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김창호 변호사

2018-01-31 115

꾸미기_김창호(메인)

 

 

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

– 일본 제1호 외국인변호사 故김경득 변호사의 장남 김창호 변호사를 만나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이야기 하나 : 재일한국인 청년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GO”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 한 대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린다. 이름이 스기하라인지 이정호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은 지겹게 그를 쫓아다닌다. 어느 날 일본인 여자 친구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다던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어제와 같은 그대로의 나일뿐인데 말이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야기 둘 : 사기사와 메구무의 소설 “진짜 여름”의 주인공 청년은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경찰만 보일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한국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일본인 애인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두 개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름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나만의 향기는 그대로일진데,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한국인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김경득. 안타깝게도 김경득 변호사님은 10여년전 돌아가셨지만 그의 아들 김창호 변호사가 민변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김창호2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 소개 먼저 부탁 드릴께요.

김창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 김창호입니다. 아버지로 하면 3세인데, 어머니는 한국분이시니까 정확히는 2.5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 변호사 일을 몇 년 하다가 유학을 다녀왔고,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어떤지, 예를 들면 ‘공감’에서 4년 전 인턴으로 1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게 돼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기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 2월에 한국에 왔어요.

이혜정 : 민변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창호 : 민변 가입은 작년 4월인가 5월에 한 것 같아요. 민변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을 2006년에 했거든요. 2007년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를 받고, 변호사 활동은 2008년부터 했으니 10년 정도 됐는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서 황필규 변호사님, 정미화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초대해 주신 분이 바로 정미화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리고 정미화 변호사님 부인이 저희 어머니와 대학 동창이었어요. 그런 관계로 민변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민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은 몰라서 작년 2월에 왔을 때 황필규 변호사님이 국제연대위원회에 초대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변에 여러 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정 : 민변 어느 위원회를 가봤나요. 민변 활동이 궁금하네요.

김창호 : 주로 나갔던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에요. 저는 일본 변호사라 그래도 국제적인 일은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참여했어요. 국제통상위도 그렇고요. 그런데 민변이 좋은 것은 민변에 있으면 한국의 모든 이슈를 조금씩 다 알게 되잖아요(웃음). 교육위나 언론위는 한번 정도 참여했어요. 민변에서 진행하는 기획이 재밌는게 많아서 여행도 여러 번 갔다 왔어요. 여러 외국 변호사 모시고 진행하는 것도 재밌고, 한국의 공익변호사를 알게 된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나 ‘동천’ 같은 공익전담 변호사가 일본에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과 대화해 보면, ‘사실 나도 민변회원이다. 그래서 민변활동 같이 하고 있다’ 하시는 분들 되게 많지 않나요? 민변 변호사들이 옛날부터 자기 일을 하면서 공익활동 하시는 분과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민변 노동위가 오사카와, 미군위는 오키나와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혜정 : 숱하게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아버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인 김경득 변호사님은 1949년 일본 와카야마에서 태어나 일본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일본 이름을 썼고, 한국 핏줄이란 게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한글 공부를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했다면서, 어린 시절에는 일본으로부터 냉대받고 경멸받는 한국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당시를 ‘민족에서 도망쳤던 때’였다고 고백하시면서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자를 꿈꾸셨다가 좌절돼 사법시험에 도전하셨다고요.

김창호 : 맞아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일반 상장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학교 취업 상담실을 찾아갔더니 직원이 노트를 가져와서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관리 장부였어요. 대학생 때까지 일본 이름을 썼었는데…그런 차별을 경험하고 나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밝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 옆에 있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초에 대만 사람이 대만 국적으로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국적을 바꿔야 해서 그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지금도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인종 차별 관련한 변호 활동을 하고 계세요. 70살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그분의 기사를 보고 사법시험을 시작하셨어요.

이혜정 :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일본은 사법시험에 붙어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와세다 대학 청소를 하면서 어렵게 사법시험에 붙었는데, 사법연수원 입소가 거부되자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청원서를 수차례 보내고 아사히신문에 기고문도 보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낸 청원서를 소개할께요.

 

“저는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법연수생에 채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관·검찰관과는 달리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진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성격을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현 변호사법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한 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사법연수생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길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법연수생 채용선발 결격 사유 제1호는 적어도 변호사가 되려는 외국인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이 저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일본국에 귀화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는 65만 동포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해결(귀화)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일본의 민주화에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존엄이 최대한도로 존중받는 사회체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은 다양하며, 개개인은 이질적이므로 소수자의 권리존중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인의 민족적 특성, 소수자로의 권리가 반드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해를 거듭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처럼 가장하는 것은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주위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하여 낭비한 노력의 바보스러움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지,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차별에 대처할 재일한인의 살아갈 방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통일을 빨리 실현해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의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존재를 통하여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한국인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최고재판소로부터 국적변경을 강요받고 있는 시점에서 경솔하게 귀화신청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제가 변호사로서 설 자리 그 자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제가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 차별해소에 관련할 수 있고, 귀화를 한 제가 어떻게 재일동포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원망스러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동포 자녀에 대하여, “한국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라”고 말해 봐도 이 말이 귀화한 인간의 말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요.

일본 사회의 한국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의 귀화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것입니다. 저처럼 자기 민족에게 등을 돌려온 인간이라도 지금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일본국으로의 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사법연수생 임용청원서”, 재일변호사 김경득 추모집 중에서)

 

– 김경득 변호사는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맞서 긴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일본 내 한국 국적 변호사 1호가 되었다. 1976. 12. 14.자 아사히 신문에 ‘변호사로 인정해 달라’고 투고한 글을 보자.

나 김경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연수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귀화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안의 한국을 거부했다. 조선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내가 한국 핏줄임을 알까 두려웠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희망하던 언론계 취직이 99.9%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렸다. 한국인임을 써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김창호 : 당시 주위에서 아버지를 말리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어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리고 변호사까지 됐는데 부모님 생활을 도와 주는게 맞지 않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신 것이고, 아버지뿐 아니라 대학 교수, 변호사 후배들이 외국국적자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성명도 내주었어요. 언론에서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1976년 합격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견서를 계속 내셨는데 다음 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 방침을 바뀌게 하셨던 거죠.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버님이 그렇게 힘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창호 변호사님처럼 그 길을 따르는 분들도 많이 계셨겠네요.

김창호 : 지금은 재일교포 변호사가 120명 정도 있어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가 그것이고요. 70-90년대만 해도 외국 국적자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따로 면접이 있어서 최고재판소 담당자와 따로 이야기해서 뭔가 하사하는 식이 되어서… 면접을 하긴 하지만 못 들어 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후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 할 수 있어요. 2000년도부터 일본도 로스쿨을 시작하면서 국적조항 자체를 삭제했어요. 지금은 주로 외국 국적 갖고 일본변호사 되신 분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변호사가 됐다는 분 몇몇 계시고요.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갖고 변호사 되신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좋은 쪽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어머님을 한국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김창호 변호사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창호 : 저는 와카야마에서 태어났어요. 제 여동생이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에서 태어나셨고, 저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한 의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고도 했는데.. 어머니쪽 부모님이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셨대요. 인터뷰 내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웃음)..,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해서 연애결혼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이 장남이고, 형제가 2남 2녀라고 들었는데, 모두 법조인인가요.

김창호 : 여동생 한명은 변호사 자격은 있는데 등록은 안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구요. 여동생 한명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아버지 추모집 낼 때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병으로 일찍 사망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법대, 로스쿨까지 갔는데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남동생은 그냥 일반 회사원으로 있습니다.

이혜정 : 몰랐어요..가족분들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3명이나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어요.

김창호 : 저희들이 문과 쪽이라서..어머니도 법대 출신이에요. 사실 이공계 갈 수 있는 머리가 있으면 아마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 시대와 달리 취직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 안에서 일본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문과로서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 중 변호사가 하나의 좋은 직업인 것 같아 사법시험을 봤어요. 대학교 때는 학자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에 합격해서 제가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혜정 :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불을 꺼도 또 키고 공부하고, 쟤가 저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요. 한국도 사법시험이 어렵지만 일본도 무지 어렵지 않나요.

김창호 : 저는 되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정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당시에는 매우 젊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취직 활동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국도 그렇지만 옛날 사시라고 하는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도 합격률이 2% 정도니까 운이 안 좋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만 써야 하고, 어머님이 일본말 쓰면 엄청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김창호 변호사님이 6살 때까지 일본어를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볼 책을 직접 빌려 오셨다고 하던데, 가정에서 아버님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창호 : 아버지는 한국어를 많이 강요하셨어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일본어도 필요한데, 당시에 유치원이나 학교 다닐 때 집이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서 조선학교가 주변에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 학교나 일본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계속 집에서 한국어를 쓰라고 하셔서 어릴 때는 그게 좀 싫기도 했어요. 집에서 아버지가 이야기 할 때는 한국어로 하는데, 저희가 대답할 때는 거의 일본어로 했어요. 그리고 빌려오신 책은 다 일본 책이었어요(웃음). 아마 한국어 책이 주변에 별로 없었고, 읽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앞선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듯이 재일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여름’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는 재일교포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직 한국의 풍습이나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깝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을 찾았고, 짧은 한국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그녀만의 소설가적 감성으로 표현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 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

김창호 변호사에게 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고민과 어떤 정체성을 느끼고 살아왔을까.

 

김창호 : 저의 아버지 경우에는 재일교포 2세로 전형적으로 일본 이름을 쓰다가 정체성을 의식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한국식 이름을 써왔고 어머니도 한국인이에요. 보통 재일교포 3세 정도가 되면 일본식 이름을 쓰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런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때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김’씨라는 성을 부를 때 아직도 약간 긴장하는 것은 있어요.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도 ‘김상’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요. 일본에 많이 없는 성이라서 꼭 차별적인 시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라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데, 일본 사회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노력과 능력이 있어도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많이 노력했어요. ‘창호’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발음하기 어려워요. 차무호. 김치양호. 이런 발음이 되니까.. 이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일본에서 ‘기미가요’를 불러야 해요. ‘기미가요’라는 노래 자체가 일본군의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라서 절대로 부르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기립해서 노래 부를 때 저만 혼자 앉아있었어요. 그 때 제가 일본의 소수파라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졸업장에도 일본에서 천황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쓰는데, ‘쇼와’나 지금은 ‘평성’을 쓰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교육위원장이랑 협상을 해서 제 졸업장만 매직으로 찍찍 그어서 양력으로 표기했어요. 그 당시 저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별로 안 좋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었어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일하시느라 무지 바쁘셨을텐데.. 교장이랑 협상도 다니셨네요.

김창호 : 바쁘셔서 운동회나 졸업식에도 거의 못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졸업장은 다 바꾸셨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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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정말 의미 있는 소송을 많이 하셨잖아요. 국민연금 청구소송,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 지문날인 거부소송, 일본 군속 장애연금지급 청구소송, 공무원관리직 수험자격 소송 등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재일한국인 인권옹호활동에 앞장섰잖아요. 일본은 외국인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나 봐요.

김창호 : 맞아요. 일본은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사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게 그 동안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장기간 있게 돼서 만들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지문찍기가 너무 싫어서 사진도 찍어 놓았어요. 일본에서 지문 날인은 재일교포가 싸웠던 하나의 이유로, 90년대 이후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이상호씨 재판에서 졌는데, 이후 없어졌어요. 재일교포들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니 재일교포들만 제외하고 다른 외국인들은 지문날인을 시행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 영주권인데, 어머니가 일본 들어올 때는 한번씩 지문날인을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재일교포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여러 소송을 하시긴 했어요.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이끌긴 했지만 소송 결과로 보면 많이 졌던 것 같아요. 지문날인 하나만 잘 된 것 같고, 국민연금은 졌어요. 1970년 말에 외국인도 연금에 가입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연금을 받으려면 25년 정도가 필요했어요.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면 45살 넘은 분들은 자동적으로 못 받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됐어요. 헌법 위반으로 제소했는데, 최고재판소에서 그것은 국가의 재량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위안부 소송도 하셨고, 옛날 재일교포 일본군의 군인이었던 분의 재판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졌어요. 주위에서 계속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계속 지는 소송만 하셨어요.

이혜정 : 한국에 1년 정도 머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창호 : 여러 가지 있어요. 작년에 계속 있었는데, 2016년 말부터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저는 2017년 2월에 와서 거의 막바지였어요. 탄핵 직전까지 매우 재밌었어요. 역사의 순간에 한국에 있었던거에요. 탄핵의 순간도 TV로 볼 수 있었고요. 시민단체 운동의 힘, 변화의 시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처음 대선투표는 4-5년전 미국 유학가 있을 때, 현지에서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판결이 났고, 이번에는 한국에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찍은 후보가 그 당시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 똑같이 찍어서 결국 당선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공익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들 만난 것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하나 고르기가 어려워요.

이혜정 : 곧 일본에 돌아가신다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김창호 : 이번 2월에 활동을 마치면 1년 정도 대만에서 NGO활동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도 그랬지만 한중일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에요. 인권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은 어느 정도 아는 분이 계시고 중국은 다른 관계를 갖거나 중국어를 배워보고 싶어요. 그게 끝나면 ‘공감’과 같은 공익법인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아는 변호사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익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공익로펌 모델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면, 아버지는 국내소송을 주로 해왔고, 많이 졌어요. 저는 국내소송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휴먼라이트와 함께 하는 것도 그렇고, 인권 NGO로서 민변 국제연대위도 그렇지만 제네바와 같은 곳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거죠. 제가 그런 활동을 유학기간 합쳐서 3-4년 정도 계속 해왔고, 민변에서 UPR을 진행하고 있듯이 일본도 UPR이 있어서 운동해왔어요. 국제적인 일을 하나의 업무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문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같은 차별이나 혐오 관련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제도 마쓰이 의원이 한국·조선 국적, 일본 귀화자 등 의원 이름 열거하면서 “몇 번이고 죽일 가치 있다”고 독설한바 있어요. 요즘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혐한’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일본 사회 내에서 혐한 분위기가 지난 몇 년 간 계속 강해지고 있어요. 언론을 통해 보수 세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유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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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민변 변호사들과 계속 교류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민변 상근변호사나 간사님들과 공익 분야에 대한 교류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재일교포 분야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이 해외에서 일으키는 인권 또는 노동문제도 다루고 싶어요. 예를 들면 유니클로라는 기업이 인기가 많은데, 중국이나 미얀마 공장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일보다는 국제 쪽 문제를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특히 인권활동하시는 분들이 국제적인 활동에 좀 약하고 시간 배분이 어려워요.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만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필요한 비판을 받게 돼요. 특히 역사문제로 가게 되면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일본사람과 같이 해야 사회적으로 진동하는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간단치 않아요. 오늘 민변에서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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