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창립회원을 만나다 : 이경우 변호사 인터뷰

2019-06-14 122

본 인터뷰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설립 30주년 사업의 후속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창립회원 아카이브’ 사업을 위해 진행된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당사자의 동의를 얻고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작성합니다.


창립회원을 만나다 : 이경우 변호사 인터뷰

 

심재섭 출판소통팀장 (이하 심) : 인터뷰를 하면서 선배님들을 뵙는 것은 항상 설레고 한편 긴장도 됩니다. 민변이라는 모임이 변호사님껜 어떤 의미이신지 간단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경우 변호사 (이하 이) : 민변 변호사가 되어서 다행이지요. 그 전에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막연하게만 가졌던 상을 민변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사건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가면서 구체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2007년, 2008년까지는 회의도 잘 나가고 비교적 잘 참석했는데, 그 이후에는…(웃음)

제가 85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했으니 이제 34년 한 건데, 언제가 괜찮았나, 어느 순간이 의미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다 민변활동을 할 때에요. 얼마 전에 서초동에서 선배 그룹 변호사님들 모여 간담회를 한 적이 있어요.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시간에 모 변호사님이 내 생각과 굉장히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민변에서 열심히 활동할 때가 당시엔 힘들어도 돌이켜 보면 가장 보람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생각을 했어요. 민변활동하는 변호사님들은 대부분 그럴 것 같습니다.

 

심 :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인 83년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변호사님께서 꿈꾸신 법조인 상은 어떠셨는지요.

이 : 군에 있을 대 한승헌 변호사님의 수필집, ‘법과 인간의 항변’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승헌 변호사님을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어요. 저자가 검사 시적 겪은 경험들, 이후 변호사로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 사건을 변론해 오면서 겪은 사례들을 중심으로 엮은 수필이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대학생활 그리고 이후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9년도에 복학을 했습니다. 대학 아크로 폴리스에서는 연일 집회가 열렸고, 수시로 학내에 진입한 진압 경철과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학교 생활은 수업이 아닌 정치 이슈에 대한 토론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2학년에 접어들면서 도서관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의 운동에 대하여 심적으로 공감할 뿐, 학생운동에 직접 뛰어들지는 못했습니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대학 때가 아니라 70년대 초반 고교시절에 10월 유신, 민청학련 사건을 겪으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다닌 학교는 특별활동인 농촌 봉사반에서 매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20일 정도 농촌 봉사활동을 가곤하였습니다. 30여명 이상이 가므로, 가기 전 한 달 이상동안 대학에 진학한 선배들이 찾아와 오리엔테이션을 합니다. 당시 대학가는 연일 시국 관련 데모에 휩싸여 있었지요. 농촌 봉사활동 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찾아온 대학생 선배들로부터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고뇌, 역사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키워나갔던 것 같습니다.

 

 

심 : 연수원 수료 후 만 31세 나이에 변호사가 되셨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민변이 창립되었으니 당시로서는 ‘젊은 세대’에 속하셨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민변 설립에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 : 저는 1985년 2월에 바로 변호사를 시작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님 사무실이었어요. 당시 조영래 변호사님도 가까운 빌딩에 계셨고요.

박원순 변호사님이 조영래 변호사님과 함께 망원동 수재로 인한 손해배상 사건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수재사건이 뭐가 그리 대단한 건가 생각할 수 있지만, 수십 년만의 홍수로 저지대인 망원동 일대가 침수되어 주민들이 살 곳을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피해자가 한 둘이 아닐 것 아니에요. 몇 곳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 기록만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일을 했지요. 자연재해를 두고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었습니다. 기억하기로 서울시로부터 발주 받아 현대건설이 한강에 댐인지 공작물을 설치했는데, 이건 자연재해가 아니라 그 공작물의 설치 보존상의 하자로 인한 손해라는 논리를 조영래 변호사님이 제공하셨습니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을 추궁하는 법리는 그렇게 잡았다고 해도, 피해액을 어떻게 입증하냐는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수차례 감정을 해서 책임의 존재는 입증을 했고, 손해배상의 금액은 위자료 명목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종결된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집단적인 피해의 경우 손해액 인정이 어려울 경우 어떻게 다투어야 하는지도 공부를 했고, 국가가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가 사회적 책임, 국가 책임의 근거를 마련해 가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공익 소송이란 이런 것이구나 어렴풋하게 배워갔습니다.

그해 말쯤 대한변협에서 매해 발간하는 ‘인권보고서’의 집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배당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여하튼 사회적 기본권 분야를 써보라고 하니 쓰기로 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제가 알만한 시민단체는 다 찾아다녔어요. 많이 알려진 곳들 방문해 보고, 또 그곳에서 소개를 받아 환경단체 가보고 하는 식으로요. 나중에 집필 후에 읽어보니 내가 이런 것도 알고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인권 변론을 하는 여러 선배 변호사님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현석,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최영도, 이돈명, 박원순, 박성민, 이상수 변호사님 등 십여 분의 선배 변호사님들이 정법회라는 모임으로 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정법회 이름도 잘 몰랐는데, 유명하신 분들은 다 소속되어 계시더라고요.

저는 86년 쯤 남부지원 근처로 개업해서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그때 쯤 13,14,15기 들이 모여서 젊은 변호사 모임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청년 변호사회를 조직하는 데에 함께 했고, 이후 2년 뒤에 두 모임이 결합하면서 민변이 되었습니다.

 

심 : 민변 초기의 활동상은 어땠는지요. 회원이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면서 일을 추진해 왔는지, 여러 사건들에 어떻게 관여하고 역할을 맡아 왔는지 궁금합니다.

이 : 초기에는 50명 정도? 활동이 그렇게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었던 것 같진 않아요. 주로 종전부터 많이 해 오던 대학생, 노동자 관련 시국사건에 대한 변론이 많았습니다. 특히 국가보안법 등 변론에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안기부 접견 신청해서 몇 시간 기다리고 있다가 접견 못하고 그냥 돌아온 일도 있어요. 이후 접견 거부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내서 개선이 되긴 했지요.

2-3년 지나면서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변호사들이 2개 정도의 위원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노동위가 제일 먼저였나 싶은데, 실제로 당시 노사분규가 치열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사건이 폭주한 것이 노동위원회였습니다. 지하철 파업도 심했었고요. 관련 단체에서 지원요청이 많이 들어와서 여기저지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법제위에서도 활동을 했어요. 박찬운 변호사하고 같이 열심히 했습니다. 최초로 형사소송법 개폐에 간한 의견서를 담은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양한 법률에 대하여 의견서나 책자를 발행했는데,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심 : 변호사 섭외의 제안은 어떤 방식으로 접수가 되었던 것인가요. 민변에 이를 주관하는 컨트롤 타워가 있었습니까.

이 : 특별히 절차는 모르겠어요. 민변으로 전화가 오면, 소속 위원회 관계없이 시간 되는 변호사에게 연락을 하고, 변호사들은 배당을 받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시간에 쫓겨서 사건 처리가 부담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지금보다는 변호사 생활을 하기가 호락호락했어요. 시간적인 여유도 훨씬 많았어요. 사건을 하면서도 시간 없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고, 경험이 없어서 고민스럽긴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와 후배가 팀을 만들어서 일을 했습니다.

형사사건, 시국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형량은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형량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일반 형사 사건과는 좀 다르지요. 오히려 법정에서의 변호, 진술을 피고인이 주장을 펴는 기회로 이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피고인들의 요청도 구속, 석방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법정에서 절차에 따라 좀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이런 것이 아니라,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해서 반대 주장을 정확히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열정적으로 운동한 것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잡혀 온 사람도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는 빨리 석방되는 것이 본인에게도 유리할 것인데, 공동피고인으로 재판을 받다 보니 그런 분들 입장에서는 손해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심 : 원진레이온 사건을 담당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황화탄소로 인한 직업병 인정 여부를 놓고 몇 년의 투쟁 끝에 88년 산업재해 인정을 받고 이후 산안법 전면 개정의 성과도 얻어냈지요. 변호사님께서 노동 사건에 주력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이 : 박원순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일하고 2달 정도가 지났을 때 고향 선배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노동운동을 하시던 분인데, 나에게 소속된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에 대한 교육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사실 그때 저는 대학에서 개론강의 들은 것 말고 노동법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를 드리면서 난색을 표하자 ‘변호사니까 공부해서 교육을 시켜달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로서는 이상수 변호사님, 조영래 변호사님 말고 또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변호사님이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교육을 맡게 되었고, 교과서와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 노동조합의 성격과 의의,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다행히 조합원분들도 저더러 엉뚱한 소리한다는 말은 안하고, 잘 들어두셨습니다. 그게 첫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6.29 선언 이후 노조 활동이 크게 일어나면서 노동자들의 소모임이 많았습니다. 여러 모임에 가서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노동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무실이 문래동이다 보니 경인지역 노동자를 주로 만났습니다. 88년도에 문송면 군이 작업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직업병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 사회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공단 인근에 ‘노동상담소’ 또는 ‘OOO 대책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활동단체들이 있었고, 이들과 많은 연대를 했습니다.

88년도에 ‘노동과 건강 연구회’라는 산업보건활동 단체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산업안전보건법 해설’이라는 책자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해설서도 산안법에 관해서 우리나라 최초였던 것 같습니다. 해설서를 노동조합에 많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직업병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상담 활동을 진행하던 도중 구로상담소를 통해서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을 접했습니다. 원진레이온은 일본에서 쓰던 중고 설비를 들여와 인조견사를 생산하던 곳인데, 생산과정에서 다량의 이황화탄소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이황화탄소는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유해물질인데도, 당시로서는 이런 유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질병에 이환되어 면직을 당하고서도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산재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 사건은 직업병 이환자가 900명이 넘고, 사망자도 230명이 넘는 최악의 산재 사건입니다.

88년에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협의회가 구성되었고, 여기에 노동조합 등 노동단체 10여 곳이 참여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직업병 인정을 위한 투쟁 및 대책활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경에 산재 인정 및 작업환경 개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배상 기준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었고요. 올림픽을 치루는 것과 연관해서 국가로서도 조속히 합의를 해야 될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이후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 등이 설립된 것은 다 아실 거고요.

이런 소기의 성과를 보면 결국 운동이다, 운동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함께 연대하는 것이지요. 노동위원장 할 때도 보면 연대가 그렇게 많아요. 번거롭고 피곤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사건을 보면 연대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연대는 가장 효과적인 운동의 방식이에요. 법률가의 역할은 연대 과정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절차의 검토, 내용의 확인, 문서의 작성이 있었고, 연대에서 불가피하게 발생되는 연행 등 문제에의 대응, 법정에서의 변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도와 관행의 사회적 변혁에 이르기까지는 법률가의 임무가 막중합니다.

그 외에도 업무상 질병과 관련하여 과로사라는 개념을 처음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개인적으로 참 보람을 느끼는 일이에요. 1993년경 서강대에서 일본인 변호사, 의사, 활동가들을 초청하여 ‘노동자의 건강 보건에 대한 한일 공동 세미나’를 열었는데, 주된 내용은 과로사의 원인과 실태, 그리고 대책 마련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최초로 과로사와 관련된 유족급여의 신청과 승인 사례, 법원의 판결 등의 통계를 분석하여 보고하였습니다. 세미나 말미에 ‘과로사 상담 센터’ 사무실 개소를 선언했고, 10여 명의 변호사, 노무사들이 전국적인 상담을 실시했습니다. 이것이 언론의 조명을 받아 과로사라는 개념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심 : 지금 변호사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이 있으신지요.

이 : 노사 상생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부터 화두로 삼고 있어요.

이야기를 하자면, 개인적으로 입장을 선회한 경험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잘 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2007년경 이야기입니다.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렇고, 그때까지 항상 노동자의 편에서 모든 일을 해 왔습니다. 민변 노동위를 하면서 ‘사측 일은 하지 않는다’ 것은 회원들 모두의 묵시적 동의였지요. 그런데 법무법인을 유지하는 입장에서, 주된 고객인 사용자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주관을 고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을 3년 이상 하다가 그 즈음에 사무실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노사 사건에 대해 대등하게 수임하고 일을 하겠다고요. 제가 변호사를 처음 할 때하고 비교하면 2007년도의 노사관계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느냐, 사회세력으로서 노동조합의 지위가 작지 않으니만큼 산업 현장에서 노사가 서로 상생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선택으로 여기저기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에게 대놓고는 안 하시지만 많이들 그랬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역시 제가 감당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노사의 상생 패러다임 구축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이해를 해 주겠지 하는 생각을 자위적인 수단으로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현실을 고려한 선택에 대한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이후 계속 노사 상생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서울모델이란 것이 있어요. 서울시 산하 6개 투자기관의 노사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인데, 고건시장 시절에 만들어 졌습니다. 지하철 파업 때 만들어 졌으니 지금 꽤 오래 되었지요. 네덜란드 폴더모델이라고 있잖아요. 이 모델을 노사협력시스템의 전형이라고 보고 가져다가 만든 거지요. 당시 서울시가 투자한 6개 기관에서 생기는 노사문제는 지방노동위원회까지 가지 않고 서울 모델에서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서울 모델의 공익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모임을 만들었으면 잘 되어야 하잖아요. 형식적으로 위원회만 설치하여 두고 결과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이게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적어도 법원, 노동위의 태도보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가면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파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잖아요. 그 결과를 기준으로 조정안을 마련하다 보니 노동조합으로서도 상당 부분 수용을 해 주었습니다.

스웨덴에 가서 견학 비슷하게 가서 노총대표, 경총대표를 따로 만나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이, 말뿐인지 모르겠지만 서로에 대한 칭찬이 인상적이었어요. 상대방을 향하여 이번에 잘 이해해 주셔서 협상이 잘 되었다, 이번에 많이 양보해 주셔서 좋았다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또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에는 노사 합의가 잘 되는 원인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노동조합의 사용자에 대한, 사용자의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사용자는 경영정보를 거의 공개하고, 노동자를 백업하는 학계 등 전문가 집단의 역량이 대단해서, 서로 속이거나 정보를 숨기기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경영 정보의 공개와 경영, 회계에 대한 객관적 분석 능력, 안정적인 노사 관계의 토대가 이것이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뢰, 정보, 능력 등을 구비하면 좀 더 나은 노사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을까. 변호사 하면서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면 노동 전문이라고 하고 다니는데, 이거라도 해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심 : 민변 후배들, 민변이 아니더라도 변호사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 제가 변호사 처음 할 때하고는 환경이 많이 달라져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어쨌든 처한 환경에서 적응하고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인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들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무슨 이야기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인터뷰 도중 가장 긴, 유일한 침묵의 순간이 이때 있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 수습을 온 로스쿨생에게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2007년 턴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요. 현실에 적응을 하다 보면 생각을 두 번, 세 번 바꾸는 경우가 있을 것이고, 나중에 그것이 후회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먹은 바가 있다면 가능한 바꾸지 마라, 어려워도 극복을 한다고 생각을 해야지 바꾸지 마라,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나이브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열심히 하면 굶어 죽지는 않잖아요. 정말 그렇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전공분야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하겠고, 정말 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서 계속 노력하고 매진하면 방법은 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경험을 했고, 이런 것은 지금도 적용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왕도가 어디 있겠어요.

2007년 경에 요즘, 그러니까 당시의 변호사 사회에 대하여 글을 쓴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요즘 변호사는 제가 처음 변호사 할 때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지사적인 사고나 의식을 가지기 어렵고 여느 직업군과 비슷하게 경쟁구도 속에서 사회적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달려졌지요. 생존경쟁도 심해지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희들이 시국사건 할 때 시간은 많았습니다. 사건 처리하기에 급급하고, 다른 일 할 시간도 없어서 사회 전반에 대한 시각을 가질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굶어죽지 않으니 정말 열심히 해보시라는 말밖에 없겠습니다.

민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변이 가지는 위상은 창립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졌습니다. 예전에는 여러 시민단체 중 하나, 변호사들의 모임이니 전문성은 조금 담보되는 단체 정도의 의미였어요.

국가 정책에 상당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민변의 책임이 중요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는 국가, 사회의 정책에 대한 비판 기능이 중요했다면, 언제부터인지는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뱅크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변의 본령은 비판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민변의 구성원들이 정책 기획, 집행의 분야에 진출해 있긴 하지만, 여전히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 통제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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