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기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제3자 변제에 동의하지 않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채권을 변제할 수 있을까?

2023-04-03 56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제3자 변제에 동의하지 않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채권을 변제할 수 있을까?

 

김세은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

 

  1. 서언

외교부 장관은 2023. 3. 6. 강제동원 정부해법안을 발표했다(이하 ‘정부안’이라 함). 정부안의 주요 내용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라 함)이 2018년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된 강제동원피해자 또는 그 유족들(이하에서는 피해자와 유족을 구분하지 않고 ‘피해자’라고만 함)의 배상금 채권을 변제한다는 것이다. 일부 피해자들이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재단이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채권에 대해서도 제3자 변제를 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정부안 발표 직후 브리핑에서 ‘법리적으로는 (피해자들이) 판결금(배상금)을 끝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공탁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안다’고 했고, 2023. 3. 10. 서울외신기자클럽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제3자인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지급해도 법률적 문제없다는 국내 권위 있는 전문가 자문을 받아서 해법 마련한 만큼 이 문제도 법률적 소송이 제기된다면 거기에 맞게 대응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과연 재단이 피해자에게 판결금을 지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만약 피해자가 정부안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재단이 이해관계 없는 제3자라고 하더라도 판결금을 지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적자치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가 제3자로부터 돈을 받는 대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재단의 제3자 변제가 효력이 있는지 여부’가 문제된다.

 

  1. 피해자가 정부안을 반대하는 경우에 재단의 제3자 변제가 유효한지 여부

가. 제3자 변제

민법 제469(제삼자의 변제)

① 채무의 변제는 제삼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삼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이해관계 없는 제삼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

민법 제469조에 따르면,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① ‘채무의 성질이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 또는 ②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 또는 ③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는 때’에는 제3자의 변제가 금지된다.

 

나.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란 언제일까? 필자는 아직 이에 관한 판례를 찾지는 못했다. 주석서에는 ‘계약에 의하여 발생한 채권은 계약에 의하여, 단독행위에 의하여 발생한 채권은 단독행위에 의하여 제3자의 급부를 금할 수 있다. 이러한 반대의 의사표시는 채권의 발생과 동시에 할 필요는 없으나 제3자의 변제가 있기 전에 해야 한다’고 기재되어 있다[주해민법 채권총칙(3) 3판170쪽. 민법주해(11) 채권(4) 110쪽 등 참조]. ‘계약’은 당사자의 의사합치로 성립하는 법률행위이고, ‘단독행위’는 행위자의 의사표시만으로 성립하는 법률행위이다. 단독행위로는 유언, 취소·해제·동의·추인, 채무면제나 소유권 포기 등이 있다. 정리하면, ‘채권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를 살펴서 그 성질에 따라 ‘당사자 쌍방의 의사합치(계약에 의하여 발생한 채권)’ 또는 ‘당사자 일방의 의사표시 도달(단독행위에 의하여 발생한 채권)’로 제3자의 변제를 금지할 수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가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채권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위자료청구권)’이다. 이 채권은 당사자 일방(가해자, 피고 기업)의 불법행위(사실행위)로 인하여 민법 제750조에 따라 발생한 것이고, 발생 경위나 성질이 ‘계약에 의하여 발생하는 채권’보다는 ‘단독행위에 의하여 발생하는 채권’ 쪽에 훨씬 더 가깝다. 따라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채권은 채권자 단독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금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 채무의 성질이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

‘채무의 성질상 제3자의 변제가 허용되지 아니하는 때’는 채무가 급부자의 인적 요소에 중점을 두고 있어 채무자의 성질이나 인격, 기능 등의 조건이 의미가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타인이 채무자를 대신하여 급부하는 것은 채무의 이행이라고 보지 아니하는 일신전속적 채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 예로 배우의 연기,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 등을 들 수 있다. 나아가 법인의 대표나 수임인의 채무와 같이 개인적 신뢰를 기초로 하는 법률관계에 기한 채무도 채무의 성질이 제3자에 의한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의견이 있다[지원림, 민법강의 제17판(2020) 961쪽]. 정리하면, 채무자의 인적 요소가 중요해서 채무자 아닌 다른 사람이 채무를 이행했을 때는 채권의 만족을 얻었다고 볼 수 없는 경우에는 채무의 성질상 제3자의 변제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제동원 피해자가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손해배상채권(위자료청구권)의 성질은 어떨까? 위자료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을 의미한다.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이 금전에 의하여 완전히 전보될 수는 없더라도, 우리 민법이 금전배상주의를 택하고 있어 정신적 손해를 금전적으로 나마 위자하도록 하는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가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채권은 그 역사적인 의미를 차치하고도 ‘위자료’라는 자체만으로 단순한 금전채권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측면이 있다. 정신적 손해를 회복하기 위한 위자료의 성질이나 기능 등에 비추어보면, 피해자에 대한 피고 기업의 채무는 급부자의 인적 요소에 중점을 두고 있는 채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가해자인 피고 기업은 불법행위 사실이나 확정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고, 피해자는 제3자의 변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의사를 밝히는 상황에서, 이해관계 없는 제3자가 억지로 피해자 앞으로 돈을 공탁하고 이로써 피해자가 위자료를 받은 것으로 보겠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거나 채권의 만족을 얻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라. 소결

정부안에 반대하는 피해자들은 정부안이 발표된 이후 재단과 피고 기업을 상대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가 담긴 내용증명을 보냈고, 그 내용증명이 재단과 피고 기업에 도달한 상황이다. 따라서 재단은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힌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채권에 관해서는 제3자 변제를 할 수 없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가 피고 기업에 대하여 가지는 손해배상채권(위자료청구권)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제3자가 변제했을 때에 변제로서의 효력이 없다고 볼 여지가 있다. 결국 피해자가 정부안을 반대하는 경우에는 재단의 제3자 변제가 유효하지 않고, 변제공탁을 하더라도 변제로서의 효력이 없다.

 

  1. 정부안의 한계와 피해자의 선택권 존중

정부안은 한일관계 회복을 위해 국내적 조치를 취하되, 일본측의 호응조치를 기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피고 기업으로부터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다는 언급이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사죄의 의사표시가 없었고, 배상도 없었다. 한국 정부가 국내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조치에 대한 피해자의 선택권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정부가 마련한 안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든지 피해자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선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의 피해자라도 정부안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강제집행 절차를 완전히 막을 수가 없고, 정부안으로 해결하려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나 재단이 정부안에 반대하는 피해자를 상대로 일단 변제공탁을 하고, 그 공탁의 효력은 법정에서 판단 받아보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변제가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피해자를 크게 보호해야 할 한국 정부가 오히려 배상절차를 지연시키면서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