는 노동기본권을 후퇴하는 내용만 가득할 뿐, 실질적으로 결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8. 정부는 신속히 ILO 핵심협약을 비준함과 동시에, 현재 정부안을 즉시 철회하고 ILO가 지속적·명시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결사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끝.
2020. 10. 27.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김 도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