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낙태죄를 사실상 부활시키는 정부 입법안 즉시 철회하라
1. 헌법재판소의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20. 10. 7. 법무부는 형법 개정법률안을,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개정법률안을 각각 입법예고했다(이하 두 개정안을 합하여 ‘정부안’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부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부활시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건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법안이므로 즉시 철회해야 한다.
2. 정부안은 기존 낙태죄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예외적 허용 요건을 형법 제270조의2로 신설하는 안이다. 개정안에 의하면 형법 제269조의 낙태죄 조항은 문언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형법 체계상 임신중지는 원칙적으로 불법이고, 위법성조각사유가 인정되어야만 범죄가 되지 아니한다. 즉, 임신 14주까지는 여성 요청이 있으면 허용하고, 이후 24주까지는 성범죄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친족간 임신,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여성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임신중지를 허용한다. 이때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여성은 상담을 받고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야만 한다. 이에 더하여 모자보건법에는 임신중지시술에 대한 의사의 진료 거부권을 명시하고, 미성년자의 경우 동의 요건을 규정했다.
3. 우선 정부안은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에 반한다. 헌법재판소는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태아의 안위와 깊은 관계가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 임신한 여성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임신 출산으로 인한 모든 불이익은 여성이 감당하게 하고, 낙태한 여성을 형사처벌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생명을 보호한다고 자위했던 위선의 시대를 끝내라는 언명이었다. 2019. 4.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1년 반 동안 사실상 낙태죄는 폐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혹자들의 염려와 달리 무분별한 낙태가 횡행하거나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되는 징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낙태죄의 사실상 부활이 아니라, 헌법재판소 결정의 위 핵심 취지에 따라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권리보장적 법과 제도를 구축했어야 했다.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도 지난 8월, “개인의 존엄과 성평등에 기초하여 성과 재생산권∙건강권을 존중∙구현하고, 형사 처벌이 아니라 ‘평등∙건강∙안전∙행복하게 임신∙임신중단∙출산할 수 있는 권리 보장과 실질적인 생명 보호로 법∙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외면한 채 사실상 낙태죄를 부활시킨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사회적 고통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헌법재판소 결정의 핵심을 임신 주수에 따라 형사 처벌의 범위를 정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위선의 시대로의 회귀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여성의 자기결정권, 재생산건강권,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4. 법무부의 형법 개정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여전히 위헌 소지가 있다. 먼저 정부안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위배된다. 형사 처벌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임신 주수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는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초음파 검사를 하더라도 태아 크기 등에 비추어 임신 주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임부가 과연 임신 23주 5일째인지 24주 1일째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불명확한 기준을 내세워 임신중지한 여성을 형사 처벌하는 조항은 위헌적이다.
5. 24주 이후에는 사유 불문하고 임신중지한 여성을 형사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도 헌법상 기본권제한 원칙인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된다. 정부안에 따르면, 강간 피해자가 장애, 나이 등으로 인하여 임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24주 이후 임신 중지를 하면 처벌받는다. 수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24주를 넘긴 여성도 마찬가지다. 건강상 심각한 위험이 있더라도 임신중지가 금지된다. 여성은 임신을 지속하여 건강을 해치거나(더 나아가 사망하거나), 임신 중지를 하고 형사 처벌을 받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에 내몰린다. 여성을 기본권 주체로 보지 않는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6. 14주에서 24주 사이에는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만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것도 위헌적이다. 여성으로 하여금 강간으로 임신한 사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양육할 수 없는 사실 등을 설명하고 입증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과거 모자보건법 체제 상황을 돌아보면, 강간으로 임신한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임신중지 시기가 늦어져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를 한 사례들이 종종 발생한 바 있다.
7. 사회적, 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상담 및 24시간 숙려 의무를 둔 것도 임신중지 시기를 늦춰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임신중지에 관한 상담 및 정보제공을 중요시하지만, 정부가 이를 “의무 부과 없이” 제공하도록 권고한다. 의무로 부과되면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성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대한 숙고를 거쳐 임신중지를 결정하며, 이 조건들은 대부분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다. 전문가의 상담이 결정에 도움될 수도 있겠으나, 필요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게 일률적으로 상담 의무와 숙려 기간을 강제하는 것은 임신중지 시기를 늦춰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게 된다.
8.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의사의 임신중지시술 거부권을 명시한 것도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 정부안은 시술 거부 시 임신출산상담기관에 안내하도록 했을 뿐, 시술 가능한 의료기관에 연계할 의무는 규정하지 않았다. 여성은 임신중지시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전전해야 할 수 있다. 특히 의료기관이 드문 지역에서 의사 한 명의 거부는 여성의 임신중지 접근성을 현격하게 떨어뜨린다. 시술 거부권의 해악성은 2019년 아르헨티나의 한 사례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강간으로 인하여 임신한 11세 소녀는 임신 초기에 임신중지를 요청했으나, 동의 요건 제한과 의사의 거부로 인하여 시술이 지연됐고, 23주에 이르러 태아가 생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제왕절개수술을 받았다. 참고로 사회적 권리를 위한 유럽위원회(ECSR)는 “유럽 사회헌장은 의료 관련 직업을 가진 국민들에게 양심적 사유로 여성들에 대한 낙태시술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9. 미성년자의 경우 추가 동의 요건을 규정한 것도 문제다. 16세 이상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임신중지가 가능하지만, 본인의 서면동의 외에 상담사실확인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상담을 강제하는 것이다. 16세 미만의 경우에는 법정대리인의 부재나 학대상황인 경우에만 법정대리인 동의 없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학대상황을 “공적자료”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그 공적자료는 ‘아동학대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서류이므로, 임신중지 전에 아동보호전문기관이나 수사기관에 아동학대로 법정대리인을 신고할 것을 요한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가 안전한 임신중지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제3자 동의 요건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안은 미성년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움으로써 사생활을 침해하고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절차를 둔 것이다.
10. 정부안 입법예고까지의 절차가 소통 없이 진행되었던 점도 문제다. 임신중지 관련 입법에는 그 주체인 여성의 목소리와 경험이 적극 반영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안 도출 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와 경험을 반영하기 위한 어떠한 절차도 없었다.
11. 외국의 입법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건강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는 중이다. 캐나다는 1988년 낙태죄가 폐지되고, 임신중지가 정당한 의료행위로서 의료보험체계의 지원을 받지만, 그간의 임신중지율은 한국보다 낮았다. 캐나다는 미성년자도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할 능력만 있으면 추가 동의 없이 임신중지가 가능하다. 올해 9월, 프랑스 하원은 여성의 심리·사회적 고통에 따른 임신중지를 임신 기간 내내 허용하는 생명윤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2. 정부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건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라.
2020년 10월 7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