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를 다시 읽다_공부모임 후기

2015-02-10 318

『한비자』를 다시 읽다
– 고전을 읽는 독법(讀法) –

                                                             

  글_좌세준 회원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고전을 태산준령에 비유한 것은 단순히 양적 방대함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는 ‘태산준령’과 ‘호미’의 비유를 고전을 읽는 우리의 관점, 달리 말하면 고전에 대한 독법(讀法)이 갖추어야 할 ‘겸허함’으로 받아들입니다. 호미 한 자루를 가지고 태산준령을 다 파헤칠 수 없듯이, 고전의 어느 한 구절에 얽매여서는 그 고전이 담고 있는 사상적 체계의 본령(本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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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공부모임에서 제자백가의 고전인 『한비자』를 읽기로 한 것은 작년 12월 19일에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는 것이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와 생존에 관한 판단에는 무엇보다 선입견이나 편견을 배제한 통찰이 필요하다.

위 인용문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 말미에 붙은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의 보충의견 중 일부입니다. ‘견미이지맹 견단이지말(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은 『한비자』 <설림상편(說林上篇)>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두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위와 같은 비유를 인용한 다음 ‘대역(大逆)행위’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재판관이 인용하고 있는 한비자의 비유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역’이니 ‘불사’니 하는 왕실 용어가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등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극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주리를 트는 국문장의 한 장면을 떠올려야 할까요. 제가 아는 한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용어입니다.

통합진보당 사건의 변론을 담당한 김선수 변호사는 『한비자』 <해로편(解老篇)>에 나오는 ‘전식’(前識)이라는 말로 헌재 결정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전식’이란 “사물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행하고 이치가 아직 밝혀지기 전에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근거 없이 제멋대로 헤아리는 억측이 ‘전식’입니다. 한비자는 “전식은 도(道)의 화려한 수식에 불과하고 어리석음(愚)의 시작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비자가 말하는 ‘도’는 ‘법’을 낳는 원리와 같은 것이므로, 재판에서 있어서는 안 될 섣부른 예단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한비자는 ‘중단참관’(衆端參觀 : 많은 증거를 모아 대조해 보는 것)을 제1의 술(述)로 꼽고 있으며[내저설상 칠술편], 명실참험(名實參驗) 즉, “명목과 실제가 부합하는가에 따라 시비를 판정하고(循名實而定是非) 증거를 대조해봄으로써 언론을 살필 수 있도록 할 것(因參驗而審言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간겁시신편]

『한비자』는 태산준령입니다. 보충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두 재판관은 물론이요, 수주대토(守株待兎), 제궤의혈(堤潰蟻穴 : 작은 개미굴이 뚝 전체를 무너뜨린다.)의 비유를 인용한 정부측 대리인이나 법무장관 또한 한비(韓非)가 말하고자 한 ‘법가’의 본령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호미를 들고 태산준령의 어느 끝자락 자갈밭 정도를 더듬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아는 한 한비(韓非)가 강조한 ‘신상필벌’은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문법에 의한 ‘예측가능성’을 갖추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한비가 전국시대 당대의 군주들에게 ‘전식’을 경계하고, ‘명실참험’의 원칙을 강조했던 것은 ‘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이들이 빠질 수 있는 독단과 아집을 꿰뚫어본 혜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이 고전을 대하는 독법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어떠한 철학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제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5편, 10만 여 자에 이른다는 『한비자』에서 법치주의의 현대적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공부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이 우리 공부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토론 끝에 도달한 『한비자』를 읽는 독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독법이 유일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미 한 자루를 든 ‘겸허함’으로 고전의 숲을 헤쳐 가다보면 언젠가는 태산준령의 본령을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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