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성명]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 없이는 법원개혁도 없다.

2017-12-14 30

[성명]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 없이는
법원개혁도 없다

 

 

권력기관의 개혁은 국민의 준엄한 요구이며 때를 놓치면 성공할 수 없는 과제이다. 특히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그 역할이 막중하기에 법원 개혁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성조차도 없다. 지난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 하에서 법원이 관료화되고 인권 보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올 초 법원 내 특정 학회에 대한 탄압과 회유 사실이 드러나고 나아가 진상조사 과정에서 ‘행정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 있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사법 블랙리스트 의혹의 내용은 사법행정권한을 독점한 법원행정처가 법관들의 성향을 일일이 분류하고 관리하여 통제하여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로서 법원행정처에 집중된 사법행정권의 남용 실상과 함께 사법개혁의 절박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사법행정권의 남용은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고 결국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인권과 직접 맞닿아 있다. 따라서 사법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서는 법원에 대한 신뢰와 개혁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봄부터 전국 법원의 판사들이 법관회의를 열고 입을 모아 진실규명을 요구한 것은 판사들부터 그 심각성을 뼈저리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국 판사회의 대표들은 “충분한 자료를 확보·조사해 진실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진상조사위원장이 말한 ‘한 점 의혹 없이 이번 사태의 경위를 밝히는 것’이자 판사회의를 통한 법관들의 뜻”이라면서 법원행정처 컴퓨터 확보 등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은 실질적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부인하였다. 다행히도 지난 9월 25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재조사를 중요 과제로 약속하였고, 11월 15일 사법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구성될 때 우리는 큰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법원을 통해 아무런 조사 내용을 듣지 못하고 있다. 조사위가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사용한 컴퓨터 3대의 하드디스크를 복제하고 임종헌 전 차장의 저장매체를 보존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조사위는 여전히 블랙리스트의 실체에 접근할 추가 조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언론은 당사자 동의 없는 컴퓨터의 열람은 영장주의에 위반된다거나 비밀침해죄에 해당한다면서 마치 조사위의 컴퓨터 조사가 불법·월권행위인 것처럼 몰아가며 발목을 잡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법’을 내세워 진실규명을 방해하려 한다. 세월호 참사 때에도 국정농단 때에도 우리는 이를 보았다.

당사자 동의 없는 컴퓨터 조사가 위법하다는 주장은 법리적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해당 컴퓨터를 사용하던 전직 심의관 등이 현재도 해당 컴퓨터에 대한 소유, 소지 또는 보관자(형사소송법 제106조)이며 정보주체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법원행정처 컴퓨터는 행정처 심의관 등 담당자가 공무상 사용하는 것으로서 공용컴퓨터에 해당한다. 법관들은 매년 인사이동이 있는바, 행정처 심의관 등도 행정처 근무를 마치면 그와 동시에 컴퓨터를 후임자에게 넘겨주고 이로써 해당 컴퓨터 및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에 대한 접근 및 관리권한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대한 소유, 보관 및 저장된 정보에 대한 관리자는 전직 심의관이 아니라 현재의 행정처 담당자이거나 현재의 사용자가 없다면 법원 스스로가 관리자가 될 뿐이다. 전직 심의관 등은 ‘당사자’가 아니므로 동의를 할 주체도 아니다. 법원이 자신이 소유, 보관하는 컴퓨터를 조사하는데 지금은 아무 권한도 없는 전직 심의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열람이 비밀침해죄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법적 근거가 취약한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문제되는 조항은 “봉함 기타 비밀장치한 사람의 편지, 문서 또는 도화 또는 전자기록등 특수매체기록을 기술적 수단을 이용하여 그 내용을 알아낸 자”를 처벌하는 조항(형법 제316조 제2항)인데, 법원행정처 공용 컴퓨터에 대한 소유 및 관리 권한은 대법원이 가지고 있으므로 대법원이 스스로 이를 조사하는 것을 ‘타인의 특수매체기록’의 개봉이라고 보기 어렵고 공용컴퓨터에서 작성된 문서는 공공기록물로서 ‘비밀’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불법행위 내지 법관 징계사유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 공적 사유로 진행되는 조사의 일환이므로 이는 위법성이 없거나 정당행위에 해당할 뿐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판례(대법원 2007도6243 판결 등)와 국내외 선례도 많이 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본질적 사안이 되기 어렵다. 조사위에서 조사 대상을 법관 성향 파악 등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자료, 국제인권법학회 행사 개입 등에 한정하여 조사함으로써 업무와 무관한 사적 문서에 대한 조사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조사된 내용 중 조사와 무관한 사항은 공개하지 않도록 하면 될 뿐이다. 정작 보호되어야 할 인권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 독립성을 침해받았을지도 모르는 법관의 인권이다.

법원은 지금껏 어떠한 외부자의 참여도 허락하지 않고 법원 내부적으로만 개혁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혀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법원 만에 의한 조사와 개혁의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다. 검찰, 국정원, 경찰, 문체부, 교육부 등 수 많은 국가조직이 과감하게 외부에 문을 열어 잘못된 과거를 규명하고 개혁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른 기관은 내부 공무원의 컴퓨터와 업무문서를 이미 조사하고 있는데 법원의 컴퓨터만 그 예외에 해당할 이유도 없다.

법원이 사법개혁의 첫걸음이 될 내부 진실규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법원이 처한 현재 상황을 웅변한다. 지금 법원은 단지 컴퓨터를 조사할 수 있느냐는 법리적 문제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김명수 대법원장의 법원이 과연 스스로 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동력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중대한 시험대 위에 선 것이다. 법원이 행정처 컴퓨터에 대한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진실 규명이 물거품이 된다면, 이는 더 이상 법원 스스로는 변화와 개혁을 할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모임은 법원이 더 늦기 전에 사법 블랙리스트에 대한 실질적 조사를 진행하고 국민에게 열린 사법개혁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2017년 12월 1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 연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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