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건물, 아는 글자
11월 초지만 대만은 따뜻했다. 그러나 회색 일색의 건물에서 초겨울 느낌이 났다. 하지만 여행 둘째 날의 비는 장맛비같은 비. 확실히 이국의 날씨였다. 같은 아시아권이라 그런지 차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잠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스치는 건물 모양과 간판에서 한국이 아님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어를 거의 모르는 내가 글씨를 읽을 수 있었으니… 알고 보니 대만은 아직 간체자가 아니라 번체자를 써서였다. 일본의 한자가 동글동글 귀여운 느낌이라면, 대만의 한자는 우리 서예법의 정서체처럼 참으로 시원시원하고 멋졌다. 도포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랄까… 섬이지만 대륙의 풍모가 느껴졌다.
민변다운 여행
첫째 날과 셋째 날은 가장 ‘민변다운’ 여행이었다. 원래 의도했던 통일기행 혹은 인권답사였기 때문.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셋째 날 오전의 신베이시에 있는 ‘징메이 국가인권박물관’이다.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군사 법정으로 사용된 곳으로 대만 정부의 백색테러를 증명하는 공간이다. 우리의 공안정치와 비슷한 대만의 백색테러는 국민당 정권이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박해한 것을 통칭하는 것. 약 14만 여명이 군사법원에 기소됐고 3천∼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통일위 변호사님들 모두 놀란 것은 군사 법정 법대에 심판관(판사)과 나란히 군사검찰관(검사) 자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능히 당시의 엄혹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 타이페이 시내에 있는 ‘2·28 국가기념관’에 갔다. 2·28사건은 1947년 일제가 물러난 뒤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군대가 차별대우에 반발한 대만 원주민들의 시위와 파업을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약 3만 명이 실종,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제주 4·3항쟁, 광주 5·18항쟁을 안 떠올릴 수 없었다. 39년 계엄시기 동안 2·28사건은 대만 사회에서 금기대상이었으나, 1987년 계엄이 해제된 이후 비로소 진상규명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옆의 ‘국사관’(국가역사관에 해당)에서 총통(대통령)선거에 관한 전시를 보면서 대만 현대정치의 단편을 엿볼 수 있었다. 국사관 마지막에는 특이하게 대만 총통이 외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전시실이 있었는데, 그 외국들이 라틴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가 많았다. 알고 보니 이들은 20여명의 샤오펑유들(小朋友, 작은 친구들). 1971년 중국이 유엔에서 대표권을 얻고 대만이 퇴출되면서 다른 나라들이 단교할 때 지금까지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었던 것.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대만의 현재와 이를 극복하려는 대만의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 바로 이 전시실이었던 것이다.
통일기행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양안(兩岸)관계’의 일면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날 대만정치대학교 채종민 교수의 강의, 셋째 날 주립희 교수와의 뒷풀이 자리에서였다. 현재 양안관계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일개중국 각중각표(一個中國 各中各表)’. 이것은 국민당 마잉주 집권 이후 1992 컨센서스, ‘하나의 중국과 각기 다른 표현’을 의미하는데, 본토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은 중화민국이 각기 다른 중국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양안관계에서의 통일담론은 남북한의 통일담론과는 사뭇 달랐다. 대만에서는 통일 찬성 입장이 오랜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이고 대만 독립 입장은 ‘민진당’이라는 것. 자신을 대외적으로는 Chinese(중국인)라고 소개한다는 채종민 교수와 Tiwanese(대만인)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주립희 교수의 대비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셋째 날 오후 타이페이 율사공회(약칭 ‘북률’, 우리로 치면 서울지방변호사회) 사무실에서 통일기행단장 서중희 변호사님과 북률의 헌법위, 인권위 변호사님들이 각기 자신들의 과거사 청산 소송 경위를 발표하면서 양국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관광코스
둘째 날은 일명 ‘예스진지’(예류지, 스펀, 진과스, 지우펀)라는 한국인들이 잘 간다는 관광코스에 갔다. 예류지에서는 바람에 풍화된 바위의 모습을, 스펀에서는 드라마에서만 봤던 풍등을, 진과스에서는 바윗돌만한 황금덩어리를, 지우펀에서는 장맛비 속에도 관광하러 온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진과스(金瓜石)는 금광을 캐던 탄광으로 황금과 대비되는 그 시절 광부들의 중노동을 떠올려 보았고, 진과스에서 지우펀(九分)과 스펀(十分)까지 금을 실었던 협궤가 있어 옛 정취를 느껴보았다. 딘타이펑 본점이 있는 융캉제의 화려함과 대만 야시장 특유의 서민적인 분위기도 조금씩 맛보았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취두부! 양승봉 변호사님의 선도투쟁(?) 아래 다들 도전해 성공했지만, 나는 끝내 삼키지 못했다.
셋째 날 도조라는 술집에서는 북소리 공연에 전율이 일었고, 지한파 주립희 교수와의 대화도 즐거웠으나, 무엇보다 오랜만에 술집에서 다 같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 참 좋았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김정호의 ‘하얀나비’. 다행히 옆 테이블의 박수까지 받은 것으로 보아 민폐는 아니었다…
마지막 날은 통일기행의 대미를 장식한 ‘대만고궁박물관’ 방문. 베이징 고궁박물관에는 박물이 없고,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는 고궁이 없다는 말처럼 자금성이 아닌 현대식 건물에 중국의 진귀한 보물들이 정말 많았다. 취옥백채와 육형석은 역시나 인상깊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많은 전시물을 정성스럽게 찍으시던 천낙붕 변호사님이 더 인상에 남는다.
우리들의 이야기
둘째 날 기행단만의 술자리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서울과 달리 늦게까지 여는 술집을 찾을 수 없어 힘들게 찾아낸 술집은 생각보다 좋았다. 도무지 무슨 음식인지 알 수 없는 메뉴판을 갑골문자 해석하듯 해석하여 주문한 술안주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마침 술집 주인이 한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우리들 이야기 사이사이에 끼여 잠시나마 술로 대동단결하였다.
무엇보다 기행 중간의 개인적인 소감과 통일위에 대한 고민 등을 나누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민변 회원으로서의 적극적인 활동과 소통에 대한 고민은 내가 속한 노동위 뿐 아니라 통일위도 다르지 않았다. 채희준 위원장님의 고민도 술자리에서 조금은 나누어졌으리라.
모듬 안주 같았던 대만통일기행
내게 있어 이번 대만통일기행은 민변다운 여행과 관광, 친교를 두루 경험할 수 있었던 모듬 안주같은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통일위 회원이 아닌데 용기를 내어 신청한 나를 따뜻하게 환대해주신 통일위 변호사님들을 알게 되어 기뻤다.
여행 전 대만에 관한 책을 사놓고서도 공부한다는 느낌이 들어 읽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비행기와 공항버스에서는 어찌나 재밌던지… 나라도 사람도 직접 겪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더 알고 싶어진다.
백두산이 될지 아일랜드가 될지 모르는 내년 통일기행도 새로운 호기심 가득안고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