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번호: 09-12-사무-11
수신: 대법원 양형위원회
발신: 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제목: [ 의견서] 성범죄 양형기준에관한 의견
전송일자: 2009. 12. 18
전송매수: 4매
[ 의 견 서 ]
‘성범죄 양형기준’에 관한 의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2009. 12. 21. 개최 예정인 양형위원회 제22차 회의를 앞두고 ‘성범죄 양형기준’ 중 ‘주취감경을 비롯한 심신미약 감경’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모임은 지금까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판결들을 검토하여 볼 때,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 인정 또는 주취상태를 감경요소로 쉽게 간주하는 문제는 특정 사건이나 일부 재판부만의 문제가 아닌, 법원 전체의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을 쉽게 인정하고 주취상태를 감경요소로 판단하는 지금까지의 재판 관행은 음주에 대해 관대한 문화와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서, 단순히 개별 사건에 있어서의 형량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기존 관행을 재검토하고 일정한 기준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성폭력 양형기준에 음주감경과 관련한 내용이 명시적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으며, 추후 만들어질 ‘양형기준 매뉴얼’에는 더욱 자세한 기준의 제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1. 심신미약이 아닌 주취상태를 감경인자로 고려하는 것을 양형기준에서 명시적으로 금지하여야 합니다.
종래 판결례에 의하면, 양형이유에서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점”을 감경요인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피고인측의 심신미약 주장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음주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형이유에서는 이와 모순되게 “술에 만취된 상태…”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행 대법원 성범죄 양형기준에는 본인 책임 유무를 기준으로 한 심신미약만 양형인자로 제시되어 있을뿐, 주취상태 자체는 감경인자로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범행의 우발성 역시 양형인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계획적 범행’이 가중적 일반양형인자로 규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양형기준에 의하면 심신미약에 이르지 않은 주취상태는 더 이상 양형의 감경인자로 고려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심신미약에 이를 정도가 아님에도 ‘만취’ 상태를 인정하는 것은 논리모순이며, 그동안 성폭력 범죄에 있어 ‘우발성’이 너무 쉽게 인정되고 감경인자로 고려되어 온 것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양형기준은 바람직한 개선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주취상태를 감경인자로 고려한 것은 오래된 법원의 관행이었으며, 현행 양형기준에서는 단순 주취상태를 양형인자에서 제외한 점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실무에 있어서 단순 주취상태가 감경인자로 고려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행 양형기준에 ‘고려해서는 안 되는 요소’로서 ‘심신미약에 이르지 않은 단순 주취상태’를 제시하여, 양형기준의 취지를 분명히 하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법원의 관행적인 판단을 개선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 판단시, 양형인자 중 ‘계획적 범행’의 요소가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 뒤 심신미약을 엄격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현행 대법원 양형기준에서는 ‘계획적 범행’을 가중적 일반양형인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정의는 ‘범행도구의 사전 준비 및 소지’, ‘사전 공모’, ‘피해자 유인’, ‘증거인멸의 준비’, ‘도주계획의 사전 수립’, ‘그밖에 이에 준하는 경우’의 요소 중 하나 이상에 해당하는 경우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단서로 “다만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알코올, 약물 등의 복용에 의하여 심신장애를 야기한 경우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기존의 판례들은 계획적 범행의 요소를 면밀히 심리하지 않고 주취상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심신미약을 인정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성폭력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는 장소와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고 범행을 할 수 있는 일정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로서는 그러한 시간과 장소를 고려하여 범행 환경을 조성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를 기다리거나, 피해자를 유인해야 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할 방법도 강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폭력 범죄는 기본적으로 계획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판결들을 보면, 이러한 계획적인 요소들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술을 마신 정황만 있으면 “술에 만취하여 우발적으로 범행”하였다고 인정하는 등 가해자에게 관대한 판단을 하여 왔습니다. 이는 “술에 취하면 성적 충동이 강해지고,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우발적으로 성폭력 범행을 저지른다”는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나, 성폭력 범죄는 성적 충동의 문제가 아닌 ‘성적 폭력’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60~70대가 성폭력 가해자인 경우 피해자들은 주로 아동이나 지적장애인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60~70세의 노인들도 20대의 젊은 여성들에게 더 큰 성적 충동을 느낄 것이지만, 자신이 제압할 수 있는 저항력이 약한 집단을 피해자로 선택한 것으로서, 이미 피해자 선택에 있어서부터 계획적인 요소가 개입됨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 판단시에는 이와 같은 계획적 요소들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을 추후에 만들어질 ‘양형기준 매뉴얼’에 반영하여 성폭력 범죄와 계획성, 우발성의 관계에 대해 법원의 인식을 제고하여야 합니다. 앞서 본 것처럼 현행 양형기준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계획적인 범행은 심신미약의 인정과 서로 모순되는 관계이므로 엄격한 판단이 요구되므로 이를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 인정시 만취상태였음을 인정할 합당한 근거 및 이유를 판결문을 통해 제시하여야 합니다.
심신미약 주장을 배척할 경우에는 그 사유를 판결문에서 설명하도록 하고 있으나, 반대로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어떤 이유로 인정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단지 범죄사실에 ‘술에 취하여’라는 문구가 추가될 뿐입니다.
판결문은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담고 있는 문서로서, 단순히 그 결과만이 아닌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성폭력 범죄에 있어 상당수의 가해자들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으며, 실수를 했다는 변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 외에도, 명확한 사실을 부인하는 이러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더 큰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데, 특히 가해자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을 가지고 사람 인생 망치려 한다”, “술에 취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는데 적당히 합의하고 끝내라”,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만 봐줘라”는 등의 압박을 받으면서 2차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근거나 이유 제시 없이 만취상태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되면, 피해자들로서는 사법부와 판결문에 대한 커다란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건에서 ‘만취 상태’였음을 인정하는 것은 혈중알콜농도와 같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닌 가해자 스스로의 진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성폭력 사실의 존재 즉, 유죄인정에 있어서는 피해자 진술을 신뢰하고, 만취상태의 판단에 있어서는 가해자 진술을 신뢰하는 것이 되어 모순적인 태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법원 양형기준은 형사판결에 있어 유죄판단에 못지않게 양형판단도 중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양형판단에 있어 신중한 판단을 유도하고, 판결문의 설득력을 제고하는 차원에서, 심신미약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인정의 근거 및 이유를 판결문을 통해 제시하도록 양형기준 매뉴얼을 통해 권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9. 12. 1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백승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