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 송창권 의원은 2023. 7. 4. ‘제주특별자치도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 보호, 상담 지원 조례안(이하 ’조례안‘이라 함)’에 대한 입법예고를 하였다. 지난해 8월 ‘베이비박스 설치 및 지원을 위한 조례안’이 제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베이비박스’라는 용어만을 삭제한 채 다시금 마련한 ‘제주도 위기영아 보호 상담 지원 조례안’이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는 지적으로 보건복지안전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이후로, 세 번째 조례안이다.
이번 조례안은 최근 감사원의 보건복지부 정기감사를 통해 확인된 제주의 출생미신고 영아가 19명이라는 배경을 근거로 발의가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례안을 제안한 송창권 의원은 ‘제주에서 출생 미신고 영아 19명에 확인됐고, 이 중 7명은 섬에서 육지까지 가서 베이비박스에 맡겼다. 민간기관이 사각지대를 메우고 있는 상황에서 도지사에게 생명을 지킬 책임을 부여하자는 것’이라며, 제안취지를 밝혔다. 제주도의 사업위탁을 받은 민간기관이 합법적으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조례안의 내용 측면에서도 베이비박스 설치 조례안과 실질적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조례안이 ”원가정 보호” 원칙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다. 이번 조례안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① 위기임산부에 대한 출산 및 산후조리 지원, ② 위기임산부에 대한 주거 및 생계 지원, ③ 위기임산부에 대한 아동 양육지원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사업내용만 있을 뿐 예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논의는 없다. 조례와 함께 제출된 “비용추계 미첨부 사유서”는 ”위기영아 일시보호 및 부모상담 등은 기존사업이므로 비용추계에서 제외“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정책이 아동보호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조례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었단가? 제도의 미비를 인정하고, 공백을 확인하며, 보다 아동권리에 기반한 개선방안을 이끌어내려면 예산할당은 필수적이다. 예산이 달리 필요하지 않다는 발의자의 인식은 정녕 아동의 원가정 보호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공공의 책임은 명목상 두었을 뿐, 그저 구색 맞추기 명목으로 위기영아와 임산부 지원 조항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출생이 등록되고,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며 부모와 함께 자라날 권리는 「대한민국헌법」 (이하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인격권의 한 내용으로, 부모에 관한 정보, 가족관계는 나의 신분,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다. 알권리 및 출생등록될 권리가 헌법상의 기본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각각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차례로 확인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이 비준하여 헌법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이하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이 출생 후 즉시 등록되고, 출생시부터 성명권과 국적취득권을 가지며, 자신의 부모를 알고 부모에 의하여 양육받을 권리(제7조), 가족관계를 비롯한 신분을 보존받을 수 있는 권리(제8조), 자신의 의사에 반해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권리(제9조)를 가진다고 명시하였고, 아동권리협약에 따른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9. 10. 대한민국 제5,6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부모의 법적 지위 또는 출신지와 관계없이 모든 아동이 출생신고를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권고하면서, “종교단체가 운영하면서 익명으로 아동유기를 허용하는 베이비박스를 금지하라”고 강조하여 정체성에 대한 아동 권리 실현을 분명히 요구하였다. 조례안은 아동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아동의 출생등록 권리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가족관계를 비롯해 부모의 정보가 정확하게 기재된 출생등록, 부모를 알고, 부모와 함께 자라날 권리는 생의 시작부터 연결되고 누적되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는 익명의 아동인도를 가능케 하여 아동의 총체적 권리를 박탈한다. 전 세계적으로 베이비박스가 아동유기와 영아살해를 막는다는 근거도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왜 아동의 부모가 베이비박스를 찾았는지, 사전에 어떤 지원과 조력이 필요했는지 면밀히 파악하려는 노력도 전혀 없었다. 그 결과는 베이비박스가 단순히 생명을 살렸다는 명제에 호도되는 현실이다. 베이비박스 시설의 합법화 추진에 앞서 모든 아동이 원가정에서 양육될 수 있도록 제주도 차원의 적극적이고 촘촘한 지원체계의 설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더욱이 아동의 권리 실현은 임산부인 여성의 인권과 맞닿아 있다. 여성이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고, 부모가 양육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아동의 출생등록과 보호체계에 구멍 숭숭 뚫렸던 현실을 직시하게 된 지금은 베이비박스가 아니라 아동의 복리 실현에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기에도 부족할 때이다. 그러나 계획도, 비용도 구상되지 않은 허울뿐인 조례안은 이전에 시도된 베이비박스 설치 및 지원을 위한 조례와 다를 바 없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는 지금 당장 베이비박스를 염두에 둔 조례 제정의 시도를 멈춰라. 그리고 아동을 포함해 모든 주민의 복리 실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라. 아동을 중심에 둔 법과 제도가 수립되는 그날까지, 우리 모임은 끝까지 지켜보고 대응할 것이다.
[아동청소년인권위][성명] 제주특별자치도의회는 ‘베이비박스’ 설치를 의도하는 조례 제정을 즉각 중단하라_2023.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