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민변 촛불백서 발간

2010-05-27 182

 

[보도자료]


 


민변 촛불백서 발간


 



1. 귀 언론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2. 2008년 미국산쇠고기수입조치로 촉발된 촛불집회가 시작된지 2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회장 백승헌, 이하 ‘민변’)은 2010. 3. 4. 「민변 촛불백서 발간위원회(발간위원장: 이오영 변호사)」를 구성하여 3개 여월 간 촛불과 관련한 민변의 활동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2010. 5. 27. 백서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3. 촛불집회 2주년이 지난 지금도 집회참가, 광고주 불매운동 등으로 기소된 시민들에 대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반면 평화적 시민들을 폭행했던 경찰 지도부는 단 한명도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촛불백서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작업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4. 이번 촛불백서 발간을 계기로 2년 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기억하면서 촛불의 정신을 살려가는 활동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5. 감사합니다.


 


첨부 자료 1. 촛불백서 목차


첨부 자료 2. 발간사와 권두언


 


 


 


2010년 5월 27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백 승 헌  


첨부 1. 촛불백서 목차


 


발간사


권두언


제 1부 총설 2008년 촛불과 민변의 활동


제 2부 민변의 촛불관련 주요 활동과 변론


국산 쇠고기 고시 위헌확인 헌법소원청구 사건


약식기소에 불복하기!_정식재판청구에서부터 판결선고까지


민변의 인권침해감시단 활동과 평가


촛불집회 관련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청구 사건


촛불 관련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적 대응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10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사건


형법 제185조 일반교통방해 위헌법률심판 사건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 위반사건_이른바 ‘허위사실유포죄’ 사건


촛불집회참가 등으로 인한 운전면허 취소사건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 사건


PD수첩 사건


촛불집회 관련 단체 정부보조금 중단사건


제 3부 촛불 관련 자료


사진으로 본 촛불과 민변


촛불집회 주요일지


민변 촛불 일지


촛불 관련 대통령, 검찰 등의 주요 발언


민변 성명서, 논평과 보도자료 모음


쇠고기협상에 대한 민변의 문제제기


촛불 관련 매뉴얼과 유인물


신영철 대법관 재판개입에 대한 민변의 대응


제 4부 밖에서 본 촛불과 민변


한 촛불시민이 본 민변


조중동 광고불매운동 촛불이 본 민변


40대 중반에 경험한 추억의 닭장차 투어


촛불에서 배울 것들에 대해서


촛불 보도에 민변이 있었다


민변 촛불백서 발간위원회 명단(가나다순)


 


 


 


첨부 2. 발간사와 권두언


발간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을 계기로 펼쳐진 촛불시위가 이제 2년이 지났습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광우병 문제와 국민보건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우리에게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광우병은 그 피해가 단기간 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고, 불과 2년이 지난 현재 그 피해가 우리 눈앞에 목격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광우병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판단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촛불시위는 광우병의 위험성 때문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한미FTA 협상과정에서 드러났던 시장개방과 경제 주권의 문제, 이명박 정부로의 정권 교체 이후에 일상화된 소통부재의 일방독주식 국정운영, 그리고 시민의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한 국민 정서가, 결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하여, 여러 달 동안 국민들의 광범위한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러 안타깝게도 촛불시위 이후 이러한 문제점들은 개선되기는 커녕 악화되어만 왔습니다. 미국산 쇠고기의 검역절차는 국민들의 끝없는 불신을 초래하고 있고, 국정은 더욱 일방독주로 치닫아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형사고소를 당하거나 거액의 민사소송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뜻에서 2년전의 촛불시위가 가지는 의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이것은 촛불시위의 의에 대하여 우리 사회 전체가 여전히 적극적이고 성찰적인 관점을 가져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민변에게 있어 촛불시위는 어느 다른 활동에 비추어도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문제가 된 모든 영역의 법률분야에 민변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고, 그 활동 양태도 단순히 법정에 출석하는 고전적인 변호사 활동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변은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하면서 경찰의 폭력적인 행위를 감시하거나 방지하고, 연행된 시민이 있을 경우에는 최대한 신속하게 연행 장소로 출동하였으며, 경찰서, 검찰청, 그리고 법정에까지 이어지는 변론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시위와 직접 관련된 법률문제만이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과 각종 정보공개청구 그리고 시위와 함께 불붙은 불매운동 등에 대한 변론 등 전 분야를 포괄하여 법률 지원활동을 수행했고, 민․형사와 헌법소송 등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사회적 쟁점에 대한 법적 문제제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회원들은 현장에서 시민과 직접 소통하였고, 그 덕분 민변은 시민의 수호자라는 영예로운 명칭도 얻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원 변호사 여러 명이 다치고 심지어 연행되어 기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촛불시위과정에서 민변이 보여준 역할은 그 후 민변의 여러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민변에 대한 신뢰 및 기대도 그에 비례하여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 동력을 어떻게 살려 나가는지가 앞으로의 민변 활동의 성격과 힘을 보여주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 시위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비로소 활동 백서를 내고 평가를 시도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법률문제가 이제야 어느 정도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건이 법원에 계속 중입니다. 그 결과 또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일부 퇴영적인 부분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과정들을 성찰하면서 앞으로를 준비하는 적절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그간에 민변이 수행해 온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법률적인 평가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촛불시위의 총체적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나아갈 바를 생각하여야 하는 선거 국면이 바로 앞에 와 있습니다. 대의제로서의 선거와 촛불집회와 같은 자발성에 기초한 직접 민주주의의 정신은 우리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양대 축입니다. 백서의 발간을 계기로 2년 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기억하면서 촛불의 정신을 살려가는 활동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하고 계신 시민 여러분과 선후배 변호사님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0. 5.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백승헌


권두언


– 2008년 촛불의 의미와 민변활동에 대한 평가 –


1.


 


2008년 5월 2일부터 4개월 가까이, 처음에는 청계광장에서 여중생들을 주축으로 시작되어 후에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남녀노소, 사회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결합하면서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촛불. 2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촛불을 회상해 보면 여전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한편 그 이후에 우리에게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전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영어몰입교육, 강부자내각의 구성 등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출범 초기부터 대기업과 부유층을 위한 각종 규제완화조치와 학교자율화, 대운하 추진, 반서민적인 정책의 일방적 강행 등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한미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008년 4월 17일 한미쇠고기협상이 전격적으로 타결되었다. 국민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미 FTA 비준을 서둘러오던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검역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서둘러 미국에 선물을 안겨준 셈이었다.


뒤이어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에도 수입 금지조치를 취할 수 없으며, 연령이나 부위제한 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해야 한다는 한미쇠고기협상의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야당은 쇠고기협상 원천무효를 주장하면서 협상철회를 요구하였다. 국민들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4월 29일 MBC PD수첩은 ‘긴급취재-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방영하였다.


 


그 후 인터넷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던 중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중고생들이 주축이 되어 제1차 촛불문화제가 열렸고, 촛불문화제는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연이어 계속되었다. 경찰이 촛불문화제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사법처리하겠다고 나선 가운데 5월 6일에는 1,700여 시민사회단체와 인터넷 커뮤니티가 모여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하였고, ‘미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2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국민에게 사과하였다.


그러나 촛불은 계속되었고, 5월 24일에는 촛불문화제 후 첫 거리행진과 밤샘집회, 최초의 도로점거, 최초의 끝장 시위로 이어졌으며, 경찰은 최초로 51명을 연행하였다. 6월 10일은 6.10항쟁 21주년으로, 당일에는 전국에서 21년 만의 최대 규모인 100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당일 대규모 시위를 예상한 경찰은 시민들의 거리행진을 차단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 대형 철제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아 용접하여 만든 장애물(일명 ‘명박산성’)을 설치하였다.


이후 정부는 강경진압 일변도로 태도를 바꾸었으나, 시민들의 계속되는 촛불집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6월 15일을 기점으로 촛불집회의 의제는 대운하 철회, 의료 및 공기업민영화 저지, 물 사유화 저지, 교육 자율화 반대, 공영방송 수호 등 이른바 촛불집회 5대의제로 확산되었다. 촛불은 이명박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하여 온 정책 전반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쪽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6월 19일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식탁 안전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꼼꼼히 헤아리지 못했다.”면서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 시위대의 함성과 내가 오래 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도 들었다. 수없이 자신을 자책하였다.”고 고백하면서 사과하였다. 당시 이대통령은 “(우리)정부는 미국정부가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출을 보장하는 제도를 요구하고 있다”며 “미국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시를 보류할 것이고 수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 국민에게 ‘재협상 불가’방침에 대한 일방적 이해를 구하면서, “미국정부의 확고한 보장을 받아내겠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국민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안전을) 보장한다면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였고 촛불집회는 계속되었다.


한편, 조선, 동아 등의 촛불집회에 대한 편파보도와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말 바꾸기에 분노한 시민들은 촛불집회 과정에서 조중동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아가 온라인 카페를 통해 조중동 광고주들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정부는 결국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을 뒤집고 6월 26일 ‘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관보에 게재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제100회 촛불문화제를 고비로 촛불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2.


 


촛불집회는 생명과 건강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부의 행태에 대한 공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정부의 검역주권을 포기한 굴욕협상에 대하여 주권자인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여 국정에 대해 직접적인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 촛불집회는 과거의 집회와는 달리 여중생들로부터 시작되어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자발적 학습을 통해 의사표현의 주체를 형성해 나간 과정이었다. 그 규모와 지속성에 있어서는 6.10항쟁 이후 최대의 민주적 저항으로서 가히 촛불항쟁이라고 부를 만 했다.


촛불에 의하여 표현된 의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로부터 시작하여 촛불의 진행과 함께 교육자율화, 의료민영화, 대운하강행, 공공부문 민영화, 일방적인 친기업정책 등 현 정부의 국정운영기조와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독선적 일방주의와 소통부재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가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 굴욕협상으로 점화되어 폭발한 것이었다.


또 다른 의견은 촛불에서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고, 촛불 그 자체를 참여민주주의의 한 축으로 평가하였고, 어떤 의견은 촛불을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표현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약속에 따라 미 쇠고기수입고시를 잠시 연기하고, 미국과의 추가협상을 통해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 30개월령 이상의 쇠고기 수입을 제외하는 등 수입조건을 강화했다. 이점에서 촛불시위는 정부의 실책을 시민의 참여로 교정해 낸 참여민주주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촛불집회는 일본, 대만, 호주 등 주변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에도 영향을 미쳐 수입재개를 미루거나 수입조건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2008년의 촛불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현상으로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촛불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대중 자율성의 낙관적 측면만 강조하고 있어 과도한 상찬 일색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는바, 촛불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대체로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촛불집회가 반대의사의 표명에 그쳤을 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촛불 이후의 과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어떠한 담론도 체계적으로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촛불의 동력이 현실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일반적으로 야당, 진보정당 등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보였고, 이것은 국민의 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끝으로, 촛불은 광우병 쇠고기에 의한 가족의 건강위협에 대한 반응으로서 중산층의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한 까닭에 노동자, 비정규직, 빈민여성, 철거민 등의 계급문제와 사회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촛불집회 이후 공공의료, 공교육문제, 언론공공성 수호 등 국민들의 사회 공공성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이 상당부분 넓어지고 화물연대, YTN, MBC 파업 등 노동문제에 대하여도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던 점은 촛불의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으로 평가될 수 있고, 촛불집회 이후 언론소비자주권연대, 진실을 알리는 시민 등 새로 생긴 운동단체들이 많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끝으로, 촛불의 동력을 어떻게 정치적 힘으로 결집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대의정치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대의정치 체제는 5년마다 행해지는 대통령선거와 4년마다 행해지는 총선 및 지방자치 선거 외에는 국민의 의사를 직접 정치과정에 반영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현행 헌법이 87년 체제의 반영으로서 군사독재의 종식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독선적인 정권이 출현할 경우 – 더구나 집권세력에 동조하는 극우보수 언론이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의 지형에서는 – 집권기간 중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실질적으로 87년 체제 이전으로 퇴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행태는 그것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국민의 의사를 직접 정치과정에 반영하여 대의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는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고, 나아가 헌법개정을 통해 이를 실현하기 위한 헌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3.


 


촛불집회에 대응하여 이명박 정부는 비밀주의, 허위주장, 거짓사과 등으로 일관하는 한편 경찰, 검찰, 행정기관을 총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실력행사와 행정적, 법적수단을 구사하였다. 그중에는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과 원천봉쇄, 검찰의 무리하고 편파적인 수사와 기소에 이어 운전면허취소, 교부금 중단 등 통상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행정처분까지 포함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집회 기간동안 상시적으로 대규모 경찰력과 전경부대를 동원하고 경찰버스와 컨테이너 등으로 광화문 사거리를 폐쇄하여 촛불문화제 등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는 물대포를 사용하고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하였다.


한편에서 검찰은 PD수첩 보도에 대한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정운천의 명예훼손 고소를 받아들여 수사 끝에 기소하였고, 촛불집회와 시위 참가자에 대하여 경찰의 검거와 검찰의 대량 기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이외에 형법상의 일반교통방해죄, 전기통신기본법상의 공익위해목적허위통신죄의 적용 등이 이어졌으며, 조중동 광고주불매운동 카페운영자에 대하여는 형법상의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여 기소하는 등 지나친 무리수를 보였다.


그 외에 촛불집회참가 자동차 운행자에 대하여 운전면허를 취소하고 동시에 일반교통방해죄로 기소하는 한편, 음향장비대여자의 운전면허를 취소하고, 촛불집회관련단체에 대해서는 정부보조금지급을 중단하는 등 행정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와 같은 대응에 대하여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우선 신임 신영철 대법관은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던 2008년 7월 촛불재판을 특정판사에게 몰아주기 배당을 하였다가 단독판사들의 문제제기에 봉착하여 컴퓨터 배당으로 전환하였고, 그 후 10월과 11월에는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에 이메일을 보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중 야간집회금지규정에 대하여 위헌제청이 된 사실에 관계없이 현행법에 따라 신속하게 결론을 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직접적, 구체적으로 재판에 간섭하였던 사실이 2009년 2월경 언론보도로 드러났다.


또한 촛불재판을 담당한 재판부는 촛불문화제 참가자에 대하여 적용된 형법상의 일반교통방해죄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하고, 전기통신기본법 위반사건, 광고주불매운동사건에 대해서도 모두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른 한편 행정법원은 여성노동자회에 대한 보조금중단처분취소청구 사건에서 원고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헌법재판소는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미 쇠고기수입고시에 대하여 국민소송으로 진행된 헌법소원사건에 관하여 청구인들의 기본권침해가능성, 자기관련성, 침해의 현재성 등 적법성요건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면서도 2008년 12월 26일 공개변론 없이 청구기각결정을 선고함으로써 정부의 편에 서서 국민의 열망을 배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에게 적용된 형법 제185조(일반교통방해)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사건에서 헌법재판관 9인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을 선고하였으며, 야간집회의 원칙적 금지를 규정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시간)에 대하여 정면으로 위헌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함으로써 위헌적인 위 조항이 잠정적으로 적용될 빌미를 제공하였다.


 


4.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초기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촛불에 대처하였다. 지속적인 성명과 논평 발표, 한미쇠고기협상에 대한 법적, 정책적 문제제기, 국정조사 청원, 정보공개청구 등이 초기부터 민변이 대처해 온 수단들이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국민소송 헌법소원을 기획하고 진행하였던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집회 이후 8월까지 촛불 현장에서의 인권침해감시단 활동과 체포구금된 시민들에 대한 접견, 그리고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를 대리한 고소, 고발 등 촛불과 관련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가능한 모든 법적 구제수단을 동원하였다.


촛불 초기 이와 같이 법률적 대응에 착수하는 한편 조직적이고 능동적인 법률지원을 위해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5월 22일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리고 법률지원단 내에 헌법소원소송진행팀, 고소고발팀, 인권침해감시단, 형사변론팀, 네티즌과잉수사 공동변호인단, 광우병대책회의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하여 각 팀별로 소송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과 관련된 사건의 폭주로 법률지원단구성 회원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심지어 촛불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거나 경찰폭력에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다. 2년이 흐른 2010년 5월 현재까지도 계속중인 소송이 적지 않다.


 


민변은 초기부터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국민의 주목과 신뢰를 획득하였다고 평가받을만하다. 초기의 법적, 정책적 문제제기에 이어 국민소송 헌법소원 청구인단을 모집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과정, 그리고 연행자들에 대한 즉각적인 접견과 대대적인 무료변론으로 범국민적인 신뢰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인권침해감시단을 조직하여 범국민적 촛불시위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를 즉석에서 감시, 구제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전경들과 촛불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충돌을 중재하고 완화하는 완충역할을 자임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집단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또한 민변은 국내 NGO들과 함께 유엔인권이사회 정기세션에 참가하여 촛불집회에 관련된 한국정부의 인권침해상황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도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민변이 전문가단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함에도 직접적인 시위현장 참여의 결과 본의 아니게 운동단체로 규정될 수 있고, 역량을 벗어나는 무리한 사업을 전개한 측면이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이 현실을 규제하는 규범체계인 이상 변호사가 종사하는 모든 영역은 곧 현장성을 갖는 것이고, 따라서 국민적인 에너지의 분출 현장이었던 촛불시위 현장에서의 활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며, 의욕이 앞섰다거나 대처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다한 것이었다. 다만, 높아진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고 앞으로 민변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지는 계속적으로 논의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5.


 


2008년 5월의 촛불로부터 2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촛불은 끝나지 않았다. 청와대 뒷산에서 2008년 6월 10일의 촛불시위를 바라보며 자책하였다고 국민에게 사과하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5월 11일 국무회의석상에서는 “촛불시위 후 2년이 지나 많은 억측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도 촛불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2년 전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에게 거짓사과를 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2년간 많은 억측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주장도 그동안 광우병에 대하여 국내외 학자들이 수행해 온 연구결과와 한층 더 예방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각국의 대응태도에 배치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집권 한나라당 대변인이 “2008년 광우병 대란은 대한민국 체제전복 집단이 기획하고, 일부 매체가 선동하고, 인터넷이 음모의 도구로 이용되고, 거기에 야당까지 부화뇌동한 한 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다.”고 논평한 것은 집권여당의 인식수준이 얼마나 천박하고 국민의 의식으로부터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흘러 촛불은 다시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거리로 저만큼 물러섰으나, 촛불로 인한 상흔은 도처에 남아있다. 민변은 촛불의 초기부터 열정적으로 촛불현장에 뛰어들어 2008년 여름이 끝날 때 까지 촛불시민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그리고 촛불 현장으로부터 생겨난 각종의 법률문제와 소송을 처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아쉬움이 있다 하더라도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법률가단체가 시민의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2010년 5월 현재까지도 그 일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우리 민변은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2008년의 촛불을 기억하기 위해 백서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2008년 촛불집회를 위하여 그리고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해 주신 민변 회원 여러분, 그리고 이번에 촛불백서 간행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끝으로 민변이 촛불집회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 민변 회원들과 결합하여 전문적인 의견과 관련 자료를 제공하여 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10. 5.


최병모(전 민변 회장, 민변 법률지원단장)


 


 


 

첨부파일

0527_[보도자료]민변 촛불백서 발간_사무_05.pdf.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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