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기고] 연극 ‘소년이 그랬다’ 리뷰 – 소년의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기

2022-05-26 88

연극 소년이 그랬다리뷰 소년의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기

-조덕상 회원

※ 이 글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 연극 ‘소년이 그랬다’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시는 독자 여러분은 주의해주세요.

 

 

2022년 4월, 민변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이하 ‘아동위’)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엄기호 선생님의 특별한 초대를 받았습니다. 컨텐츠문화학과 소속 대학생 배우들이 출연하는 ‘소년이 그랬다’ 연극을 직접 관람할 기회를 얻었지요. 청소년들이 우연히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연극이었고, 마침 엄기호 선생님과 연출자(김현지 님) 모두 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하셔서 아동위 안에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촉법소년’이라는 이슈가 아동사법의 모든 문제를 빨아들이는 지금의 상황에서 의미 있는 시도를 하는 학생들을 직접 가서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소년이 그랬다’ 라는 연극이 과연 어떤 작품인지를 미리 조사해보았습니다. 1996년 톰 라이코스와 스테포 난쑤가 호주에서 있었던 실화(도로 위에서 청소년들이 던진 돌에 트럭 운전자가 맞아 숨진 사건)를 바탕으로 제작한 연극 ‘The stones’가 2011년 한국 상황에 맞게 각색되어 만들어진 작품이 ‘소년이 그랬다’입니다. 이 연극은 2021년 국립극장에서 10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서는 2021년 이 작품을 지정희곡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1년에는 광주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생이 벽돌을 던졌다가 산책을 하던 피해자의 머리에 맞아 피해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6년에도 서울에서 비슷한 사건이 한 번 있었고요. 흔히 우리는 2015년 용인의 아파트에서 발생했던 벽돌 투척 사건을 촉법소년 논란이 크게 불거진 계기로 기억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촉법소년 문제가 왜 지금처럼 대두되지 않은 것일까요. ‘소년’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눈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살벌해진 것일까요.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이 문제를 계속 가슴에 품고 2022. 5. 14. 저를 포함한 아동위의 변호사 5명은 이천에 있는 학교의 공연장을 방문했습니다. 공연은 오후 2시에 시작했습니다. 2인조로 구성된 2개의 팀이 시간대를 달리 하여 번갈아가며 공연을 하는데, 제가 본 것은 이웅재(상식/정도 역할), 임지웅(민재/광재) 배우(2번 사진의 2번째 출연진)의 공연이었습니다.

 

연극에서 배우들은 1인 2역을 소화합니다. 객석과 무대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두 배우는 객석 가운데 앉아 있다가 무대로 나옵니다. 상식(15세)과 민재(13세)는 아파트에서 만나 ‘돼지’라는 별명의 친구에게 장난을 치고 도망가다 폭주족을 단속하는 2명의 경찰인 정도, 광재와 스쳐 지나갑니다. 상식과 민재는 재개발 구역에 있는 폐가(상식이 예전에 살던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이때 민재가 문제의 돌멩이들을 주워 나옵니다. 이후 이들은 육교로 올라가 ‘돼지’의 폭주족 무리들을 보며 돌을 던지는 위험한 장난을 시작하고 마지막에 민재가 던진 돌이 승용차를 맞춰 운전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연극 시작 전 계속 스타크래프트 1의 테마가 흘러나오길래 왜 그런가 싶었는데 이들이 돌을 던질 때 스타크래프트를 중계하는 놀이를 하더군요. 한때 스타 좀 하셨던 분들께는 깨알재미가 되었을 것 같고, 다른 관객들에게는 이 장면이 갖는 의미를 매우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상식과 민재의 캐릭터는 처음에 큰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정도와 광재는 느긋한 베테랑과 열정적인 신입 형사 콤비로 나오면서 극적 효과를 크게 보여줍니다. 위 사망 사건을 수사하게 된 정도와 광재는 소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큰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들의 모습은 꼭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주인공인 심은석 판사(김혜수)와 차태주 판사(김무열)의 조합을 연상케 합니다. 정도와 광재가 범인을 찾는 동안, 민재는 패닉 상태에서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아가고 광재는 PC방에 들어가 인터넷을 검색하다 민재가 ‘촉법소년’임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이 통화한 후 결국 견디지 못한 민재가 경찰에 자수하면서, 형사와 소년의 2개의 취조 장면이 극적으로 전개됩니다. 정도가 처음부터 민재를 범죄자 몰아붙이듯 추궁하다보면 어느새 광재는 차분한 말투로 상식에게 경위를 묻다가 정도의 질책을 받고는 상식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던 배우들도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극중 역할을 수시로 바꾸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했었는데, 이번 연극의 두 배우 모두 역할 변경을 큰 무리 없이 잘 소화했습니다. 10대 소년 2명의 불안한 마음을 쫓으며 두 배우는 상황에 따라 떨리고 일그러지는 표정과 가쁜 호흡, 무릎을 수없이 바닥에 찍는 것과 같은 격렬한 몸동작을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두 배우의 열연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감 있는 공연이었지요.

수사를 받으면서 상식과 민재의 계급적 간극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앞서 폐가 장면에서 짐작되는 분위기처럼 상식은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고, 민재는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부모님을 두고 있습니다. 조사를 받은 후 촉법소년인 민재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강제로 교회로 끌려가 기도를 하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구속영장 심사를 받게 된 상식은 일이 끝나고 늦게 찾아온 어머니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속으로 거친 말을 쏟아냅니다. 이후 이들이 재판을 받을 때 민재는 변호사를 선임해 부모님과 함께 법정에 서고, 상식은 어머니와 출석하는데 그런 모습만으로 두 사람의 ‘보호력’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상식의 어머니는 앞으로 일찍 퇴근해서 상식을 잘 돌보겠다고 판사 앞에서 다짐하지만 상식은 ‘하나마나한 약속’이라고 읊조립니다. 결국 그 결과에 비해 다소 가벼운 처분을 받고 둘은 얼싸안으며 좋아합니다. 보호력에 따른 처분의 차이도 발생하고요. 하지만 법정을 나온 후 피해자의 유족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다시 악몽 같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도, 두 사람의 관계도 회복되지 못한 채 연극은 끝이 납니다.

‘촉법소년을 처벌해야 하는가’, ‘소년을 엄벌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이 연극에서 큰 핵심이 아닙니다. 정도와 광재가 같이 짜장면을 먹으려다 그 문제를 놓고 대치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면 ‘우리 사회는 소년들에게 무엇을 주지 않고 있는가’가 아닐까 합니다. 작품 속에서 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보호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고, 소년들의 고통과 감정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육교 위에서 돌을 던질 때까지 그걸 막아줄 수 있는 동료도, 어른도 없었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뒤에 소년들은 언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사회적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수사 절차에서 소년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거나 소년들의 진술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고, 법정 소환장은 소년들이 알기 힘든 언어로 쓰여 있었고, 법정에서도 소년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거의 정해진 대답만을 해야 할 뿐이었으며, 보호처분을 받고 나서 자신이 입은 상처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다시 살아가야 하는 소년들과 함께해주는 사람들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별 이유 없이 어슬렁거렸고, 심심하면 이유를 만들어 뛰기도 했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라고 했던 소년들은 연극이 끝날 때 ‘이제 우린 더 이상 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더 빨리 뛸 이유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힘없이 고백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꼭 그 사건 때문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연극이 끝난 후 엄기호 선생님의 주선으로 저희 아동위 위원들을 포함한 관람객들과 연출자, 배우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공연 일정 등으로 시간이 조금 부족한 게 아쉬웠습니다. 대화한 내용을 녹취하거나 자세히 기록해두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되는군요.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연출자는 이 연극을 통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쉽게 악마화되고 있는 소년들을 관객들이 다른 눈으로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보호처분을 받고 구금을 면한 소년들이 얼싸안고 좋아하는 장면에서도 이들을 무책임하다고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배우들과 관객들의 이야기에서는 두 주인공의 계급적 간극이 드러나고 극 중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대비 구도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엄기호 선생님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자신에게 만만한 존재들에게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자들은 그들이 이 사회의 핵심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이유를 붙인다는 진단을 들려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소년들은 시민들의 평온한 삶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들처럼 그려지지만, 그동안의 통계 자료는 소년들의 범죄율이 성인과 비교할 때 높지 않을뿐더러, 소년들의 범죄가 갈수록 흉포화되고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 또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일부 소년들의 잔혹한 범죄 기사가 한 번 뜰 때마다 불길 같이 일어나는 촉법소년 연령 하향, 소년법 폐지, 소년 엄벌과 같은 반응들 때문에 소년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의견을 사회에 말하기 어렵고, 소년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지원들이 줄어들거나 더 확대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소년에 대한 형사처벌이 소년에 대한 강력한 낙인 효과를 가져오고 더 심각한 범죄에 물들게 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소년의 재사회화를 가로막고 재범률을 높이는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소년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들이 소년을 위협하는 것일까요.

엄기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소년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현상의 뿌리에는 뭐가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지만, 제 손에는 거칠게 ‘능력주의’의 환영이 잡히는 듯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평등하게 누려야 할 인권을 ‘특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성들이, 장애인들이, 성소수자들이 다양한 현장에서 생존과 존엄을 외칠 때, ‘부당한 특혜를 요구하지 말라’, ‘–라는 게 벼슬이냐’ 같은 반응을 심심치 않게 접합니다. 마치 권리를 누리고 싶다면 무슨 자격을 갖추고 오라는 듯, 능력만큼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이들의 눈에 ‘소년’이란, 능력은 고사하고 사회를 좀먹는 존재일 텐데 그러면서도 어리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특혜를 누린다고 하니 이렇게 불공정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인권보다 능력, 자격이 먼저인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년은 한없이 만만해 보이면서도 아주 눈에 잘 띄게 능력주의의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이출입금지매장(노키즈존)이 당연하다는 말, ‘청소년들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요구한다’는 말, 한편 ‘-린이’ 라는 말은 쓰면 좀 어떠냐는 말… 아동인권 활동을 하면서 숱하게 들어왔던 이 말들을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생각하다 ‘능력주의’라는 틀까지 흘러가게 되었군요. 좀 더 정치한 분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번 연극을 ‘소년심판’과 비교하면서 보았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이 드라마는 정작 아동위 안에서는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판사가 수사를 한다든지 하는 비현실적인 설정 같은 문제는 접어두고, ‘소년심판’에서 그리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은 대체로 매우 일면적이고 전형적입니다. 촉법소년을 비롯한 소년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균형 있게 다룬다는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다소 무색할 만큼, ‘소년심판’의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촉법소년들은 한국 사회가 촉법소년에 대해 갖고 있는 왜곡된 편견(잔혹하고, 무책임하고, 영악하고, 법을 악용하고, 반성하지 않는 존재들)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중간에 등장하는 쉼터에서 반항하다 도망쳐나와 성매매까지 시도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도, 그들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 나오기는 하지만 쉼터를 헌신적으로 운영하는 이들과 대비되면서 영악하고 무책임한 소년들이라는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현실 속의 쉼터와 같은 시설에서 청소년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인권 침해와 같은 요소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지요.

‘소년심판’이라는 화제의 드라마가 나름 유의미한 시도를 한 측면이 있지만 위와 같은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게 된 것은, 청소년 페미니스트 활동가 최유경 님이 지적한 것처럼 “어른의 시선에서 소년범을 조망하고 이해시키는 것 이상의 시도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년심판’을 호평하는 컨텐츠의 상당수가 소위 ‘참교육’으로 불리는 소년에 대한 어른들의 응징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건 단순히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소년을 가엾이 여기는 어른들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소년들 스스로가 말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출연진들과의 대화에서 저는 ‘소년심판’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소년이 처한 현실을 소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이번 연극의 시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소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모습들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가 소년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좋은 창작물들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덧붙였고요.

유튜브에서 ‘소년이 그랬다’를 검색하면 고등학생 배우들이 연기한 작품의 전체 영상을 보실 수 있고, 국립극단에서 공연했던 배우들의 소소한 이야기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소년심판’을 인상적으로 보신 분들이라면, 이 작품도 꼭 같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공연을 준비해준 학생들과 엄기호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아동위에서는 소년의 인권 문제를 꾸준히 살펴보고 소년들에게 필요한 법과 제도는 무엇인지를 고민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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