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부] 인정(人情)의 발견 – 민변 전북지부 오사카, 교토 인권기행 후기 –

2023-03-03 119

인정(人情)의 발견

– 민변 전북지부 오사카, 교토 인권기행 –

성장현

1. 먹고 살기 바쁜 변호사

하루, 하루 바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와 나눈 대화의 잔상은 머릿속에서 맴도는데, 누구와 언제 이 대화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밥을 먹거나, 운전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는 사건을 생각하고 있다.

퇴근하면 집에서는 어린 두 딸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인형놀이, 블록놀이, 그림 그리기를 하다 말고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거의 매번 숨는 장소는 정해져있다. 그래도 나는 짐짓 어디에 숨었는지 도저히 못 찾겠다는 듯이 여기, 저기 두리번거린다. 그리고는 어렵게 찾았다는 듯이 ‘찾았다. 까꿍’을 외친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민변 전북지부 단톡방에 일본 인권기행 안내 글이 올라왔다. 저번 10월에 제주도 인권기행 안내글이 올라왔을 때는, 아내에게 다녀와도 되는지 말도 꺼내지 못했다. 왠지 비겁하게 혼자 육아를 피해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별 기대 없이 아내에게 물었다.

‘민변에서 일본 인권기행을 간다는데, 다녀와도 돼?’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안 돼’라는 말과 함께 한바탕 ‘제 정신이냐, 애들은 누가 보고’라는 식의 핀잔을 들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응. 다녀 와’

아내의 짧은 허락에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진짜?’ ‘갔다 와도 돼?’

아내는 다시 대답했다.

‘돈 버느라고 힘들었으니까, 다녀와’

아내의 이 말에 나도 모르게 뭉클했다.

 

2. 일본으로의 출발

일본으로 떠나기 전 숙제가 주어졌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유영수, 이철 선생님과 거문도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김영희 선생님 관련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스파이’와 ‘다큐인사이트 간첩과 섬소녀’와 책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읽고 보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숙제를 안 하더니, 변호사가 돼서도 숙제 하는 게 쉽지 않다. 결국 평소 일본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 우토로 마을 등에 관한 기본 지식을 믿고 숙제를 하지 못 한 채 일본으로 떠났다.

이제 6살 난 큰 딸 우진이가 일본 여행가는 아빠를 너무나 부러워했다. 잠든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일본으로 떠나면서도 ‘아빠는 여행도 가고 좋겠다.’라는 큰딸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도 야근으로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새벽 3시경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민변 전북지부 변호사님들과 같이 인천공항 행 버스를 탔다.

 

3. 난생처음 일본 땅을 밟음

비행기가 이륙할 때면, 약간의 공포감을 느낀다. 아침 8시 비행기를 탔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비행기 자리에 앉아 마자 잠들어버렸다. 잠결에 비행기가 이륙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렸다. 비행기를 탈 때면, 약간의 공포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번 일본행 비행기에서는 피곤함 때문에 공포감을 느낄 여력도 없었다.

‘쿵’ 소리에 참에서 깼다. 비행기가 일본 간사이공항에 착륙하는 소리다. ‘쿵’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을 때는 비행기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줄 알았다. 맞다. 비행기 발통이 일본 간사이공항 땅과 부딪히며 낸 소리다.

그렇게 난생처음, 일본 땅을 밟았다.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행 버스를 탔다. 오사카를 한자로 ‘大阪(대판)’이라고 쓴 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마도 오사카 지방이 큰 평야로 이루어져 있겠거니 생각했다.

오사카 부는 혼슈 중앙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하면서 긴키 지방에서 제일 넓은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나라 현, 북동쪽으로는 교토 부, 북서쪽으로는 효고 현, 남쪽으로는 와카야마 현에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오사카 만을 바라보면서 세토나이카이를 통해 주고쿠, 시고쿠, 규슈와 연결되어 있으며, 예로부터 긴키 지방 수륙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면적은 일본의 도도부현 중 가장 협소하며, 인구는 도쿄 다음으로 많다. 행정상 부청이 소재하는 오사카 시를 비롯해 33시 9정 1촌으로 나뉜다.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8,824,394명, 면적은 1,905.14㎢에 이른다.1)

 

4. 츠루하시 역으로 이동

오사카역 한큐 호텔 앞에서 내려서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 식사를 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여서 피곤했는데, 식사를 하고나니 살 것 같았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인가보다.

지하철을 타고 츠루하시 역으로 이동했다. 일본말을 할 줄 모르니, 눈이 바빴다. 두 눈은 전동차 창밖으로 보이는 간판들의 한자를 읽기에 바빴다. 장수의 나라이어서 그럴까. 병원과 의원들의 간판이 많았고, 진료 시간까지 상세하게 안내하는 광고들이 눈에 띄었다.

츠루하시 국제시장 입구에서 시장과 코리아타운(조선인마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김현태 코리아NGO 사무국장

츠루하시 역에 도착하니, 오사카에서 활동하고 계신 김현태 코리아NGO 사무국장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큰 체구와 인상적인 머리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태 사무국장은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츠루하시’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했다. 백제에서 건너 온 장인들이 오사카 이쿠노 구 지역에 다리를 건설했는데, 그 다리에 학들이 날아와 앉아 있고는 해서 그 다음부터 그 다리를 ‘학 다리’라는 뜻의 ‘츠루하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오사카시의 개발로 낙후된 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진행되었고, 값싼 인건비의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동원되었으며, 이때부터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의 세계2차 대전 패전 이후에도, 강제연행 등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조선인 마을(코리아타운)이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2)  

 

5. 조선인(한인) 마을과 민족학교

국제시장 이곳, 저곳에 친숙한 음식들이 많이 있었다. 각종 김치들과 호떡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토마토 김치가 이색적이었다.

조용한 한인(조선인)마을을 둘러보는데, 문패에 한국식 이름과 일본식 이름이 병기돼 있는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아기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한 여자 아이가 흙바닥으로 된 운동장을 가로질러 도망가고, 또 다른 여자 아이가 뒤쫓아 달려간다. 뒤쫓는 아이가 달려가면서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거기 서’라고 말하는 듯하다. 앞에 달리던 아이가 섰다. 그러자 뒤쫓은 아이가 다부진 표정으로 나무라듯이 연신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 같은 이에게 ‘애들이 몇 살이냐’라고 물었다. 6살이란다. 집에 두고 온 두 딸이 생각난다. 그리고 어릴 적 내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흙먼지를 아랑곳 하지 않고 뛰놀던 시절…

선생님의 양해를 구하고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학교를 둘러보았다. 운동장에서 계시던 교장선생님께서 ‘한국에서 왔다’라는 한마디에 학생들 수업을 참관할 수 있게 허락하셨다. 긴키 지역 장기자랑 대회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교가를 부른다. ‘초라하지만 이것이 우리학교다’라는 가사가 들린다. 낡은 건물과 촌스러운 교복 그리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아이들의 목소리라서 그럴까. 아니면 일본 땅에서 우리말로 부르는 노래라서 그럴까. 낡은 건물이라서 그럴까. 그들의 모습, 그들의 노래가 재일동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울컥했다.

이 학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서 문을 닫고, 인근 조선인학교와 통폐합 할 계획이라고 한다.

칠판 위로 ‘인정, 판단, 말법’이라는 세 글자가 보인다. 인정(人情) 있고, 올바른 판단을 하며, 예의 바르게 말하는 사람. 그것이 위 학급의 급훈인 듯하다.

 

6. 재일동포 변호사들과의 저녁 식사

저녁에는 오사카에서 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님들과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테이블로 4~5명이 한조가 되어서 식사를 진행했다. 우리 조에는 다행히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박민수변호사님의 따님이 동석해서 식사 내내 열심히 통역을 했다. 동석했던 재일교포 변호사님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 일본인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라고 한다.

‘변호사님은 전문이 뭐에요?’

교포 변호사님이 서툰 한국어로 내게 물어본다. 순간 당황했다.

‘돈 되는 것은 다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순간 모두들 웃음이 터졌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식사와 함께 마시는 술이 들어갈수록 분위기도 익어갔다.

대화 내내 겸손과 배려를 잊지 않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7. 교토 우토로 평화기념관

이튿날 아침 비가 왔다. 교토 우토로 마을로 떠나기 위해 호텔 로비에 모였다. 다들 새벽부터 이동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우산을 챙겨들고 교토 행 전차를 탔다. 우토로 마을 인근 역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했다. 일본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랜 세월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더욱 조용한 도시라고 한다. 아직도 오사카 사람들을 ‘상(商)놈’이라고 깔보는 교토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그 분위기를 짐작할만하다.

MBC 무한도전 등 방송에서 방영된 이후로 우토로 마을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김현태 사무국장은 한국관광객들이 이동하면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우토로 마을 인근 시민들 마음에 ‘시끄러운 조센징’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을까 걱정했다. 우리도 되도록 대화를 자제하고 조용히 이동했다. 하지만, 이방인이라서 그럴까. 누군가 우리를 봐도 금방 ‘한국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리는 작아도 걷는 모습이 다르다. 길가에서 마주친 어린 일본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조용히 걸어가는 모습이 왠지 ‘어린이’ 같지 않았다.

우토로 평화기념관에서 바라보는 자위대 공병 부대의 모습

2차 대전 당시 우토로 마을 옆 비행장에서 강제 연행돼 일하던 조선인들이 해방 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그 비행장은 현재 일본 자위대 공병 부대가 들어서 있다고 한다.

우토로 평화기념관에는 우토로 마을에서 살던, 재일동포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영상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실 적 마을 공동체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토로 평화기념관에서 자원봉사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험난하고 참혹했던 큰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은 양심의 소리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양심의 소리들이 큰 강물이 되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토로 마을로 이동했다. 그곳엔 재일조선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일본 청년이 불 질러 타나 남은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청년은 재판에서 범행 동기와 관련하여 ‘한국인에게 적대감이 있었다는 것엔 변함이 없고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라고 한다.

일본 법원은 ‘재일 조선인, 한국인이라는 특정 출신에 대한 편견과 혐오감에서 비롯한 독선적인 법행임을 인정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불안감을 조성한 범행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허용할 수 없다’라며 그 청년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8. 유영수, 김영희, 이철 선생님과의 만남

드디어 다큐멘터리와 책속에서 만났던 유영수, 김영희, 이철 선생님과의 저녁 식사자리로 이동하는 시간이다. 설렘이 있었다. 그 험한 세월을 몸소 겪어내고, 살아가시는 분들은 어떤 내면세계를 가지신 분들일지 궁금했다.

약속 장소를 모른채 길을 걷는데,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샘터다.’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내 뱉은 말이다. 신기했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샘터’의 오사카 지부인 줄 알았다. 아니다. 유영수, 김영희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이다.

음식 맛이 일품이다. 서울에 있는 어느 식당 보다도 맛있는 식당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일본에서 먹는 한국 음식이라서 그럴까. 모진 세월을 이겨내신 분이 만든 음식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술이 공짜라서 그럴까. 음식이 너무나 맛있고, 분위기도 맛있다.

간첩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한 고문과 억울한 장기간의 수형생활. 그 엄혹한 세월에 몸과 마음이 무너지신 분들도 계신다. 죄송스럽게도 감히 나를 돌아보면…

하지만, 유영수, 김영희, 이철 선생님은 웃고 계신다. 그리고 지난 세월의 고초와 심경을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 달, 한 달 숫자를 셈하며 일하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

9. 마치며

일본 인권기행을 하면서 나를 되돌아보고, 우리를 되돌아보았다. 재일조선인학교를 보면서, 한국 내 화교학교는 어떤지, 우토로 마을을 생각하면서 구룡마을은 어떤지,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얘기하면서 다문화가정과 이주 노동자 등 외국인에 대한 처우는 어떠한가.

말과 피부색이 다르다고, 인정(人情)이 다르겠는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겠는가. 예의범절이 없겠는가.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일진데, 남과 여를 나누고, 지역을 나누고, 세대를 나누고, 국가를 나누고, 인종을 나눌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나누어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편견 없고, 차별 없이, 다 같이 사람 같이, 가치 있게 사는 세상은…


1) 다음백과(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0873b) 참조.

2) 김현태 사무국장이 츠루하시의 조선인 마을에 대하여 설명했지만, 기억이 희미하여 고경일씨의 글, ‘왜 츠루하시에 모였을까요?’를 참고하였다. https://brunch.co.kr/@mangako7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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