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표현의 자유는 사상, 종교, 학문과 예술을 외부적으로 표현하거나 이를 강제당하지 않을 자유이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는 사회속에서 개인의 신념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현대의 대중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여론형성과 관련하여 특히 언론, 출판의 자유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지 3년째인 1995년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인 국가보안법이 국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언론사의 상업주의가 노골화되면서 공정한 여론형성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 어렵다.
아래에서는 특히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사상의 자유와 학문, 예술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순으로 인권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2.사상. 양심의 자유
가.국가보안법관련사건 개관
국가보안법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문제제기가 있어 왔기 때문에 시의성을 잃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1995.1.1.부터 8.31.까지의 국가보안법위반구속자가 150명에 이르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95년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첫 시기는 연초부터 6. 27. 있었던 35년만의 지방자치제 선거까지였다. 이 시기에 공안당국은 부산대 자주대오, 경기대 자주대오사건 등 조직사건을 통하여 무더기 구속을 감행했는데 이와 같은 사건들의 공통된 특징은 구속된 이들이 대개 학생회 활동을 중지하거나 운동을 정리한 이들로, 구속당시에는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재학중이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사건 피고인들이 처음 긴급구속될 때에는 이적단체 구성등의 혐의내용이었다가 대체로 이적표현물 소지나 고무찬양 혐의로 축소되어 기소되었으며 한 사건에서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 시기의 국가보안법사건은 공안당국이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고려속에서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건을 부풀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두번째 시기는 선거이후의 시기로 소위 ‘부여간첩’사건과 관련된 ‘간첩 불고지’사건이 중점이 된 시기였다. 노태우비자금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10.24. 부여 정각사 주변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발각되었다는 남파간첩 사건은 1995년이 끝날 때까지 계속 문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1.6.경 청년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허인회 등은 이른바 ‘부여간첩’ 김동식을 만나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불고지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이중에는 특정정당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이것이 결국 1996.4.월에 있을 총선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낳게 하였다. 이 사건은 곧 박충렬, 김태년씨의 ‘간첩사건’으로 확대되어 이들에게는 간첩에 의해 포섭, 지령을 받고 암약해왔다는 혐의가 씌어졌지만 결국 이적표현물소지 정도의 혐의로 기소할 수 밖에 없었다.
나.구속자의 실태
(1)1995년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인하여 구속된 사람은 8.31.현재 150명이다. 김영삼정권 출범 첫해인 1993년도에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가 122명, 1994년도에 386명인 것을 볼 때 1995년도 여전히 1994년의 주사파파동으로 인한 신공안정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삼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양심수라고 할 수 있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구속자’, ‘노동관계법에 의한 구속자’에 비하여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비율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다. 즉, 1994년 위 세 가지법률과 관련된 총구속자가 747명인데 그중 386명이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점에서 국가보안법구속자비율이 총구속자의 50%를 넘고 있는데 89년 국가보안법 구속자비율이 18%, 90년 32%, 91년 40%였던 것을 보면 오히려 문민정부에서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자 비율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보안법위반사건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150명중 기소된 사람은 146명이고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람은 38명으로 실형율은 24.4%에 불과하여, 1994년에 403명이 기소되어 93명이 실형을 받아 실형율이 29.8.%였던 것에 비하여 보면 실형율이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심과정에서 상당수가 집행유예등으로 석방되었기 때문인데 그 원인은 법원이 국가보안법위반사건에 대하여 완화된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공안당국이 정치적인 고려로 인하여 무리한 구속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1995년의 국가보안법구속자는 학생이 62명, 근로자 8명, 재야,종교인 15명, 기타 65명으로 여전히 학생이 많은 구속자를 내고 있다.
(2)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수감중인 장기 복역 양심수(7년 이상 구속자)는 1995.12.5. 현재 63명이며 이중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34명, 복역연수 20년 이상의 초장기수는 24명이다. 김영삼정부가 해방50주년을 맞아 1995.8.15. 이른바 대석방과 사면조치를 단행했지만 이때 풀려난 양심수는 25명(전체 양심수의 5%)에 불과했으며 당시 세계 최장기수인 김선명씨등 3명이 석방되었어도 여전히 미석방된 초장기수가 존재하며 김선명씨등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수감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또한, 이중 30년 이상 복역한 이들은 김동기(30, 숫자는 복역연수), 양희철(33), 이경찬(31),홍명기(34),김인수(34),안영기(34),우용각(38),윤용기(37),장병락(34),최선묵(34),최하종(34)씨,최수일(31)씨등 12명이며 이들에 대한 석방은 여전히 인권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라고 할 것이다.
다.전향제도
(1)장기수의 현황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으나 이와 관련하여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인 전향제도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즉, 국가보안법위반죄등으로 복역중인 사람들의 경우 법무부령인 ‘수형자분류처우규칙’과 ‘가석방심사등에 관한 규칙’에 의하여 자신의 사상을 포기한다는 전향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행형법에 의한 일체의 혜택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우선 행형법 제44조 제3항에 근거하여 제정된 수형자분류처우규칙 제2조 제1항 제5호는 동 규칙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면서 그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의 범죄를 범하고서도 개전의 정이 없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자유교담이 불허되고, 접견, 서신, 소내 시설물이용 및 운동등이 제한되며 독방에 수용되는 등 수형생활에 있어서 차별적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수감중인 김용주외 41명이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수형자분류처우규칙 제2조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1995.5.25. 위 규칙이 개정되어 시행된 1991.4.14.이후 180일이 지난 후에야 헌법소원이 청구되어 헌법재판소법 제 69조 제1항의 청구기간을 경과한 것이라는 이유로 그 심판청구를 각하했다.
또한 가석방심사등에 관한 규칙 제14조 제2항은 ‘국가보안법위반등 수형자에 관하여는 특히 그 사상의 전향여부에 대하여 심사하고, 필요한 때에는 전향에 관한 성명서 또는 감상록을 제출하게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전향을 하지 않고서는 가석방대상에서 제외하여 사실상 사상전향을 강요하고 있다.
(2)설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고 석방되더라도 거기에서 이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보안관찰법이 적용되어 일정한 제한이 따르게 된다.
즉, 국가보안법상의 죄 및 그밖에 형법과 군형법의 일부조항(‘보안관찰 해당범죄’)에 의하여 처벌받은 사람들중 ‘보안관찰 해당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 재범의 방지를 위한 관찰이 필요한 자'(보안관찰법 제4조)에 대해서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법무부에 소속된 ‘보안관찰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법무부장관이 2년의 기간동안 보안관찰처분을 할 수 있으며, 2년 단위로 그 기간을 갱신할 수 있다.(위 법 제5조, 제7조, 제10조, 제15조).
보안관찰결정을 면제하기 위해서는 법무부장관이 보기에 ‘준법정신이 확립’되어 있고 ‘일정한 주거와 생업’이 있어야 하며, 2인 이상의 신원보증이 있어야 한다(제11조). 그리고 ‘법령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해야 한다(시행령 제14조 1항).
보안관찰처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인적 사항과 가족의 재산사항, 3개월마다 주요활동 사항 등을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하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10일 이상의 여행을 떠날 때에도 신고를 해야 하고, 일정한 자와의 회합통신 금지, 집회시위장소에의 출입금지, 특정한 장소에의 출석 지시등을 받는데 이러한 보안관찰처분은 법원의 판결이 아니라 행정부인 법무부장관의 처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라.양심수석방을 위한 국제적 노력
(1)양심수 특히,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점은 그러한 문제제기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엠네스티등 국제인권단체와의 긴밀한 유대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과는 국내인권단체들의 계속적인 문제제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런 문제제기는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고 있는 현 정권에게 많은 압력으로 작용된다고 할 것이다.
(2)유엔인권위원회의 활동
유엔인권위원회의 활동이 주목되는데 우선 유엔인권위원회 산하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분과’는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중인 황석영씨등에 대한 구금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B규약) 제19조를 (한국정부가) 위반한 자의적 구금’으로 1994. 9. 결정하였음이 밝혀졌는데 이는 1994년에 이미 정부에 통고되었지만 정부가 이를 발표하지 않음으로서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1995.6.25.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특별보고관 아비드 후사인(Abid Hussain)씨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같은 달 30.까지 한국에서 민주노총, 인권단체협의회등 민간단체의 관계자와 정부관계자등을 만나고 한국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보고서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한국에서의 인권상황은 과거보다는 많은 개선이 있었으나 국가보안법이나 노동관계법등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51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민간단체등의 비판이 잇따르자 한국 정부 대표는 1995.2.21. 처음으로 반박권을 행사하여 ‘국가보안법은 오직 국가안보를 직접 위협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사람들이 구금된 것은 의사와 표현의 자유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간첩, 폭력혁명 옹호등과 같은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며 이들이 ‘양심수’가 아니라고 강조하였으나 구속자중 실질적인 간첩행위를 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비판되었다.
(3)기타의 활동
국제엠네스티는 1995.3. 국가보안법혐의로 구속수감중인 방통대 강사 김무용씨를 양심수로 선정하여 석방할 것을 결의하고, 1995.8.2.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용길장로를 양심수로 선정하고 긴급행동을 요청하는등 국제엠네스티뿐만 아니라 한국지부를 통하여도 각 시기마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한국인권 단체협의회,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등 17개 시민,사회단체들은 해방과 분단 50년을 맞이해 개최하는 ‘국가보안법 국제심포지엄’을 1995.11.24.부터 이틀간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최초의 국제 심포지엄인 그 행사에서는 국제앰네스티, 아티클 19, 검열반대 국제센터 등 17개 외국 인권단체 등이 참여하였으며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국제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있었다.
마.법원의 국가보안법의 적용
(1)법원에 있어서 국가보안법적용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근본적인 문제제기보다는 오히려 관행적인 선고가 행하여진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는 대법원이 지난 1990. 4.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한정합헌 결정이후에도 그 결정취지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려는 목적의식이 없더라도 이롭게 하거나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종전의 판례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즉, 헌법재판소는 당시 국가보안법 7조에 대해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경우’에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영토침략등 외형적인 적화공작등이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는 것은 기본권 존중, 권력분립, 의회주의 등 우리의 내부체제를 파괴,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구체적인 기준까지 내놓았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대법원의 태도로 인하여 하급심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하여 오고 있으나 일부 판결에서 엄격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것이 나타났는데 그 논거는 대체로 표현의 자유등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의 관련규정을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위에서 본 헌법재판소의 결정취지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부산지방법원 형사 3부는 1995.1.17.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반국가단체 찬양고무), 3항(이적단체 가입), 5항(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해서 위헌제청 결정과 함께 헌법재판소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날 재판부는 ‘국제사회주의자 그룹(IS)’ 활동과 관련구속, 기소된 정은경(전대우정밀노조 여성부장) 피고인등 4명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선고를 보류하고 직권보석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의견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폐지, 전복을 유도 선동하는 행위는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할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이 있는 표현행위라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위와 같은 사상 의견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존재이유’이며 ‘의사표현에 대해서 형벌을 과할 수 있는 법률은 최고도의 명확성이 요구될 뿐더러 의사 표현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장래에 있어 국가나 사회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성향을 띄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법률에 의하여 입증된 현실적인 위험성이 입증된 경우에 한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제7조 제1,3,5항은 헌법상의 죄형법정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우월적 보장,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금지규정 등에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위헌심판을 제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재판부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바탕으로 북한과 교류협력을 넓히면서 사상의 다양성을 폭넓게 수용, 세계화를 향하여 나가고 과거와 달리 사상의 포용성을 넓혀도 대한민국의 존립이나 안전이 위협받지 않으리라고 본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3)1995.4.6. 서울지방법원 형사항소 1부는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은 이창복(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씨 항소심선고에서 원심을 깨고 국가보안법 위반부분에 대해서는 전부 무죄를, 집시법 위반에 대해서는 벌금 100만원을 판결하여 이씨를 석방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소지죄)는 넓게 해석, 적용할 경우 위헌의 소지가 있으므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한해 엄격하게 해석,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증거로 제출된 전국연합의 대의원대회 자료집과 범민족대회 자료집등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위험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위에서와 같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원용하여, ‘개정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때에도 실질적인 해악을 끼칠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이 있는 경우만을 처벌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며 ‘자유민주체제를 비판하거나 북한과 일치되는 주장을 하더라도 반국가 활동성이 없는 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판결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서울지검 공안2부의 강익중 검사는 기자들에게 ‘이창복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무죄판결에 대한 상고이유’라는 제목의 자료를 배포했는데 그는 이 자료에서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의 일환인 연방제 통일방안 등을 주장할 사실만으로는 반국가 활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무죄를 선고한 것은 우리의 안보실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한 것’이라며 재판부의 안보관을 직접 비판하고 나섰다.
(4)서울지방법원 형사항소 3부는 1995.4.21. 북한 소설(용해공)을 출판해 국가보안법위반(이적표현물 제작.배포.소지)혐의로 기소된 도서출판 ‘일터’ 편집부장 박치관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소설<용해공>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로 무장한 인간상의 전형을 제시하면서 김일성 개인을 찬양, 미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런 내용은 소설의 전개과정에 자연스럽게 삽입된 단편들일 뿐’이라며 ‘이 소설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를 구체적, 실질적으로 위협할 만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도 들어있지 않으므로 대한민국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법원 형사항소 5부는 1995.5.17. 컴퓨터통신 천리안에 ‘공산당선언문’일부를 실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구속기속된 대학생 진상호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제7조 규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로 제한해석해야 한다’며 ‘공산당선언의 내용은 도서관 자료실이나 일반 서점에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대한민국의 기본질서에 명백한 위험을 준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95.7.25. 북한 김일성 전기<세기와 더불어>를 판 혐의로 긴급구속된 ‘인’서점 대표 심범섭씨에 대해 검찰이 재청구한 구속영장을 ‘지난번 영장이 청구됐을 때와 별다른 변동 사항이 없다’며 기각했다. 이에 앞서 같은 법원은 7.21. ‘책등 표현물이 과격한 혁명사상과 북한의 주장을 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국가존립과 민주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볼 수 없고 우리 국민이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야 한다’며 심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바 있다.
바.주요 국가보안법사건
(1)1995.6.28. 고 문익환목사의 부인인 박용길장로가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행사 참석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다음 달인 7.31. 판문점을 넘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박 장로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 안기부에 의해 곧바로 구속 수감됐으나 9.7. 허혈성심장질환등으로 삼성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같은 달 18. 민간단체뿐만 아니라 병원 및 담당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서울구치소에 다시 수감되었으며 보석신청은 기각되었다. 박장로는 10.4. 열린 첫재판에서 ‘법률로 인정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으로는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재판을 거부하였다. 박용길장로는 작고한 고 문익환목사의 부인일 뿐 아니라 76세가 되는 고령이고 건강까지 좋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구속은 인도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2)안기부는 1995.11.29. 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쪽본부(의장 강희남목사) 및 산하 지방조직 관련자 29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으로 구속하였으며 경찰은 또 이날 새벽 부산.대구 등 범민련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해 범민련 활동 자료집 등을 압수했다. 안기부는 ‘범민족연합 남쪽본부가 지난 91년 11월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라는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북한과 연계해 불순 통일운동을 벌여왔으며, 일부 인물들은 국내 정세를 몰래 수집해 재일 조총련 등 북한 공작조직에 전파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공개적인 활동을 하여 오고 있었고 구속자들이 대부분 거동조차 하기 힘든 노인들을 뿐 아니라 만삭의 회원까지 구속하여 결국 유산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는데 이 사건은 당시 노태우비자금사건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3)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1995년 전반기 특히, 6.27.의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앞두고 무더기 구속이 행하여 졌는데 1995.2.14. ‘부산대 자주대오’사건으로 14명이 구속되었으며 3.17.에는 ‘경기대 자주대오’사건으로 모두 13명이 구속되었다.
1995.5.30.에는 전남대 ‘민족사랑학생연합’사건으로 3명이, 원광대 ‘자주대오’사건으로 4명이 구속되었으며 또 1995.6.9.에는 ‘남한프롤레타리아 게급투쟁동맹’조직원 15명이 국가보안법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러한 조직사건은 하반기에도 이어져 1995.9.5.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조직되었다고 하는 5.1동맹사건으로 모두 13명이 무더기 구속되기도 하였다.
또한 1995.4.26. 북한 노동당에 입당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된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창희교수 는 같은 해 7.5.에 있었던 재판에서 노동당입당사실을 계속하여 부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기부에서의 가혹행위로 인하여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며, 나아가 그는 안기부의 보도자료만으로 일방적인 보도를 한 언론사들을 상대로 정정보도청구를 하였다.
3.학문.예술의 자유
가.학문연구의 자유
(1)1994년 대학에서 학문의 자유와 관련하여 가장 큰 논란이 있었던 것은 이른바 ‘한국사회의 이해’사건이었다. 경상대학교 교재로 쓰이던 ‘한국사회의 이해’의 이적성여부와 관련하여 국가보안법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직위해제되었던 위 학교 장상환, 정진상교수가 1995.1.4. 복직되었는데 이는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자는 직위를 부여하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국가공무원법 규정이 변경된 것에 따른 것이다. 위 교수들은 1995.5.19.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고무찬양)과 5항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하였으며 이어 열린 공판에서 혐의사실을 부인하였다.
그런데 1995년 가장 문제된 것은 이른바 서강대학교의 ‘신입생 각서요구’사건이었다. 서강대학교는 95학년도 신입생 면접시험에 앞서서 수험생 전원에게 ‘본인은 자유민주체제를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통한 좌경폭력혁명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가담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합니다’라는 서약서를 받아 물의를 빚었는데 이는 입시준비를 위한 위 대학교 전체교수회의에서 주사파발언으로 알려져 있는 박홍총장이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하여 1995.1.17. 민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전국연합인권위원회등 여러 인권단체가 서강대앞에서 시위를 하였으며 위 총학생회는 학교측에 공문을 보내어 서약서의 무효화와 학교측의 사과를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서강대총학생회의 학생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6.6.%가 서약서의 작성이 부정적이라는 의견을 표현하였다.
위 사건은 입시상황에서 일방적인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신입생들에게 서약을 요구하고 서약을 어길 경우 징계처리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사상의 자유, 특히 대학에서의 학문의 자유와 관련하여 대학당국의 인식수준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2)1995.3.23. 방송통신대학교 역사학과 강사인 김무용씨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는 ‘빨치산 역사기행’중 자신의 집필부분과 논문 ‘민중사학의 역사와 과제’를 통하여 이적단체를 ‘찬양, 고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그가 빨치산에 대하여 연구한 것은 학문적 접근에서 이루어진 것일 뿐 아니라 이미 빨치산에 대한 여러 소설이나 수기등이 출간되어 있음에도 학술연구에 대하여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것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고 할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이나 역사문제연구소등 학술단체등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으며 그는 같은 해 5.30. 1심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대학에서의 자치와 관련하여 일부대학에서 대학신문의 편집권을 두고 학교측과 학생사이에 대립이 심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는 주로 지금까지 학생들의 자율적인 편집권한이 많았던 대학신문에서 학교측이 보다 많은 관여를 하고자 함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상명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농성하는 사태로까지 진행되었으며 세종대학교의 경우 학교측의 기사삭제등으로 인하여 학생회측이 신문의 발행을 자체적으로 중단하기까지 하였다.
나.예술활동에 대한 규제
(1)국회는 11.17. ‘음반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켜 음반에 대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이로서 공연윤리위원회는 비디오물에 대한 사전심의를 할 수 있지만 1996.6.부터 가요음반에 대하여는 사전심의권한이 없어졌고 심의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작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되었다.
그동안 위 법률에 의하여 가요등 음반을 제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가사등에 사회비판적인 부분이 있을 경우 개작등을 하지 않으면 발표될 수 없었다. 이로서 일제시대부터 검열제도로 이용되던 가요사전심의는 사라졌으며 특히, 그동안 ’92년 장마, 종로에서’등 작품을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제작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된 가수 정태춘씨가 위 규정에 대하여 헌법상의 언론,출판,학문, 및 예술의 자유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였던 것은 입법적으로 해결되었다.
(2)하지만 같은 달 개정된 영화진흥법에서는 여전히 영화는 그 상영전에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그 기준으로 제13조에서 ‘헌법의 기본질서에 위배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국제적 외교질서를 훼손하여 국익을 해할 우려가 있을 때,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확립에 해가 될 우려가 있을 때에는 여전히 심의에 합격한 것으로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위 개정법률은 대량으로 상영되는 일반 극영화가 아니라 실험정신이 요구되는 단편영화, 소형영화 및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예술영화등에 대하여도 심의를 받을 것을 규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위에서와 같은 제한규정들이 상당히 추상적이어서 예술작품인 영화에 대한 공연윤리위원회의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영화법보다 후퇴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3)예술의 자유와 관련하여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결과(1995.1.-8.)중 영화에 대한 것을 보면 국내 극영화 38건중 수정통과가 13건이 있었고, 외국극영화의 경우 심의 대상 235건중 수정통과가 110건으로 나타나 국내에 상여된 극영화중 외국영화의 경우 더욱 많은 수정빈도를 보이고 있다.
수정된 원인을 보면 방화중 10편, 외화중 59편이 외설이라는 이유로 화면삭제나 화면단축이 있었고, 폭력의 경우 방화는 없고 외화의 경우 42편이 문제되어 수정되었으며, 영화수입심의의 경우 총282건중 외설이 문제되어 수입불가된 것이 10편, 폭력이 문제된 것이 6편, 퇴페불건전하다는 이유가 5편으로 나타나 있어 수정 이유가 주로 음란, 폭력을 이유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요.음반에 대한 심의에서는 국내가요의 경우 가사부분에 대하여 총11,097건에서 무수정통과가 11,028건, 수정통과가 67건, 반려가 2건으로 나타나 있으며 악보의 경우 총12,464건에서 무수정통과가 12,313건, 수정통과가 150건, 반려가 1건으로 나타났다. 가요에 대한 사전 심의가 위와 같이 폐지되기 이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들이 만든 ‘시대유감’이라는 노래가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자 위 가수는 이에 반발하여 가사를 삭제한 연주곡만으로 출반하기도 하였다.
비디오물에 대한 심의결과는 극영화(창작극영화를 포함)하여 총 138건에서 무수정통과는 37건, 수정통과는 100건, 반려는 1건으로 나타나 있으며 외국작품의 경우 총896건중 무수정통과가 490건, 수정통과가 405건, 반려가 1건으로 나타나 있다.
(4)예술작품에 대한 법원의 판단
대법원 형사2부는 6.16.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낸 혐의로 기소된 마광수교수에 대한 음란문서제조등 사건의 상고심에서 마교수의 상고를 기각해 징역8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오늘날 각종 매체를 통하여 성적표현이 대담,솔직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고 해도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즐거운 사라는 그 한계를 벗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서울지방법원 형사4단독은 1995.10.20. 공연음란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연극 ‘미란다’의 연출자인 최명효씨에 대하여 징역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에서 ‘연국 미란다의 작품주제나 극흐름으로 볼 때 여배우의 알몸연기는 예술적 당위성이 없는 음란한 공연인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기존의 대법원판례와 궤를 같이 하는 위 판결들에 반하여 서울고등법원 특별6부는 같은 달 18. 누드화보집 ‘유연실. 이브의 초상’을 펴낸 도서출판 ‘큐’의 대표 전명기씨가 서울 용산구청장을 상대로 낸 출판사등록취소처분취소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용산구는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하면서 ‘문제의 이브의 초상은 전라의 선정적인 장면이 삽입된 화보집으로 예술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세계적으로 성표현이 점점 대담해지고 이에 따라 우리사회의 성에 관한 인식도 현저히 변화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 화보집을 음란저속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이로 인하여 출판사등록을 취소하여 얻을 수 있는 공익보다 출판사가 입게 될 불이익이 더 크므로 용산구청측의 처분은 재량권을 넘어선 것’이라고 밝혔다.
4.언론.출판.통신의 자유
가.언론에 대한 통제와 간섭
(1)김영삼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과거와 같이 정부가 직접적으로 언론을 장악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줄어들었지만 언론에 대한 통제는 보다 간접적인 방법으로 바뀌었으며 외부의 압력보다는 언론사 자체의 상업주의가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1995.11.경 한국언론연구원이 전국의 신문, 방송 및 통신사에 종사하는 기자 1천24명을 상대로 ‘언론인의 책임과 윤리’라는 주제로 실시한 직업의식 조사결과 밝혀졌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언론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를 10점 만점으로 해서 1995년 현재의 언론자유도는 평균 5.9점인데 이는 노태우정권시절인 89년 6.2점, 91년 6.0점보다도 낮아진 것이며 93년 김영삼정권 출범직후인 7.0점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는 김영삼정권출범이후 언론의 자유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진 반면 언론환경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정권초반에 비해 점수가 낮아진 것은 권력 및 자본, 사주등에 의한 통제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언론사 사주의 상업주의적 경영관’을 꼽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언론사내의 상업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정보기관의 통제
국가안전기획부는 김영삼정권출범당시의 약속과 달리 여전히 정부기관과 언론기관에 출입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안기부요원들은 정당 및 중앙부처와 시, 도, 구청, 경찰서등 일선기관까지 출입을 재개해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행정구역별로 담당자를 배치해 관내 자치단체장 등 주요인물의 동향, 해당 기관, 단체의 정책과 행사일정등 안기부 고유영역인 대공업무와는 무관한 일반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국가안전기획부는 언론팀을 별도기구로 두고 언론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계속해온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미디어 오늘>의 창간호는 이런 사실과 함께, <한겨레신문><동아일보><조선일보><한국방송공사>등 10개 주요언론사 및 프레스센터에 출입하는 것으로 드러난 안기부 요원 13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안기부가 40여명으로 구성된 언론팀을 두고 언론인과 언론사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1995.4.에 발생한 대구 가스폭발 참사에 대해서도 현장 보도를 축소하고 “수습”에 중점을 두도록 “보도조정”을 한 사실이 알려졌다.’며 방송에 대한 안기부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북한관련방송보도자료들은 안기부에서 관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방송사가 독자적으로 구입한 자료라고 하더라도 사전에 이를 협조받아야 하는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경우 안기부에서 제공하는 자료조차 받을 수 없어 각 방송사는 할 수 없이 사전협조를 받게 된다. 더구나 안기부는 북한체제의 모순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편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예를 들어, 김정일의 사진은 동적인 사진을 쓰지 못하고 정지화면만을 사용하며, 방송중에 나오는 노래들을 주로 김정일찬양하는 부분만을 편집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볼 때 대선공약과는 달리 안기부의 역활축소는 김영삼정권초기의 잠시였고 오히려 안기부를 통하여 각 행정기관과 언론사에 대한 정보수집과 보도요청등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3)정부기관의 통제
(가)위와 같은 정보기관의 통제이외에도 정부의 공식적인 언론담당기관인 공보처가 여론조성에 관여하고 있음이 밝혀졌는데 공보처는 굴업도 핵폐기장 설치와 관련해 인천에 상황실을 두고서 직원들을 상주시키면서 언론보도에 직, 간접으로 관여해 왔다. 공보처는 1994.12. 굴업도가 핵폐기장 최종 후보지로 발표된 직후 인천의 한 호텔에 국장급을 반장으로 직원 3-4명을 상주시키면서 지역 언론사를 통해 굴업도 핵폐기장과 관련한 주민 움직임 등에 대한 축소 보도를 요청하고 또 핵관련 광고 게재를 통해 직, 간접적으로 보도활동에 관여하였다.
또한 공보처는 1995.9.20. <부천시민신문>등 5개 지역신문에 대해 6.27.지방선거 때 정치기사를 게재했다며 2개월간의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고 이에 대하여 위 언론사들은 집행정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신청을 제기하고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위와 같은 발행정지는 정기간행물등록법상 특수주간신문은 정치기사를 싣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정치기사를 실었다는 이유였으나 공보처 자신이 1994.6. ‘지역신문도 해당 지역의 정치기사를 게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데다 정기간행물법의 정치기사 금지 규정을 들어 한번도 발행정지등 무거운 징계조처를 내린 적이 없는 사실에 비추어 신뢰에도 어긋나는 것이며 기본적으로는 지역신문에 대하여 정치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자체에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김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와 한겨레신문간에 허위보도로 인한 2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계속중인 가운데 청와대는 대통령의 가족과 관련한 기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청와대는 동아일보와 그 신문사가 발행하는 주간지 <뉴스+>에 영부인 손명순여사에 대한 기사(손명순여사가 92년말 대선직후 백화점에서 8천만원을 소매치기당하였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형사고발과 정정보도청구등 강경대응을 하면서 김대통령의 유엔과 캐나다방문취재단에서 동아일보를 전격 제외시켜 감정적인 보복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와 같이 예정되있던 해외수행취재단에서 청와대가 특정언론사를 일방적으로 배제한 것은 처음있는 일일 뿐 아니라 이것은 동아일보가 당초 나왔던 기사와 같은 크기로 오보였음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게재하였음에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4)대구가스폭발사고와 관련된 언론통제
1995.4.28. 발생한 대구가스폭발사고와 관련하여 당시에 한국방송공사등 방송사들이 공보처에 현장중계등을 위해 낮방송허가를 신청하였으나 공보처에서 단10분간만 방송허가를 해주어 각 방송사가 계획되어 있던 고교야구중계를 하는 반면 수십명이 사망한 참사에 대하여는 사실상 보도를 하지 못하였던 일이 발생하였다. 방송공사는 참사 당일 오전 11시경부터 몇차례에 걸쳐 이미 승인이 난 고교야구 생중계 내용에 대한 일부 변경 승인을 공보처에 요청했으나 오전 11:55경 ‘불허’통보를 받았으며, 자막 형태의 속보라도 내보낼 수 있도록 조처해달라고 요청해 가까스로 승인을 받아낸 뒤인 오후 2:02경부터야 그나마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냈다.
이와 관련하여 대구기독교청년회회원인 김경민씨는 국가와 한국방송공사를 상대로 대구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사고에 대한 부당한 보도로 인해 정신적인 손해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1억원의 손해배상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보처가 위와 같이 낮방송허가를 하여주지 않았고 한국방송공사는 <추적60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대구참사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고 취재에 응하였는데 그 부분이 빠진 채로 방송되었다는 점에서 기대권을 침해한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기대권을 소송을 통하여 주장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6.27. 단체장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스폭발사고에 대하여 현 정권이 축소보도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낮시간대의 긴급방송에 대한 통제근거인 전파법 제11조(무선국의 허가)에 따른 방송국 허가장의 부관사항이 ‘외국 방송을 국내에 중계방송하거나 방송시간을 연장하고자 할 때는 공보처 장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대구사고와 같이 중대사건의 경우에도 일일이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권의 이해에 따라 이용될 소지가 있는만큼 이를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나.언론기관의 공정보도와 구제신청
(1)언론보도의 공정성
(가)1995년에 언론기관의 편향된 보도태도가 가장 문제된 사건은 5월에 발생한 한국통신노조사태에 대한 보도에서였는데 당시 언론기관들은 ‘국가전복의 기도’라는 정부측 입장에서 편향적인 보도를 하였다.
한국 통신노조는 1995.5.18. 자신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매도한데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는 보도자료를 만들어 담당 기자들에게 전달하였지만 다음날 대부분의 언론들은 노조측의 해명을 거의 다루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두절미한 채 ‘파업불사’주장만을 내보냈으며, 언론사들은 한발 더 나아가 ‘분규의 이면”그릇된 노동운동”불법파업 매후 엄단하라’는 제목의 사설로 노조를 몰아 세웠다. 즉, 한국통신 노조의 경우 ‘사측이 노조간부 64명을 징계할 경우 파업돌입도 불사한다’는 방어적 태도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마치 노조가 먼저 파업을 선언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보도하였으며 제목조차 ‘통신대란”전시비상사태에 버금가는 혼란”국가전산망 마비’등 파업이후의 혼란상을 부추키면서 국민들에게 부정적 인상을 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편향적인 보도와 관련하여 한국통신 노조는 1995.7.19. 한국통신 사태와 관련한 김영삼 대통령과 박홍서강대 총장의 발언을 사실확인 없이 보도했다며 중앙일보등 8개 종합일간지와 3개 방송사, 연합통신사를 상대로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중재신청과 정정보도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 언론사들은 김 대통령이 ‘한통의 불법파업에는 국가전복 저의가 있다’는 취지로 한 말과 ‘한통 노조 북한에서 사전조종했다’는 박총장의 발언을 한통노조의 반론권을 무시한채 보도하여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통신 노조에 관한 터무니없는 발언을 이들 언론이 사실확인 없이 보도함으로써 노조가 명예와 신용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나)위의 사건이외에도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재벌회사의 회장들이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자 언론사들 특히, 중앙일보, 경향신문, 문화일보등 재벌소유의 언론사들은 ‘재벌기업의 비자금처벌은 경제위기를 일으킨다’는 논조로 보도하여 사주를 위한 간접지원을 해주었다. 삼성그룹이 모기업인 중앙일보는 ‘기업조사 옥석을 가려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하여 ‘형사처벌은 일부 재벌에 국한하여야 한다’는 논지를 펴는가 하면 다른 사설에서는 갑자기 ‘경제위기론’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한화그룹을 모기업으로 하고 있는 경향신문은 11.10.자 기사로 기업인 조사를 빨리 끝낼 것이라는 변호성 기사를 내보내고 돈을 받은 정치인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취지로 정치권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공정한 보도를 본연의 사명으로 하고 있는 언론사가 오히려 사주를 위한 변호성여론조성을 기도하였다는 점에서 언론사의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문제점을 던지고 있다.
(다)우리나라의 뉴스보도가 과대한 것은 익히 얄려져 있는 것이지만 한국방송공사 제1텔레비전의 뉴스프로그램인 <9시뉴스>가 4.1.부터 5.23.까지 53일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대통령 관련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는 일본, 영국, 프랑스등 외국 공영방송의 자국 최고통치권자에 대한 보도 비중에 비해 최고 8배 이상에 이르는 수치인 것으로 나타나 과잉보도라고 할 수 밖에 없는데 노조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9시뉴스>는 53일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 한꼭지 이상의 대통령 관련기사를 보도하지 않은 날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요일의 경우 <9시뉴스>가 기획, 화제성 기사 중심으로 방송되기 때문에 대통령 관련 기사는 사실상 하루도 빠짐없이 나간 셈일 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방송사의 권력눈치보기가 과거 군사정권시절과 별반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라)한국방송공사 제2라디오의 주부대상 인기 프로그램인 ‘안녕하세요, 김홍신.김수미입니다’의 공동진행을 맡아온 작가 김홍신씨가 1995.3.8. 방송 진행 도중 자신의 신문 칼럼 내용 및 강연활동과 관련한 외압을 이유로 방송을 그만 둔다고 밝혀 파문에 일었는데 그는 부산 <국제신문>에 매주 1차례씩 기고해 오던 칼럼 ‘김홍신의 세태만필’에서도 2.8.자로 쓴 ‘이제 민자당은 사당’이라는 내용의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중단당했다. 이에 대하여 김씨는 ‘당시 신문사쪽에서 외부로부터 칼럼의 비판 수위를 낮춰달라는 요구가 들어오고 회사에서도 책임문제가 거론되는 등 문제가 심각해져 글을 더이상 실을 수 없다고 전해왔다’고 말했으며 위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사건은 현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나 글을 싣는 것에 대하여 여전히 정권으로부터 압력이 있으며 언론기관 스스로가 이를 정리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었다.
(마)이와는 달리 한국방송공사는 국내 방송사상 처음으로 보도제작 전분야에 걸쳐 기준을 명시한 ‘공정보도 일반기준’을 마련하여 공정보도에 한걸음 다가섰다. 방송공사 보도본부는 1995.5.27. ‘비판보도 당사자의 반론권인정, 공안.노동 관련보도의 인권침해 금지, 불신 편견을 조장하는 북한보도자제’등을 골자로 한 모두 11개항의 ‘공정보도 일반 기준’을 채택했다. 이 기준안은 특히 규정을 어길 경우 징계조처도 취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취재기자에게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고, 제작책임자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지키도록 규정하는등 전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보도기준은 그 실천여부가 중요한 것이지만 이는 지난해 노사가 공정 보도안을 제정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노조쪽이 자체안을 마련하고 회사쪽이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마련된 것으로서 결국 언론사의 공정보도 역시 노동조합의 역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하겠다.
(2)언론보도와 관련된 정정보도
(가)언론보도와 관련하여 그 당사자들이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 정정보도청구를 하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하나의 권력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언론기관의 불공정한 보도에 대하여 당사자인 국민들이 이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며 이러한 사례들이 늘어날수록 정정보도의 기준등이 명백하여 질 것으로 기대된다.
(나)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 50부는 1995.4.23. 오모씨등 서울대 사회대 86학번 여자졸업생 11명이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심판 청구사건에서 ‘피신청인 회사는 표지와 목차에 각각 반론문이란 제목과 함께 본문에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며 원고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기사의 주인공이 서울대 사회대 86학번 여학생이라고 보도됐고 오씨 등 신청인들이 모두 같은 대학 사회대 86학번 여학생인 사실이 인정되므로 인격적 법익도 침해됐다고 할 수 있다’며 ‘따라서 피신청인 회사는 “기사와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정보도문을 게재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오씨등은 지난해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지<필> 94년 8월호에 ‘호스티스 출신 서울대 여대생의 충격고백’이란 제목의 수기기사에서 ‘운동권 선배와 연애 끝에 배신당한 뒤 호스티스 생활과 재벌 회장과의 동거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자 ‘사회대 86학번 여학생 48명중 기사내용과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정정보도 신청을 냈다. 이 판결은 언론보도 내용에 이름이 직접 거명되지 않았다 해도 특정인들과 명백한 연관성이 있는 내용이라면 관련 인물들의 인격을 침해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어 주목되며 그 동안 여성지등에 무분별하게 게재되던 익명의 고백수기형식의 글에 대한 규제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정보도청구사상 처음으로 10일간에 거쳐 반론문을 게재하라는 판결이 서부지원 제5민사부에서 1995.7.14. 나왔는데 그 판결에서 재판부는 장기기증운동본부가 국민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정정보도청구소송에서 10일간 총13회의 반론문을 게재하라고 하였다. 장기기증운동본부측은 3.20.부터 13회에 걸쳐 국민일보에서 ‘장기기증운동본부내에 비리가 있다’는 기사를 내보낸데 대하여 사실과 다르다면서 언론중재신청 및 정정보도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 판결은 지금까지의 반론문게재가 기사의 크기나 보도횟수와는 상관없이 1,2단정도로 이루어지던 것에서 탈피한 것으로 구체적인 위치와 크기 및 내용까지도 판결 내용으로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민사 5부는 1995.2.21. 정현백 성균관대교수가 <한국방송공사>와 <서울방송>을 상대로 낸 정정보도 청구소송에서 ‘한국방송공사와 서울방송은 정정보도를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위 방송사들은 1994.년 정현백교수가 독일에 유학당시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는 취지의 기사를 확인없이 보도한 바 있었다.
또한 대법원 형사 3부는 1995.12.11. 전 <한겨레신문> 이사 김태홍씨와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신홍범씨, <한국일보>기자 김주언씨 등에 대한 보도지침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김씨등이 <말>에 공개한 사항 중 외교상 기밀에 해당된다고 기소된 내용들은 이미 외국 언론에 보도됐거나 외신을 통해 국내 언론에 배포된 것으로 이런 사항들은 외교상 기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들은 군사정권시절인 지난 86년 9월 월간 <말> 특집호에 당시 문공부가 내려보낸 보도지침을 폭로했다가 외교상 기밀누설 위반등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 및 선고유예 등의 판결을 받은 뒤 사건발생 8년이 넘어서야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동아일보는 1994.9.9.자 31면에서 ‘고교에 주사파침투’라는 제목으로 ‘지하조직 “샘”이 있으며 이는 서울 남부지역의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학습전파하고 불법시위등에 동원하여 이적단체구성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취지의 기사를 내보냈으나 1995.2.26.자 신문에서 ‘샘’은 청소년문화단체이지 주체사상을 학습전파하는 기관이 아니며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도 아니라는 취지의 반론문을 게재하였다. 이 사건은 지난 94년의 공안정국에서 고등학교에도 주사파조직이 있다는 취지의 발표로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 ‘샘’사건에 대하여 당시 사건을 과장하여 보도하는데 앞장섰던 동아일보에 대하여 당사자들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하여 게재된 것이다.
다.통합방송법안 논의
방송의 기본틀인 방송기구개편과 관련하여 방송법개정안이 입법예고까지 되었다가 야당, 시민단체의 반발로 국회통과를 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입법예고 되었던 방송법개정법률안에서는 방송위원회의 권한 및 구성문제와 재벌의 방송사참여등이 중요한 문제로 되었는데 정부측은 방송사의 인허가권을 비롯한 권한을 여전히 공보처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반면 이에 대하여 야당뿐만 아니라 방송위원회에서조차 방송사업자 허가나 승인에는 방송의 운용.편성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방송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크게 반발하였다. 또한 재벌사의 방송사참여와 관련하여 이를 가능하도록 한 법안내용에 대하여 야당과 시민단체는 이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반대했다. 정부안에 대해 국민회의, 민주당, 자민련 등 야당은 독자적으로 만든 법률안에서 방송사업 허가를 방송총괄기구인 방송위원회에 추천권을,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허가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계획되었다.
이와 같이 통합방송법안을 둘러싸고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1995.12.5.국회 문화체육공보위원회에서는 계류중인 정부의 방송법개정안을 여당에서 나서서 폐기하기로 하여 결국 차기 국회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주무부처였던 공보처가 충분한 여론수렴없이 무리하게 법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야당과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등 4개방송사노조가 파업에 대한 찬반투표에 들어가는등 방송관계종사자들로부터도 반발이 있자 이를 스스로 철회한 것이며 이는 정부가 방송기구를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제정한 입법안을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똘똘 뭉쳐서 폐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라.통신의 자유및 사생활보호
(1)정보통신부는 1995.2.14.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컴퓨터통신을 통하여 제공되는 정보도 1995.4.6.부터 음성정보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따르면 컴퓨터통신을 통하여 유통되는 정보의 심의를 위하여 정보통신부 산하에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설치, 운영되는데 여기서는 일반공개를 목적으로 한 정보중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내놓는 정보와 공연윤리위원회등 다른 법규에 의한 심의대상인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심의하게 된다. 이로써 컴퓨터통신정보도 정부의 통제대상이 되어 비윤리적인 정보등의 규제가 가능하여졌지만 반면에 정부에 비판적인 정보에 대한 통제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명확한 기준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컴퓨터통신 서비스인 ‘하이텔’을 운영하는 한국피시통신이 한국통신 노사분규중 유덕상 한통노동조합장의 메시지를 통신대화방에서 삭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피시통신은 1995.6.2. 당시 한국통신파업과 관련된 지시를 하던 유위원장의 메세지가 공공질서를 어기는 것으므로 회사의 약관에 따라 삭제하였다고 밝혔다.
유위원장은 수배상태에서 위 통신을 이용하여 조합원들에게 투쟁지침을 전달하여 왔는데 한국피시통신은 정보통신부의 압력으로 게시물삭제를 하였던 것으로 밝혀져 피시통신과 관련하여 그 게시물을 회사가 임의적인 기준으로 삭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개인 사생활의 보호
타인에 의한 개인사생활의 침해는 여전히 있었는데 예전과는 달리 그 침해자가 국가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첨단의 장비를 갖춘 사설정보제공업자들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더욱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1995.9.5. 한건당 1백만원정도의 돈을 받고 의뢰인에게 전화도청 내용을 제출한 심부름센타직원 3명이 통신비밀보호법위반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이들이 도청한 것에는 1994.5. 모목재회사로부터 이 회사의 해고근로자 김모씨의 동향을 파악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이를 도청하였다는 것도 있어 이러한 사설 심부름센타의 도청행위가 회사와 노동자와의 노사문제에 악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여전히 국가기관에 의한 도청행위가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으로 1995.9.27. 서울 관악구 봉천8동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옥상의 전화단자함에서 연구소의 전화선과 연결된 고성능도청장치와 이를 녹음하는 소형녹음기가 발견되었다. 이 녹음기에는 모든 통화내용이 깨끗하게 녹음되어 있었는데 이는 정보기관의 도청으로 보여 아직도 기관에 의한 재야단체의 전화도청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확인하여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법원은 국군 보안사(현 기무사)의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헌법에 보장된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므로 국가는 이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찰대상자에 대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하였다.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 12부는 노무현 전민주당의원등 147명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이들에게 손해배상금으로 모두 1억8천만원을 지급하라며 판결을 선고하였는데 이는 국가기관의 개인에 대한 사찰이 위법임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마.국가기관의 정보통제
총무처는 국민의 알권리보장과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보공개법시안을 입법예고 하였다가 폐기하였다. 입법예고된 내용에 따르면 국민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정보의 사용목적을 밝혀 공공기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해당기관은 15일이내에 공개여부를 결정하여 제한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거나 복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며 다만 비밀로 분류된 사안이나 국익과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는 공개대상에서 제외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위 공개법안은 국무회의과정에서 다른 부처의 반대에 부딪혀 정기국회에 제출되지도 못하고 폐기되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재정경제원, 통일원, 정보통신부등이 총무처의 법안이 너무 혁신적이어서 국가의 이익을 심각하게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강하게 반발하여서인데 하지만 다른 부처가 우려하는 부분은 규정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는 비공개규정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에 반해서 서울시는 내년 상반기중 ‘정보공개에 관한 조례’를 정보공개법의 실시여부와 상관없이 제정할 것을 밝혔는데 이는 시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제정되는 것으로 서울시는 법률상 비밀사항등을 제외한 비공개부분을 최소한으로 할 것임을 밝혔다. 이는 위와 같이 정보공개법안의 국회상정이 무산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여민주사회를 위한 시민연대는 ‘공익정보제공자보호등에 관한 조례’제정에 관한 청원을 서울시의회에 제출하였는데 지방의회에 내부비리고발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의 조례제청청원이 제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피용자가 시민의 건강과 안정을 위협하는 사항이나 공직사회의 부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이유로 불이익한 대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위 단체는 위와 같은 내용의 법률안을 이미 국회에 입법청원한 바 있으나 아직 입법화되지 않은 상태이다.
바.언론기관의 노동쟁의
(가)언론기관의 노동조합의 쟁의는 단순한 근로조건의 개선이나 부당해고 등의 문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언론사의 특성이 보도에 있다는 측면에서 공정보도나 편집권의 독립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나)1995년에 가장 크게 문제되었던 언론사의 노동쟁의는 문화일보사태였다. 이 사태는 회사측이 1995.7.15. 노조위원장등 노동조합간부들을 부당전보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노조가 반발을 하고 사측에서 모기업인 현대그룹의 전통적인 강경대응을 하면서 파업사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문화일보노조는 10.31. 파업을 결의하고 이후 14일동안 파업하여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하였으며 위와 같은 전출이 서울지방노동위에서 부당전출로 판단됨에 따라 노조쪽은 명분을 얻게 되었고 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명령불이행과 관련해 문화일보 사장이 형사입건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국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등 문제가 더욱 확산되자 회사측과 노조가 합의안을 도출하여 파업 15일만인 11.14. 단체협약이 타결되면서 파업이 종료되었다.
합의안에서 노사는 당일호봉제도입 등 임금과 관련된 것 이외에도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당인사에 대하여 회사측이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였다. 노동문제에 관하여 강경대응을 하여왔던 사측에 비하여 노조측은 일관되게 합리적인 자세를 견지한 점에서 돋보였다고 할 것이다.
(다)그동안 경영악화로 인하여 갈등이 내연되던 국민일보가 1995.6.26. 노조원들이 비상총회를 열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국민일보사의 갈등은 기본적으로는 경영악화에 있는 것으로 회사측이 경영개선을 위하여 조직개편을 무리하게 단행하고 노조에서는 이에 대해 재단전입금의 내역을 밝히고 편집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불거진 것이었다.
회사쪽은 경영적자가 총900억원에 이른다는 이유로 2년내에 경영정상화가 안되면 폐업하겠다고 노조측에 통고하였을 뿐 아니라 경영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수당을 지연지급하는데다 상여금 반납 각서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국민일보사태는 언론사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해에 따라 언론사를 창립하고서 경영이 좋지 않자 무책임하게 폐업하고자 하는 언론사주들의 경영관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라)이와 관련하여 1995.8.7.에는 안기부의 4국장으로 있던 안병섭씨가 충청일보의 주주총회에서 현직안기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언론사 대표이사로 선임되어 많은 파문을 일으켰는데 충청일보사원들과 언론노련등에서는 언론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일로 크게 반발하고 조합원들의 집단행동으로 이어지자 결국 같은 달 24. 안씨가 자진사퇴의사를 밝힘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안기부간부가 언론사의 사장으로 영입되는 것은 노조원들의 힘으로 막아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5.집회, 결사의 자유
가.집회, 시위현황 및 양상
1995년 1월부터 8월까지의 시위현황은 총 4,131건에 참가인원은 1,425,20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를 지역별로 보면 서울이 1,347건에 537,500명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다음에는 경기도로 770건에 177,600명이고 나머지는 각 시도가 차지하고 있다.
이를 내용적으로 구분하여 보면 학내집회가 1,460건에 531,800명, 시가지집회가 523건에 212,700명, 노사분규가 73건에 48,200명, 기타민원성집회가 2,075건에 632,5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94년과 비교하여 볼 때 학내집회가 감소한 대신 민원성집회가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시위양태중 화염병이 사용된 것은 48건에 8,973개이고 투석은 134회, 각목사용은 143회, 철도 및 도로점거는 75건, 파출소등 공공기관피습은 17건이었으며 이러한 집회 및 시위에 동원된 경찰력은 1995년 1월부터 8월까지 13,152개중대에 1,578,24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사용된 최루탄은 29,396발에 다연발탄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