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회 어린이날 기념
“어린이의 인권을 참으로 존중하는 새 시대를 만들어주시오.”
민변 아동인권위원회
조덕상 변호사
어린이1) 동무들 모두 안녕들 하시오. 이야기꾼 방정환이올시다. 어린이 여러분과 함께 즐거워하고 웃고 울다가 검은 마차를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간 지 80년도 훌쩍 지났구려. 내가 여러분들을 ‘어린이’라고 부르고 어른들이 여러분께 존댓말을 쓰자는 운동도 하고 종내는 여러분을 위해 ‘어린이날’을 만든 게 자그마치 95년 전 일이라오. 혹자는 1923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아동권리선언문이 나온 것보다도, 1925년 국제 어린이날을 만든 것보다도 훨씬 앞서 어린이 인권 운동을 했다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데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내 나름 찾아보니 어린이날이 이제 법전에도 버젓이 들어가 있고2), 어른 여러분들이 그날만큼은 어린이 여러분에게 맛난 것도 재미난 것도 많이 해주는 그런 세상이 되었구려. 내가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족한 광경을 내려다보니 한편으로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동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여전히 아픕니다. 모든 어린이날이 참으로 각별하겠으나 올해 어린이날은 여러분에게도 제게도 유난히 각별한 것 같소. 올 봄에 흉포한 자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난 뒤에 바로 기분 좋게 찾아온 어린이날이기도 하고, 또 며칠 있으면 새로운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날도 찾아오고, 무엇보다 2014년 4월 16일 많은 어린이들을 내 있는 이곳으로 보냈던 그 세월호를 3년 만에 뭍으로 끌어올리고 나서 찾아온 어린이날이기도 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어린이 동무들에게 말을 먼저 걸었으나 실은 어른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온 것입니다. 며칠 뒤에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면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오겠지 하고 기대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이곳 하늘나라에서도 제발 그러기를 간절히 기대하지요. 그렇게 다가올 새 시대에는 참으로 어린이들의 인권도 어른들의 인권과 똑같이, 아니 더 두텁게 존중하여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하외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넘쳐 보여도, 우리 어린이들이 충분히 놀지 못하고,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여 얼마나 불행하게들 살고 있는지 여러분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구려.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제가 어린이 권리공약 3장을 낼 때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을 이야기했고, 첫 어린이날 행사에서도 어른들에게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주시오.’라고 말했던 것은 그만큼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건강하게 뛰어노는 게 지상 과제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위에서 둘러보니 놀이터라고 하는 곳은 많은데 거기서 놀고 있는 어린이 동무들은 잘 보이지 않더군요. 게다가 어딜 가도 그렇게 다 똑같이 생긴 미끄럼틀, 그네, 시소들만 보이는지 말입니다. 어른 여러분들은 어린이들이 놀이터에 나와 놀 시간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지만, 놀 시간이 있다고 해도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게다가 얼마 전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가꾸어 생태 놀이터를 만들어 놨더니 구청에서 허가받지 않은 불법 시설물이라며 새벽에 철거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지요. 그나마 다행히도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똑같지 않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뜻을 모아 적당하게 위험하고 아기자기하게 재밌는 놀이터를 만들고 가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더랍니다. 어른 여러분께 진정으로 당부합니다. 어린이들 놀이터는 그야말로 성지(聖地)라고 생각하시고 성지 하나하나를 보존한다는 마음으로 놀이터 대책을 준비해주세요. 그래야 신선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어른들이 흉포한 대통령을 몰아낼 때 적지 않은 어린이들이 거리로 나와 집회에 참석하고 어른들과 다를 바 없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지요.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18세 어린이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또 어린이들에게 판단 능력이 없다는 등 교육에 좋지 않다는 등 괴변을 늘어놓는 어른들은 여전하더군요. 결국 이번 대통령 선거는 넘기고 정치인 나리들이 다음 선거 때 다시 논의할 모양인데 과연 잘 실현될지 정말 걱정스럽구려. 우리 옆의 일본까지 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18세 어린이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있고, 이제 그 나이를 더 낮추려고 한참 연구를 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언제쯤에야 18세 투표권을 볼 수 있겠소. 어른 여러분. 어린이들은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결정을 제 스스로 내릴 권리를 하늘에게서 받고서 태어났다고 할 것이니, 여러분들만 누리고 있는 그 투표권을, 어린이들에게도 기꺼이 돌려주시오. 어린이들이 여러분과 함께 정치와 사회에 참여해서 만들어갈 세상은 당연히 지금보다 더 평화롭고 발랄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법에 대하여 잘은 모르나 ‘헌법’이라고 하는 나라의 으뜸법을 바꾸자고 하는 이야기가 여기서도 간간이 들립디다. 의원내각제니, 분권형 대통령제니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가고 있던데, 저는 헌법을 바꿀 거면 반드시 어린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넣어주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제가 그리 하였던 것처럼, 많은 세계의 어른들이 ‘아동권리협약’도 만들었고, 우리 어른들도 ‘어린이 헌장’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정작 헌법에는 ‘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라는 글귀밖에는 보이지 않더군요.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권리, 노동을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 학대받지 않을 권리,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할 권리, 그리고 나랏일을 할 때마다 어린이들의 권리를 먼저 생각하라는 경구도 헌법을 개정할 때 넣어준다면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어른 여러분, 헌법을 바꾸려거든 어린이들의 어린이들의 이런 이야기도 귀담아 듣고 헌법에 넣어주시길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그제나 이제나 어린이 동무들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면 한이 없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하나로 천지가 개벽할 것이라 기대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때보다 무거운 역사의 사명을 질 분이 오실 테니 그분과 그 주변 어른들에게 다시 한 번 말을 전합니다.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주시고,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를 하고 또 들어주시어 어린이의 인권을 누구나 참으로 존중하는 시대를 만들어 주시구려. 이제 다시 검정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소. 이 신선 같은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1) 본 기고에서 ‘어린이’라는 용어는 만 19세 청소년까지를 포함하는 ‘아동청소년’의 의미로 사용함.
2) 「아동복지법」 제6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