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법조인으로서의 삶]
안현영(이하 ‘안’) : 모르시는 회원분이 없으시겠지만,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연순(이하 ‘정’) : 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는 정연순입니다. 반갑습니다.
유소영(이하 ‘유’) : 저희와 같은 나이에는 어떤 학생이셨고, 어떤 꿈을 꾸셨는지 궁금해요.
정: 특별히 다를 것 없는 80년대 대학생이었는데요. 고등학교까지는 모범생이었다가 대학에 들어와서야 광주 항쟁이 뭔지 알게 되었고,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뒤의 대학생활도 그 또래의 경험과 비슷해요. 매일 최루탄 연기 맡으며 교문 들어가고, 학교를 떠올리면 최루탄 냄새와 그 교문도 같이 떠오르는.
유 : 사법시험은 어떻게 응시하게 되셨어요?
정 : 87년 민주화가 되고 나서 이듬해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없었거든요, 정신적 혼란기였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학점도 형편이 없어서 시험이라도 봐야 겠다, 이랬어요.
안 : 보통은 학점이 안 나왔다고 해서 사시 보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웃음)
정: 그때가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기라 취직이 잘되었다고 하지만, 여성에게는 꼭 그렇지는 않은, 다른 문제였어요. 막상 졸업을 앞두고 취업하려고 보니 막막했어요. 해 놓은 건 없고… 그래서 일단 시험을 보자 이랬는데, 여성합격자가 많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네가 되겠느냐 걱정 많이 하셨죠. 1차라도 합격하면 다행이라고. 일단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 2년 안에 합격하지 않으면 두말 않고 취직해서 돈 벌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대학원 등록금도 아르바이트로 벌구요. 다행히 학위과정 끝나기 전에 합격해서 다 마칠 수 있었죠.
안 : 석사과정과 시험을 같이 마치시다니, 너무 쉽게 얘기하시네요(일동 웃음)
정 : 아… 그게.. 역시 학점은 안 좋아요… 다만 뭐랄까요, 집중력이 좋다 할까요, 평소에는 느긋해 하다가 시험처럼 통과해야 하는 걸 목표로 설정하고 이걸 해 내야겠다 한번 마음먹고 나면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안 : 어떤 법조인이 되야 겠다 생각하셨나요?
정 : 처음 일했던 곳이 법무법인 덕수였는데, 그 선배님들이 너무 멋져 보여서 그분들을 닮은 변호사가 되겠다 했죠. 그러다 보니 민변 가입도 필수였고.
안 : 경력을 보면 미주리 주립대 유학이 있는데요,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정: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라고, 대안적 분쟁해결절차를 공부했어요. 2003년이었는데, 변호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게 되면 많이 지쳐요. 승패로만 이루어진 판결을 받는 과정에 회의가 들게 되죠. 안식년을 갖게 되었는데 그 무렵 부안 방폐장 사건 등 사회적 갈등이 계속 커지고 있었거든요.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방법이나 절차 이런 것을 공부해보고 싶었죠. 미주리 주립대에 석사과정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입학에 필요한 대학 학점과 영어 점수 미달이라.. 진짜 고생했고, 은사님인 안경환 교수님이 정말 두툼한 추천서를 쓰셔야 했어요. 이 친구가 학점이 낮은 것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 기인했다고, 그 상황을 설명해 주시느라(일동 웃음).. 수업 중에 인성을 훈련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모두가 눈감고 명상하는데, 영어로 명상을 하니까 그냥 눈뜨고 들어도 졸린데 정말 주체 못하게 졸면서 헤드뱅잉을 했던 기억이..(웃음).. 그런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전공을 못살려서 좀 아쉽죠.
김주환(이하 ‘김’) :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도 하셨어요.
정 : 80년대까지는 격동의 시대라, 사실 차별문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90년대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에서도 그런 이슈들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005년 하반기에 차별시정본부를 설치하게 되는데요, 사실 그때까지 저도 변호사로서 주로 구금, 고문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차별시정본부가 설립되고 나서 본부장이 필요하다고 하여, 여성으로서 가졌던 소수자 의식을 가지고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원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정말 많은 과제들이 있었더군요. 제가 재직 중에 연령차별금지법, 장애인 차별 금지법, 장애인권리협약 제정등 많은 진전이 있었죠. 비록 통과는 못 되었지만 차별금지법안도 만들어졌고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저야말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어요.
안 : 변호사를 하다 보면, 해도 안되는 것 같을 때가 많고 거대한 세력에 좀 무력감을 많이 느끼셨을 것 같아요. 그건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정 : 어떤 사람과 같이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고영구 전임 회장님 인터뷰를 했는데, ‘민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 드렸어요. 그랬더니 ‘고향’이란 생각이 든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의 고향이죠. 변호사 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이 민변이었기에, 민변을 생각하면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 둘 다 떠오른대요. 저도 그래요.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이건 최소한의 합리적인 요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법원에 검찰에 많이 실망하지만, 우리끼리 모여서 욕도 좀 해가며 뭐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우리 다 같이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 데서 위안을 받는 거죠.
[그녀, 그리고 민변]
안 : 민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요?
정 : 그런 의미에서 여성위원회를 만든 일이죠. 1999년, 선후배와 함께 여성위원회를 함께 만들었는데요, 이제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일생을 살면서 가장 좋은 동료이고 위안이 되는 사람들이 된 거죠.
안 : 회장직에 출마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 : 제가 총장시절부터 중장기적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민변의 장래에 대한 모색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번에도 조직발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요, 회원 1,000명 시대에서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재화 변호사님도 잘 하시겠지만 제가 민변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출마하게 되었어요.
안 : 선거운동 중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요?
정 : 음… 선거운동 기간이 너무 길었어요.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통령 선거보다 더 기니까요, 아주 힘들었다기보다는 다른 일을 거의 못하게 되는 게 문제였어요.
안 : 당선될 수 있었던 자신만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 : 흔히들 선거의 핵심 요소는 조직·정책·인물이라고 하는데, 조직이나 정책이나 다 비슷했기에 그 차이는 뭐였지 이러다 보니 결론이 결국 인물인가?(모두 웃음) 농담이구요. 이재화 후보님도 인품이나 능력 다 훌륭하셨지만, 아무래도 사무총장을 지낸 경험이, 민변의 역사나 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이 제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재(이하 ‘이’): 최초의 경선에서 당선된 회장이라는 게 상징하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정: 추대방식이었다가 선거 방식 도입된 게 10여 년 전인데요, 추대 혹은 단독출마에 따른 찬반투표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서로가 잘 알았던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는 추대가 훨씬 더 민주적이었죠. 이제는 민변의 장래를 두고 각자의 포부와 각자의 전망을 가진 후보들이 복수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이고, 이번 경선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질적인 수준에서도 민변의 활동이 굉장히 다양해졌어요. 시국사건 변론, 양심수 변론 등과 같은 사건에 주안점을 두고 출범했지만, 이제는 민생경제, 장애인, 성소수자, 아동, 디지털 정보 인권까지 나오니까. 다양한 활동만큼 민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우리 회원들이 과연 어디까지를 공유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수도 있었는데, 이번 경선은 그런 공유 지점들을 회원들 사이에서 다시금 확인하는 중요한 자리였던 것 같아요.
이 : 공약으로 공익인권변론센터에 중점을 뒀던 것 같은데, 민변의 앞으로의 방향성과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궁금해요.
정 : 민변은 전통적으로 전문성을 가진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위원회가 중심이고, 그 활동에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구조에요. 지금도 그렇구요. 회비납부도 참여도 다 같이 하는 구조인데,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죠. 하나는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 특히 활동의 중심인 위원회 활동에서 벗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회원들이 생겨서 그 참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요, 또 하나는, 지금도 위원회가 15개이지만 그 활동으로 커버되지 않는 과제와 영역들, 이런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고 위원회를 지원하며 기획변론을 강화하는 것, 시민들과 함께하는 변론 등을 활성화해야할 필요가 있는 거죠. 이게 어느 특정 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결국 조직발전특별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결과, 연구소와 센터 두가지 설립안 중에서 일단 센터를 설치한다, 이런 결론이 나왔던 거죠. 여전히 위원회 활동이 중심이겠으나 앞으로는 센터나 사무처에서 일반 회원들을 상대로 한 구심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 센터가 일을 먼저 찾아서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는데, 민변활동은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 건가요.
정 :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여력이 있다면 조금 더 중장기적인 제도 개혁이나 평범한 국민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도 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나 생각해요. 흔히들 사회권이라고 하는 민생 경제, 복지, 장애인 인권 등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넘어서서 경제적, 문화적 권리에 대해서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센터가 앞서서 기획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게 시국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밀려오는 큰 사건들을 처리해야 하니까, 회원들이 좀 벅차하는 것 같아요.
이 : 공약 중에 인권 탄압에 더 공고히 대항하겠다는 공약이 있는데 그 실현방안은 어떤 건지 간단히 말씀해주신다면?
정 : 기본적으로 연대를 더 강화해야겠죠. 시민단체와의 연대는 물론이지만, 시민단체가 아니어도 일반 시민들과 강력하게 연대하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고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효과적인 여러 소통수단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김 : 앞으로의 민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으신가요?
정 : 회원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어요. 민변이 왜 좋은가 하면, 공동체적 분위기, 그것은 결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가치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많은 회원들이 다양한 관심사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민변이 그 몫을 다할 수 있게 되니 좋기도 하지만, 회원들 사이의 거리가 옛날만큼 가깝지 않은 게 좀 걱정이 되어요. 그렇다고 모여서 노는 걸 강화할 수 있는 대중단체는 아니라서요. 다양한 배경 속에서도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에 있어서는 공감하고 그 원칙으로 묶일 수 있는 그런 조직,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회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조직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천명의 민변, 천개의 전선이라고 표현했는데, 로펌에서 서면을 쓰고 있는 회원이나 거리에서 경찰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회원이나 다 같이 ‘민변’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서 공통된 자부심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조직인 거죠.
안 : 임기가 끝나실 때는 어떤 회장으로 기억되시길 원하시나요?
정 :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푸근한 회장, 어려운 때 편하게 전화하고 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느껴지는, 존경 이런 게 아니라 회원들이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녀, 피할 수 없는 가족 이야기]
유 : 부군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고, 무엇에 반하셨나요?
정 : 제가 처음 들어간 사무실의 선배이자 동료였어요.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한 것이 좋았죠. 저희가 민변의 1호 커플이에요. 민변에는 부부회원이 상당히 많아요. 아마도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더욱 끌리는 요인이 되지 않나 싶어요. 열 쌍을 훌쩍 넘긴 걸로 알고 있어요. 올 봄에도 한 커플이 있었고.
안 : 부군도 민변 회장이셨는데 어떤 팁 같은 걸 알려주신 건 없나요?
정 : 뭐 특별한 게 있다기보다는.. 저는 국가인권위원회 공무원생활을 2년 반 정도 했어요. 그 기간은 특별회원이었는데도 민변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왜냐면 남편이 그때 회장이었거든요. 부부간 대화가 주로 저녁마다 민변 이야기를..(웃음) 남편이 창립멤버이다 보니 민변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들어서 아무래도 더 잘 알게 되는 게 도움이 되었죠.
유 : 아직도 누군가의 배우자나 연인으로 호명되는 경향이 한국사회에서는 많아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전 민변 회장의 배우자나 첫 여성 회장 같은 수식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 : 내가 나 자신으로 알려지지 않고 누구의 부인이라고 호명되는 게 너무 싫었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세월이 흘러흘러 이분이 정변호사 남편이십니다, 이렇게도 호명되어요.(웃음) 첫 여성 회장에 대해서는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내가 잘났다는 것을 드디어 인정받았구나 이런 게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이것은 안 될 수도 있어, 못 할 수도 있어 라고 저 깊은 마음속에서 일정하게 그어 놓는 선이 있거든요. 그걸 넘어섰다는 것, 말로는 여성도 회장할 수 있지 이래 왔지만 제가 그 실제의 예가 되었다는 게 굉장히 기뻐요. 여성 후배들에게 선배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에서요. 민변이 진보적 법률가 단체라고들 하잖아요, 그 단체에서 30년 되지 않은 역사에 여성 회장이 나왔다는 것이 매우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에서, 역시 민변답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도 좋구요.
유 : 일이나 생활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야 하는데, 여성이라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안 힘드셨나요.
정 : 당연히 힘들었죠. 사실 30대 초반, 중반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일과 가정을 양립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3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요. 두 가지 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때론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와 짜증이 없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는 내가 과연 둘다 잘 하고 있나, 그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어려웠어요.
유 : 예전 인터뷰에, 가정에 남편이 둘 있었다고 표현을 하셨네요.
정 : 나도 나만 도와주는 마누라를 갖고 싶다, 뭐 그런 거죠(일동 웃음) 사실 저는 시부모님과 10년을 같이 살았거든요. 그러기에 가사노동을 심하게 한 것도 아니고 육아나 가사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것보다는 어머니로서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본인이 그렇게 교육받은 것에 있는 거예요. 일하는 엄마로서의 죄책감이라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운 거죠. 조금 크니까 큰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엄마 없으면 더 잘 지내더라구요(웃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엄마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무조건 좋은 엄마는 아닌 거예요. 근데 이건 사실 말로 되는 게 아니라, 겪어봐야 아는 거죠. 페미니즘이니 뭐니 이성으로는 알고 있어도 내 스스로가 사회화된 게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부담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어요.
안 : 정말, 밥도 왜 엄마만 해줘야 되는 것인가요. 아빠도 있는데.
정 : 요즘에는 남성 후배들 보니까 ‘선배님 저 애기 보러 가야 해요, 마누라가 오늘 외출하기 때문에 제가 당번입니다’ 그러더라구요. ‘야, 회의해야 하는데!’(웃음) 그걸 보고 여성인 제가 절대로 뭐라 할 수는 없고 꾹 참고, ‘당연히 들어가야지!’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되는 분위기로 바뀌었더라고요. 지금의 후배들은 육아 분담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참 좋아요.
[그녀, 인간 정연순]
안 : 사실 저희는 인간 정연순이 많이 궁금해요 여가 시간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정: 시간이 나면 여행가거나 책 읽는 것, 둘 중 하나를 해요. 남은 인생의 버킷 리스트의 대부분도 여행이에요. 두 번째로는, 독서인데, 눈이 닿는 곳에는 책을 두고 있죠. 틈나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보는 거에요.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늘 행복할 것 같아요.
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면요
정; 1998년에 민변 선배이신 차병직변호사님, 조광희변호사, 저와 남편이 노래방에서 놀다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부르게 되었어요. 우리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거기에 표범이 있는지 어떻게 아냐, 이렇게 되어 넷이서 돈을 모아, 킬리만자로로 떠났어요. 지금은 직항도 있지만 그때는 암스테르담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다시 탄자니아로 들어가는, 이틀을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이었구요. 하루 입산객이 제한되어 있는, 우리 같은 등산객들은 가방만 가볍게 메고 요리사, 가이드, 짐꾼 다 같이 함께 줄줄이 올라가는 흔하지 않는 경험이었죠. 3,000미터가 넘어서 본 산장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은하수가 대륙의 하늘에 걸쳐 있더군요. 그런데 4천미터를 넘어서 고산증에 시달려서 다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차병직 변호사님 혼자서 정상에 올라가고 저를 돌보느라 나머지 사람들은 못 올라갔죠. 제 인생에서 가장 멋있고 좋았던 여행이에요. 여러분들도 꼭 킬리만자로를 가보세요.
안 : 여행 얘기를 했으니, 책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인가요. 20대 중반, 미래를 설계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세요.
정 : 글쎄요. 책 추천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은데…
김 : 책을 고르는 기준이나 읽게 되는 기준이 뭔지요?
정 : 1년에 한번이나 두 번, 한꺼번에 책을 사요. 100여 권 정도를. 신간 소개를 유심히 봐서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구입하죠. 그런데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서 어떤 책을 좋다 해야 할 지 참 어려워요. 10대 20대에는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그때의 소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접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정말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동시에 20대들은, 조금 무거운 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기본적으로는 역사와 철학일텐데, 제 인생에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역시 ‘자본론’을 공부했던 거에요. 법학도에게는 그걸 배울 기회가 별로 없는데, 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선배들에게 야단맞아 가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이 정도의 교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철학도 계보가 길어서 다 공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역시 자본론을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원전은 너무 어렵거든요. 대신 그걸 소개하는 책들을 읽으면 되죠. 너무 무겁나?(웃음)
안 : 교수님으로부터 숙제를 받은 기분이에요.(웃음)
정 : 또 하나 요즘 중요한 게 있다면, 과학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현재와 미래에 걸쳐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 한편으로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인간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철학을 정립하는 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요즘은 좋은 책들이 빨리빨리 번역되어 나와서 읽기 좋아요.
안 : 가장 인상깊게 보셨던 영화가 있다면요?
정 :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가 있어요. 스웨덴이던가,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의 농장 노동자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이야기에요. 어린 소년이 목격하게 되는 삶의 군상이 쭉 펼쳐져요.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는 조금씩 커서 결국 아버지를 두고 하얗게 눈이 내리는 농장의 길을 걸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장면이 정말 감동적이에요.
안 : 변호사가 아닌 사람 정연순으로서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정 : 멋있는 할머니가 되겠다.(일동 감탄) 변호사로서 위대하거나 대법관이 된다든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멋진 할머니 멘토가 좀 있어야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사실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너무 힘들게도 사셨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이후 세대와 공유하는 게 적기도 하거든요. ‘헌신성’ 이거 하나 외에는 요.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를 잘 이해해주고 소통할 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남성 멘토들만 많구요. 저는 20대나 10대들이 아, 이해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무조건 니들이 꿈을 가져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멋진 ‘할머니’가 되어야지, 잘 늙어야지 이게 소원이에요.
안 : 정변호사님이 생각하는 민주사회란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란 어떤 것일까요?
정 : 글쎄요, 완벽한 이상적인 사회라는 게, 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두고 볼 때에도 논리적으로 완전한 평등, 완전한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걸 그려 보면 오히려 그게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 나온, 깨어 보니 모두가 통 속에 들어가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죠. 그런 이상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 같고 도래해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더 소중한 것은, 저기 멀리 어디에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그러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이 소중한 것임을 아는 사회,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차이와 차별은 끝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문제를 현명하게 조율해가면서 조정해 나가는 것, 그럼으로써 현실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것, 미약하나마 조금씩 이루어내는 것에 대해 우리가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만족할 수 있으면 아, 잘 살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