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대법원, 유신의 품에 안기다

2015-03-26 29

대법원 긴급조치 국가배상 판결에 대한 논평

 

[논평] 대법원, 유신의 품에 안기다

 

금일 대법원(대법원 민사 제3부 재판장 박보영, 주심 권순일, 민일영, 김신대법관)은 긴급조치 9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되었다고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써,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면서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행위에 대하여 고의과실을 인정한 원심을 파기하고 대전지방법원으로 환송하였다.

특히 원심은 긴급조치 제9호가 그 발동 요건 및 목적상의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헌법상의 기본질서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것이고, 유신헌법에 의하더라도 그 내용이 헌법의 문언에 명백히 위반되며, ‘대통령이 긴급조치 제9호를 발령한 행위는 대통령의 헌법수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므로 ‘긴급조치 제9호를 발령한 대통령에게 고의 내지 과실이 인정’한 후, 원고의 국가배상청구를 인용하였었다.

종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0.12.16.선고 2010도5986판결)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 이른바 통치행위라 하여 사법심사를 스스로 억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하여야할 법원의 책무를 포기하여서는 아니된다’면서, 당시 국회의 입법권 행사라고 볼 수 없는 긴급조치 1호는 그 발동요건 및 목적이 현행 헌법뿐만 아니라 당시 헌법 제53조에 위반하여 ‘긴급조치가 해제 내지 실효되기 이전부터 위헌’이었다는 것이다. 즉 긴급조치 발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할 목적으로 발령한 행위로서, 당시 그리고 현행 헌법상 취지에 비추어 성공한 쿠데타로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일개 부에서 종래 전원합의체 판결 및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형사재심 판결의 취지를 뒤집은 채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김영삼 정부 하 정치검찰은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죄 등 고소사건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헌정사를 후퇴시킨 점등에 비춰 공소제기를 통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그러나 이들을 기소할 경우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재론되는 등 법적 논쟁이 계소돼 국가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국력을 우려가 있다’며 결국 성공한 쿠데타에 대하여 기소유예 등 처분을 내렸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결정(헌법재판소 1995. 12. 15. 95헌마221)에 의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하여 결국 전두환 등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대법원은, 40년 전 대법원과 마찬가지로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기본권보장과 법치주의를 수호할 책무를 포기하고 긴급조치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 또한 전원합의체가 아닌 부의 판단으로 기존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는, 애써서 법원조직법에 반한 판결을 선고하였다. 특히 소액사건에서 이례적으로 중대한 대통령의 국가긴급권 발동행위의 위법성을 판단하면서도 선행 전원합의체 판결 뿐 아니라 학계, 법조계의 다양한 의견이 존재함에도 이유로 고작 6줄을 할애하는 폭거를 단행하였다. 이는 유신정권, 특히 박정희의 긴급조치 발동행위에 대하여 ‘알아서’, ‘서둘러서’ ‘졸속으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결국 이번 판결은 유신헌법 및 긴급조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고도의 정치적 판결’에 다름 아니다.

대법원이 최근 긴급조치 배상 판결에 있어서, 이번 판결뿐만 아니라 수사기관의 고문 가혹행위 등 불법행위를 배상요건으로 내세우거나 민주화보상법상 재판상 화해규정을 적용하여 배상을 부인하려고 해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유신 부활 내지 정당화의 기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였다. 오늘날 사법부가 누리는 그 나마의 민주주의는 사법부의 노력이 아니라 그동안 사법부로부터 유죄판결을 당하였던 사람들, 자신을 민주주의 제단에 바친 분들의 땀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신세한탄을 하며 정부를 원망했다고 하여,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판했다고 하여 감옥에 끌려가는 야만의 시대에 젊음과 목숨을 바쳤다.

대법원은 법률가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법원의 존재 의의를 의심케 하는 판결을 하였다.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고 한다면, 사법심사를 배제하고 국민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이유 없이 감옥에 넣고 생명을 앗아가도 된단 말인가.

과연 대법원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할 자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대법원은 또다시 정의를 외면하고 유신의 품에 안겼다.

 

2015년 3월 2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한 택 근  

[논평] 대법원 긴조배상 판결 1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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