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진압과 대량 징계가 법과 원칙일 수 없다!
철도 노동조합의 파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경찰력이 투입되었고, 노동조합은 정부,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파업시작 4일만에 자신들의 파업을 자진 철회하였다. 정부는 파업 철회와 관계없이 대량 징계의 절차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노조 간부 613명이 이미 직위해제되었고, 조합원 8,000여명에 대하여도 순차적으로 징계가 단행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노동조합에 대하여 손해배상 청구까지 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 같은 정부의 강경한 입장 표명은 과거 어느 정권에서도 없었던 것이다. 현정권은 스스로 참여정부라고 지칭하며 사회 제세력간의 대화와 합의를 중시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과연 현 정권에게 한국의 노사관계에 관한 철학과 전망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법과 원칙이란 무엇인가? 노사관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행정작용이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함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과 원칙의 구체적 작용이 항상 명쾌한 것은 아니다. 법과 원칙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현실적인 타당성이 인정되고 조리에 부합하도록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도 노동조합의 파업의 시발점과 그 원인에 비추어 볼 때, 이번 파업에 대한 현 정권의 대응을 법과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철도 노동조합의 이번 파업은, 정부가 종전 합의를 어기고, 6. 9.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에 소위 철도개혁법안을 상정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지난 4. 20. 정부는 “철도개혁 및 공공철도 건설 관련 합의문”에서 “향후 철도개혁은 철도노조 등 이해 당사자와의 충분한 논의와 공청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하고, 이러한 절차를 거쳐 관련 법안이 성안될 경우 조속한 시기에 국회 통과를 위해 철도 노사가 공동으로 노력한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민주당은 철도노조와의 논의나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채 이번 임시국회에서 법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정부가 4. 20. 노정 합의를 위반한 것이 분명한 이상,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기 전에 철도 노동조합과의 최소한의 대화와 교섭을 시도하였어야 했다. 결국 파업이 평화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파업 시작과 때를 같이하여 공권력을 투입하고 조합원들을 연행한 정부의 대응은 법과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철도 노동조합과 그 조합원들에 대한 중징계와 손해배상 청구 역시 온당하지 않다. 징계의 여부나 양정을 징계 혐의 사실에 대한 동기, 결과, 사후의 사정 변화, 동종사건에서의 양정 내용 등이 두루 참작되어 결정되는 것이다. 이번 파업이 정부가 약속을 파기함으로써 비롯되었다는 점과 파업 4일만에 노조 스스로 파업을 철회한 사정 등이 참작된다면 오히려 징계는 종전의 철도 파업의 경우보다 훨씬 관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부 스스로 파업의 빌미를 제공하고서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온당한 일이라 볼 수 없다.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법과 원칙에 따르고자 함이 아니라 여론의 비난에 지극히 감정적인 대응으로 비쳐질 뿐이다.
노사관계가 본질적으로 노동과 경영의 대립에 기초하고 있는 이상, 제3자 혹은 조정자로서의 정부가 노동과 경영 중 어느 한편만을 들 수 없고, 노사관계에 공정한 법과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법과 원칙의 적용은 궁극적으로 양자의 가치를 모두 포섭하면서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노사관계에서 대화와 타협이 귀중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은 법과 원칙에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상위에 놓여야 할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일부 언론에서의 지적처럼 정부의 법과 원칙에 대한 집착이 과거의 경직된 노사관계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현 정권에서의 노동정책의 심각한 후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는 과거에 되풀이되던 물리적 충돌의 악순환을 다시 불러일으키
는 계기가 될 것이다.
철도노조가 파업을 철회하였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철도노조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노조와 진지한 대화와 교섭을 해야 한다. 당초 노정간에 합의된 대로 철도 개혁이 사회적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철도 노동조합과의 진지한 협상을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양보와 타협으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희망한다.
2003년 7월 5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 김갑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