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회원 인터뷰, 그 마지막은 전주전북지부 박재홍 변호사입니다. 시간과 거리의 한계상 수차례의 전화와 메일이 오고 간 서면+전화 인터뷰가 되었는데요. 몇 번의 전화통화만으로도 어찌나 즐겁던지 한 번 꼭 시간을 내어 전주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멋진 회원이 많은 민변, 역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김지미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박재홍 안녕하세요, 민변 전북지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재홍 변호사라고 합니다. 변시1회이구요, 5살 1살 두 아들의 아빠이자 남편으로 육아에 힘쓰고 있습니다.
김지미 이번 총회에서 모범회원상을 수상하셨는데 소감을 다시 한번 들어볼까요?
박재홍 아직 제가 받기에는 너무나도 큰 상인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지부 회원들은 총회에 참석하면 소수이기도 하고 대다수 활동은 본부와 서울에서 이루어지기에, 총회는 우리의 축제라는 인식이 약했거든요. 그런데 지부 회원에게 상을 주시니까 지부 회원들에게 많은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받던 상을 막상 제가 받고 나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매일 출근하면서 책장에 모셔둔 상패를 보면서 ‘내가 이 상을 받은 거 맞지?’라고 되묻곤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아이 둘을 양육하느라(아내는 저 포함 아들 셋이라고 가끔 농담을 하지만)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김지미 매일 출근길에 되새길 만큼 민변 모범회원상이 변호사님께 큰 의미인가요?
박재홍 변호사가 되기 전에 바라 본 민변은 저에게 굉장히 큰 존재였거든요. 그리고 해마다 모범회원상 수상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와 정말 존경스럽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그런 상을 제가 받게 되니 실감이 나질 않지요. 그래서 그런 큰 상을 일단 받기는 받았으니, 이제부터라도 그에 걸맞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어요(웃음).
김지미 이번 모범회원상은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는데 박변호사님이 수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얼굴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농담이구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상을 주신 분께 여쭙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지부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무국장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그 대표 격으로 저에게 상을 주신 것 맞죠? 석명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웃음).
김지미 작년 가을에 전주지부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전주 지부는 회원 수도 적고 솔직히 말씀드려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인상은 못 받았는데 그 이후에 회원 수도 많이 늘고 뉴스레터 지부 활동 소식을 보면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러한 동력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시나요?
박재홍 작년에 가시적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셨다면 사무국장으로서 소임을 다 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긁적 긁적). 저희 지부는 2000년 초경 전봉호, 안호영, 박민수, 황규표 변호사님을 주축으로 지부에서 자생적으로 창립되었습니다. 회원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선배 변호사님들 한 분 한 분이 전라북도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작년 봄부터 지부장이신 장석재 변호사님과 한 뜻으로 회원 확대 사업을 우선으로 우리 지역 로스쿨 학생들과의 교류를 확대하자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후에 후배 변호사님들이 대거 회원으로 가입하셨고, 전북대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생들과 간담회, 봄산행 등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얼마 전에는 ‘민변전북지부 회원들과 법학전문대학원생들의 인권감수성 향상을 위한 워크숍’이란 거창한(?) 표제로 선후배님들과 함께 1박 2일간 동고동락했습니다. 참, 제가 워크숍 간 동안 시커먼 두 아들 덕에 고생한 아내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웃음).
적극적인 활동에 대한 동력은 아무래도 지부장님의 강한 의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부장님께서 저희 젊은 변호사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우리 장년층 변호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민변과 소통하고 있거나 요청이 들어오는 단체에 젊은 변호사님들을 적극적으로 연결해 줄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지역 민변 변호사 수가 적어서 지역에 있는 각종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일들이 일부 변호사들에게 집중되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에 버거웠지만, 이제 후배 변호사님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시민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면서 우리 지부 변호사님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변호사님들이 이 지역에서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지부장님의 의지 덕분에 지역 사회에서 저희 지부에 거는 기대가 더 커지고 있고, 저희 지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 있었던 범시민단체 릴레이 단식농성에 참여했었는데, 한 활동가 한 분이 ‘이제는 민변이 선봉에 서시네요!’라는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향후 지부장님과 함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저희 지부가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신용비어천가인데요~(웃음) 솔직히 지부장님보다는 실무를 하는 나의 역할이 지대했다..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박재홍 그건 아닌 것 같구요(웃음), 이미 선배들이 형성해 놓은 토대 위에 지부장님이 방향을 잘 잡으셨고, 무엇보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그렇게 말씀하시면 민변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분께 상을 드린 것처럼 되잖아요(웃음). 이 참에 자랑을 좀 해 주세요. 제가 이만큼 했습니다. 지난 1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이런 거요
박재홍 전주지역에는 버스파업이 큰 문제인데요, 2012년도에 전주지역 시내버스 회사들이 약 3개월 정도 직장폐쇄를 하였는데 이 직장폐쇄가 위법하다는 이유로 저희 법인 선배이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임금 청구 소송을 수행하였고, 얼마 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하여, 버스 노동자분들의 생계와 전주지역 버스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도에 우리 지역 진보 교육감이신 김승환 교육감님이 직무 유기로 형사재판을 받으셨는데, 민변 회원들이 힘을 모아 대법원까지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었고, 우리 힘으로 진보교육감을 지켜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통일교사로 알려진 김형근 선생님이 인터넷 게시판에 북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하드디스크에 북한 신년사 등을 소지, 거주지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김희수 변호사님, 안호영 변호사님, 이민호 변호사님, 김현승 변호사님과 함께 변론을 준비했었는데, 디지털증거에 대해 공부도 하고, 공동변론을 위해 중간에서 여러 가지로 바빴었거든요, 수사기록이 2박스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최종 정리는 제 몫이라…그런데 결론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지금 항소심 재판 중인데, 선생께서 그 사이에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중병에 걸리셔서 죄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선생께서 비슷한 사건으로 집행유예 기간이셨고, 유사 사건 경험을 토대로 나름 최대한 조심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분께서 스크랩하여 올리신 글이나 하드디스크나 주거지에 보관하고 있었던 자료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당 사건의 변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탄스럽습니다.
아, 제가 잠시 흥분을 했네요.
생각해 보니 바쁘게 산 것 같긴 한데 사무국장 일은 티가 잘 나지 않는 것 같아요. 지부 사무국장으로서 매월 간담회를 준비하는데, 모임 일정을 팩스로 보내고, 단체문자 보내고, 미회신 회원들에게 전화 돌리고 그러지요. 일정 끝나면 장부에 영수증 정리하고, 회의 내용 정리 하구요. 한 가지 제가 총무를 맡으면서 잘 한 것은 지부 통장을 다시 개설하면서 전용 카드를 만들었는데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웃음).
김지미 전주 지부가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활동은 어떤 것인가요?
박재홍 작년 한 해 동안 지부 회원들을 모집하고 로스쿨 학생들과 교류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시민사회 단체들과의 소통에 중점을 두고 ‘1시민단체 1변호사’라는 구호 아래 젊은 변호사들이 전라북도 곳곳의 시민 사회단체들과 호흡하고 교류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박재홍 민주노총 전북본부에 저와 저희 지부 이동현 변호사님이 매주 상담을 나가고 있고, 작년 초부터 전주 여성의 전화 부설 가정폭력상담소에 저희 지부 회원 4명이 출장 상담을 나가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서 상담을 하다 보니 만족도가 높고, 청년 변호사들의 활동 반경도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여, 올해 초부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에 2명, 전북환경운동연합에 2명, 전주 공무원노조에 2명, 남원․순창․장수 공무원노조에 각 1명, 전북 교원노조에 1명을 각 고문 내지 전담 변호사로 활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이 중에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박재홍 요즘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시민 추진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들어보셨죠? 일본군 위안부 대사관 앞에 세웠던.. 그 소녀상을 전국적으로 설립하는 운동이 지역별로 있는 걸로 알고 있고, 전주에서도 이 운동이 전개되어 다음 달이면 시민들의 이름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게 됩니다.
학부 시절 모의재판위원회라는 학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하여 모의법정을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들을 초청해서 모의법정을 열었었는데, 그 때 저랑 동기 한 명이 일본군 측 변호사단 역할을 했었는데, 할머님들이 저희 연기를 보시고 방청석에서 고성으로 화를 내시며 울부짖으셨던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님들 6-70대로 정정하셨는데, 많이 돌아가시고 남은 분들도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조속히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랍니다.
제가 집행위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시민 법정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우선은 제막식을 하고 예산이 남을 경우 추진해 보기로 했습니다. 학부시절 모의 법정을 끌어주셨던 김창록 교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자료도 받았고, 예산도 많이 남을 것 같은데, 내년 즈음으로 하여 전북 지역 시민 단체, 학생들과 함께 고민해서 시민 법정을 한 번 세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때, 동기들은 검찰이나 법원에 실무교육 받으러 바빴었는데, 저는 성당에서 중고등부 교리교사 회장을 하면서 학생들 캠프를 준비했었습니다. 교회나 성당 다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름에는 학생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는데 여간 바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여건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작했었는데, 그런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요.
‘전라북도 학생인권 조례’는 서울, 광주, 경기에 비해 나름 진일보한 조례로 제정되었는데, 이 조례에 근거한 ‘학생인권심의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교육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지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방송 출연도 활발히 하신다던데요?
박재홍 아… 올해 초부터 KBS1(전주)에서 ‘경제가마솥’이라는 프로그램에 격주로 패널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양의 해잖아요? 1월 2일에 전북KBS ‘아침마당’에 양띠 특집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가게 되었고, 저는 주로 이슈와 관련된 법률적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법률 이야기나 경제 이야기를 일반 시민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하려고 제 나름대로는 개그도 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웃음).
기억해 보니 전북아침마당 5월 가정의 달 특집으로 저희 회사 여직원들과 노래자랑에 나간 적이 있는데, 시청자들을 웃기고픈 마음에 대머리 가발을 쓰고 유치한 춤을 추기도 했네요. 부끄럽습니다(웃음). 혹시 찾아서 사진으로 올리진 말아 주세요(두손 모으고 불쌍한 표정으로).
김지미 박변호사님은 어떤 계기로 변호사가 되셨나요?
박재홍 제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었어요. 노래를 좋아해서 민중가요 노래패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많다는 것을 하나씩 알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히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학교를 그만두고 법대에 다시 입학을 했습니다.
법대 들어갈 당시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사람을 쫓아 학회 활동하고 집회 참여도 하다 보니 당시에는 사법시험을 볼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전주에 살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대학 때 지금 있는 곳에 교류학생으로 와서 2년 동안 음주, 가무, 사람 ‘3독’(불가에서는 탐, 진, 치라던데…)에 빠져 잘 놀았습니다. 그렇다고 음주가무만 한 것은 아니고요, 교환학생은 듣고 싶은 과목을 우선적으로 수강신청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는데, 그 때 단과대 별로 제가 듣고 싶었던 다양한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나는 왜 태어났나?’‘뭐하고 살아야 되나?’라는 화두를 안고 유럽으로 한 6개월 정도 어학 연수 겸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6개월 간 먹고, 자고, 걸어 다니면서,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복잡한 고민들을 떨쳐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긴다는 발표가 있었고, ‘아 이건 내가 변호사가 되라는 계시다’라고 생각하면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2009년도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변호사가 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지금생각해 보면 1차원적인 생각이지만 막연히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서른 즈음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변호사가 된 것 같습니다.
김지미 변호사가 되고 나서 민변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요?
박재홍 민변에 가입하게 된 것은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시절에 민변에서 실무 수습을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당시 김선수 변호사님이 담당 변호사님이셨는데,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시면서도 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멋져 보여, 수습이 끝날 즈음 김선수 변호사님께 추천사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학부 시절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나중에 변호사가 되거든 꼭 민변에 가입해라, 만약 가입 안하면 나한테 주먹으로 맞을 각오해라.’라고 말했고, 저는 꼭 그러리라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 민변 변호사로 나름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그 선배와의 약속은 지킨 것 같습니다.
변호사 합격여부가 발표되기 전 2달 정도 지역에 있는 비정규직센터에서 근무를 하다가, 우리 지역에 민변 선배이신 안호영 변호사님과 함께 지금 근무하고 있는 법무법인 백제에서 수습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었구요, 자연스레 민변 사건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시민단체에서 상근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물론 받아 주실지는 여쭤봐야겠지만요, 지부 민변 사무국장으로 시민 사회 단체의 다양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변호사로서의 역량이 일천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부산 출신인데, 사무실 이름은 ‘백제’라서 가끔 “신라 사람이 백제에 와서 일도 하고 백제 처녀 만나서 아들 둘 낳아 잘 키우고 있으니, 우리 사무실과 제 가정이야 말로 동서 화합의 모범이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김지미 부산 출신이신데 어떻게 해서 전주에 터를 잡게 되셨나요?
박재홍 대학시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전주에 왔다가, 성당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성당오빠나 교회오빠가 무섭다지요?) 처음엔 와이프가 프로포즈를 받아줄 때까지 전주에 있겠노라고 다짐했다가 결혼하고 아이들도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은 전주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아이들은 백제 사람이 되었네요(웃음).
김지미 민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박재홍 2012년도 말에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신 이병진 씨 관련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병진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신데, ‘작은책’이라는 잡지에 방북 경험 및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기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 북한에 도착한 이후 북한의 실상을 묘사한 내용이 있어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을 발송 불허했고, 이에 대해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1년 6개월에 걸쳐 대법원의 최종적인 승소 판결이 확정되고 난 후 전주교도소가 기고문이 담긴 편지들을 발송한 사건입니다.
그 기간 동안 이병진 씨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마지막 대법원 판결문을 보내드리고 나서 받은 편지에 ‘…형사재판에서 억눌리고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버리게 되어 홀가분하고,…제가 가장 어렵고 힘들었을 때 도움의 손을 내어 준 변호사님은 제 인생에서 소중한 분입니다. 변호사님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써 주셨습니다. 제가 민변 변호사로 역할을 다하고 있을지 의문이 날 때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위안을 받곤 합니다.
김지미 그럼 지부 회원의 입장에서 이런 점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점도 있을까요?
박재홍 특별한 것은 없고요, 지금처럼 지부와 소통하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박재홍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육아에 좀 더 신경쓰고 싶어요. 지금 5살 1살인데,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하더라구요. 요즘 첫째가 투정부리는 것이 늘어서 걱정이되기도 해서 다니던 운동도 포기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회사 끝나면 일찍 들어가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노후 준비는 ‘아내’라는 말이 있던데, 요즘 노후 준비 확실히 하고 있네요(웃음).
지부 차원에서는 올해 대구지부가 대구 송전탑 TF팀으로 모범 지부상을 수상하셨는데 전북지역도 군산 송전탑 문제가 현재 이슈가 되고 있거든요, 저희도 ‘군산 송전탑 TF팀’을 꾸려 내년에는 모범 지부 수상에 욕심을 내 보려고요(웃음).
더불어,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성명도 발표하고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입니다. 회원 수도 늘어났고, 워크숍도 하고 시민단체 연계 사업을 하면서 현장의 다양한 이야기도 듣고 있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라고나 할까요? 전북 지부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