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신인모범회원, 광주전남지부 류리 변호사를 만나다

2020-07-14 103

류리 회원은 올해 민변 총회에서 신인모범회원을 받았다. 광주에서 활동 중이다. 두어 달 뒤면 아기가 태어난다고 한다. 그의 삶과 근황이 궁금하여 이번 뉴스레터 인터뷰 제안을 보냈다. 류하경 출판홍보팀장이 지난 7. 2. 광주로 가서 만나고 왔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성이 같아서, 아래에서는 ‘하경’, ‘리’로 표기한다)

 

하경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저랑은 전남대 로스쿨을 같이 다니셨죠?

리 : 네 먼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변호사시험은 4회 합격이에요.

 

하경 : 광주 코로나가 확산 중인데 좀 어떤가요?

리 : 그동안 잠잠하다가 지난 며칠 만에 확진자가 늘었네요. 코로나가 장기화될 것 같아 걱정이에요.

 

하경 : 자, 본격적인(?) 인터뷰를 해볼까요 ^^ 광주에서 쭉 사셨어요?

리 : 네. 대학만 서울에서 다니고 로스쿨은 다시 광주로 와서 그 이후 여기서 일을 하고 있지요. 87년에 광주 월산동에서 태어났어요.

 

하경 : 그렇군요. 광주 학창시절의 류리는 어땠나요?

리 : 반항심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에게 대들어서 가끔 맞았던 기억이 있고, 대학을 가기 싫어했어요. 대학 원서도 담임이 알아서 썼어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는데 저와는 달리 순응적이에요.

 

하경 : 대학을 안가고 뭘 하고 싶었어요?

리 :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대학에 가서도 영화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중고교 학창시절에 가출을 하거나 그런 식으로 반항한 것은 아니지만, 학교를 넘어서 사회에 관심이 많았어요. 당시 대구 지하철사건,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문제로 피랍된 김선일씨 사건 관련하여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었어요. 심지어 부모님에게 이라크에 좀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어요. 광주가 너무 좁다고 생각했어요. 벗어나고 싶었어요.

 

하경 : 대학 전공은 무엇으로?

리 : 정치외교학과에요.

하경 : 대학 때도 사회참여 활동을 했을 것 같네요?

리 : 학과 특성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따라다녔어요. ‘민중미학 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책 읽고, 세미나 하고, 술마시고, 집회 다니는 그런 활동들이죠. 마르크스 서적도 읽었어요.

 

하경 : 그 외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리 : 1학년때는 수업도 잘 안들어갔어요. F학점을 받고 학사경고가 날아오기도 했고요. 학교에서는 자녀를 잘 돌보라고 집에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동아리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활동하거나 술마시고 자유롭게 살았어요. 2학년때부터는 전공 공부를 시작했어요. 연애도 했고요. 영화동아리에서 영화도 만들었어요. 촬영, 특히 조명에 관심이 많아서 조명팀이었어요.

 

하경 : 영화쪽으로 갈 생각은 안했어요?

리 : 영화 말고는 다른 진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동아리가 아닌 실제 현장 일을 몇 번 해보고는 겁을 먹었어요. ‘내가 여성으로서 이런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지요. 그 후로 영화는 ‘나 혼자 좋아하기만’ 하기로 했어요. 그 때부터 속물이 된 것 같아요.

하경 : 그럼 취업 준비를 했나요?

리 : 취업을 너무 하기 싫었어요. 대기업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았고요. 유학을 간다고 준비하다가 그것도 능력이 안될 것 같아서 접었어요. 그러다가 대학 4학년 때 로스쿨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에 같은 과였던 남자친구가 저보고 로스쿨을 추천했어요. 그래서 남자친구와 로스쿨 입시 준비를 같이 했어요. 2010년에 남자친구는 로스쿨에 합격했는데 저는 낙방했어요. 한 번 만 더 해보고 안되면 취업하자는 마음으로 로스쿨 입학 준비를 다시 했고, 이수학점을 모두 채운 상태여서 시간이 생겨 2010년 3월부터 9월까지 숙명여대 입구 쪽에 있는 ‘난민인권센터’에서 무급으로 활동했어요. 그 해 다시 로스쿨 입학시험을 봐서 2011년부터 전남대 로스쿨로 가게 된거에요.

 

하경 : 언제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었나요?

리 :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적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로스쿨에 갈 때도요. 그냥 로스쿨에 가서 법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공부가 우선이고, 변호사 자격증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겼어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 공부를 하면서 법학 공부에 대한 갈망이 생겼어요. 참, 어릴 때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써오라고 하잖아요? 학부모 희망사항 기재하는 곳도 있었는데 거기에 엄마가 늘 ‘변호사’라고 썼던 기억은 나네요.

 

하경 : 그럼 뭘 하고 싶었나요?

리 : 영화 쪽 진로를 완전히 접은 이후에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하경 : 아 그래서 로스쿨 시험 떨어졌을 때 바로 ‘난민인권센터’에 갔군요?

리 : 전공(정치외교학) 수업 중 국제분야 관련 수업을 듣다가 난민문제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난민인권센터 활동하면서 난민 법률지원, 생활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난민분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어요.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겼어요. 쉽게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그들에게는 삶에 대한 원초적인 의지가 있었거든요. 단순히 그들이 난민으로서 처한 상황이 열악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고, ‘내게 어떤 기술이 생기면 사회에 더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어요.

 

하경 : 다시 광주로 내려간 이유는?

리 : 서울에서 6년을 살면서 서울살이가 힘들었어요. 외롭고, 날카로워졌어요. 전남대 로스쿨에 합격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고향에 돌아가게 된 것인데, 그렇게 되어서 내심 좋았어요.

 

하경 : 변호사시험 합격하고 바로 광주에서 일을 했나요?

리 : 네. ‘법무법인 바른길’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하경 : 민변 가입은 언제?

리 : 3년 반정도 후인 2018년 12월에 했어요.

하경 : 민변 가입 이유는요?

리 : 고등학교 다닐 때 뉴스에서 처음 민변을 접했어요. 그때는 ‘변호사들이 왜 저래?’, ‘뭐하는 사람들이지?’ 막연히 참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민변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스치듯 해본 적도 있어요. 로스쿨에서 ‘서로’라고 하는 법률봉사 동아리활동을 했어요. 저는 이주여성, 아동인권 관련 법률봉사활동을 했어요. 동기였던 정다은, 소병선, 박인동이 같이 했었는데 이들은 졸업하고 바로 민변에 가입했어요. 저도 바로 가입하고 싶었는데 처음 일을 했던 회사의 업무강도가 세서 여력이 나지 않았어요.

 

하경 : 민변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리 : 가입 후 처음으로 합류한 사건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추가소송 이었어요. 2018년 10월, 11월 피해자 측의 최종 승소확정이 되었음에도 일본의 전범기업들이 판결이행을 하지 않던 중에 추가 소송을 의뢰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500여명 정도가 문의를 주셨는데,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정도의 입증자료를 가지신 분들이 54분이셨어요. 이분들이 원고가 되어 2019. 4. 말경 1차 추가소송 소장을 제출했어요. 민변 광주전남지부장 김정희 변호사님과 이상갑 변호사님이 10여년 전부터 강제동원 사건을 담당해오셨는데, 추가소송을 함께할 후배 변호사들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제가 주축이 되고 싶다고 지원을 해서 간사역할을 했어요. 강제동원 사건 대리인단(12명)이 꾸려졌지요. 작년 4월말에 소제기를 했는데 아직 일본 측에 송달이 안 되고 있어요. 일본과 외교적으로 사이가 안 좋아진 이후 일본 외무성에서 강제동원 사건 관련 소송서류를 은 계속 반송하고 있어요.

2019년 4월, 광주전남지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해상 1차 추가소송을 제기했다. ⓒ연합뉴스

 

2020. 1. 중순경 2차 추가소송 소장을 제출했어요. 원고는 33명입니다. 강제동원사건은 생존자가 거의 없고 소송당사자가 거의 대부분 유족들이이에요. 소송 진행을 하며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점은, 유족들 입장에서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은 일이고 피해자 본인들은 끔찍한 기억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일본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일들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도 유족들이 마치 본인이 겪은 일처럼 똑같이 분노하고 있다는 거에요. 역사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응어리는 대를 이어서 영원히 계속 되는 거에요. 그 생생한 유족들의 감정이 인상적이었어요. 광주전남지부 20여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젊은 변호사들이 많아요. 자연스럽게 역사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추가소송,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등 활발한 활동을 한 류리 회원은 작년 민변 총회에서 신인모범회원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은 수상장면

 

하경 : 올해 하고 있는 활동은?

리 : 방송국 AD 퇴직금청구사건을 하고 있어요. 근로자성을 다투는 사건이 될 것 같아요. 노동사건이지요. 직장내 성범죄 사건지원도 하고 있고요. 이 사건은 성범죄 피해자가 이 일로 인해 부당하게 해고까지 당한 사건이에요.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혐오표현 대응 사건도 맡고 있고요.

하경 : 여러 장르의 일을 하고 있네요?

리 : 네, 민변 변호사가 필요한 일이라면 열심히 해야죠.

 

하경 : 민변 광주전남지부의 활동상황은 어떤가요?

리 : 민변 광주전남지부 회원은 60명 정도에요. 남편은 민변이 아닌데 한번씩 물어봐요. ‘너네는 왜 그렇게 자주 만나? 만나서 뭐해?’. 지부 회원들끼리 사적으로도 친하고 회원들 각자 참여의지가 높아요. 노동법연구회, 농업법연구회, 다름에 관한 연구회(원래 젠더법연구회였는데 확장됨) 등의 소모임이 있어요. 친목활동은 야유회, 번개 모임 등 필요할 때 자주 하고요. 이번에 김정희 지부장님이 새롭게 만든 “공론화 위원회”가 있어요. 민변 회원들 내에서 사회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사회적 문제제기 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어요. 첫 주제가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 문제였어요. 복무중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강제로 전역처분당한 사건이지요. 이후로는 선거법개정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논의해보기도 했어요.

민변 광주전남지부는 2019년,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다.

 

하경 : 지부 회의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리 : 지부 정기 회의는 한 달에 한번 하고 있어요. 월례회의라고 하는데 그 전 주에 집행부 회의를 해요. 월례회때는 다 같이 모여서 진행 소송사건, 사회문제, 서로의 근황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요.

 

하경 : 올해 민변 새집행부가 꾸려졌는데요 혹시 요구하는 것이 있나요?

리 : 소통. 지부와 중앙간의 소통. 뉴스에서 민변 소속 누가 뭐를 하고 있다고 나오면 잘 알기가 어려워서 약간 소외되는 느낌이 있어요. 중앙 활동-지부 활동이 자주 공유가 되면 좋겠어요. 무엇보다도 사람 간에 사적인 친목 도모가 있으면 좋겠어요. 뉴스에 민변 변호사들의 활동이 나오면 지인들이 ‘너 저 사람 알아?’라고 물어보는데 대부분 서울 회원들이라 잘 몰라요. 다 알고 싶어요 ^^. 코로나 국면이라 한계는 있겠네요.

 

하경 : 민변 광주전남지부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리 :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할거에요. 신입회원을 많이 조직해야겠죠. 이번에 신입회원 7명이 들어왔어요. 신입회원 환영회도 따로 했어요.

※ 2019년 류리 회원의 글 참고 (“[광주전남지부] 신입회원이 전하는 민변 광주전남지부의 근황”)

 

하경 : 요즘 관심 있는 사건은?

리 : 아동청소년관련 문제에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기가 싫다고 하면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해야 해요. 광주전남지부 내에서 아동청소년관련 문제를 깊이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출생미신고 아동 사건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태어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부모가 있고, 그 아이는 분명 아동학대의 피해자인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가정법원에 ‘피해아동 보호명령신청’이라는 법적인 절차가 있는데 출생신고를 안 하면 부모가 아동학대(방임) 혐의로 형사사건으로 입건되고 아이는 피해자가 되는데, 이 때 아이를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적 절차 중 출생신고의 의사표시를 갈음하는 결정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요. 신청취지가 특이해요. 의사취지에 갈음하는 판결이 내려와요. 이 청구취지 작성과 입증이 참 어렵더라고요. 이 사건을 했던 계기는,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광주지방변호사회에 연락이 와서 제게 연결이 된 거에요. 이런 사건들을 민변 광주전남지부에서도 적극 결합해서 하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있는 젊은 회원들이 많으니까 진정성 있게 잘 수행할 수 있을 거에요. 아이들은 최약자인데 왜 법률지원이 잘 안될까? 돈이 없고 의사표시도 잘 안되니까 그래요. 관심 있는 변호사들이 함께 지속적으로 해당기관과 협업하여 1명이라도 덜, 1분이라도 빨리 상처받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하경 : 앞으로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은지?

리 : 끝까지 내 의뢰인을 믿어주는 변호사요.

첨부파일

연합뉴스사진.jpg

연합뉴스사진.jpg

main2.png

200523 총회_5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