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큰 키, 날씬한 몸매, 깔끔한 옷차림에 간간히 섞어 쓰시는 유창한 영어까지..유남영변호사님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중절모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영국 신사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민변의 창립멤버로 30년 가까이 꺼지지 않는 불꽃을 가슴에 품고 사시는 유남영변호사님을 만나보았습니다.
김지미 제가 좀 급하게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남영 나는 말할게 별로 없는 사람인데..평소에 민변에 자주 안 나오시지만 회비는 꼬박꼬박 내시는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민변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지방에 있으신 분들. 목포에 박승옥 변호사나 부산에 있는 정재성 변호사 같은 사람들. 또 울산에 있는 윤인섭 변호사도 재미있을 것 같고. 서울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알려주고 스킨쉽을 하면 좋지요.
김지미 네~ 제가 조금 한가해지면 말씀하신 분들을 꼭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변호사님 말씀을 들어볼게요. 제가 오면서 약력을 봤더니 연수원 수료 후에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셨어요. 14기이신데 그 당시는 바로 재야로 나오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시절인데 처음부터 나는 변호사로 살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유남영 내가 유신세대인데 유신 때 나를 포함한 일부 법대생들은 놀림을 당했어요. 유신겁대. 법(法)자에서 부수를 바꾸면 겁내다 할 때 겁(怯)대. 법(法)에 어 모음을 아 모음으로 바꾸면 유신밥대. 겁이 많거나 밥밖에 생각 못하는 멍충이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이 그런 점에 대해서 도덕적인 의무감 같은 것을 느낀 거에요. 그래서 내가 법조인이 되더라도 최소한 지켜야 될 마지노선이 뭐냐. 그게 최소한 검사 판사는 안하겠다. 그 생각을 가지고 시험을 보고 연수원에 가서 연수원 생활을 하고 군법무관 생활도 하고 그랬죠. 그래서 내가 83년에 연수원 들어가서 88년, 군대 제대하고 나오니까 이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거죠. 그런데 그때도 군부독재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내가 독재정부의 하수인이 되지 말자 라고 하는 어설프고 알량한 자존심이었지요. 뭐 어떻게 보면 도덕적인 책무감일 수도 있고.
김지미 내가 판사가 돼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판결을 할 것이다 내지는 양심을 지키면서도 재조에서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유남영 내 선배인 13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의식이 있으신 분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 당시 사회과학책을 너무 많이 봐서 법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 한계는 무엇인가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회과학적 인식을 나름대로 하고 있었어요.
김지미 한 개인의 양심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신 거에요?
유남영 그렇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렇다고 내가 검사 판사를 안 하고 뭘 특별한 걸 했냐하면 뭐 한 건 없어. 오히려 그때 들어갔던 사람들이 더 좋은 판결도 많이 내리고 사회적으로 더 의미 있는 일도 많이 하고 그랬지만 어쨌든 내 개인적으로는 그때 그게 일종의 마지노선이었던 거죠. 유신 때 긴급조치 재판이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싫어했어요.
김지미 88년도에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그때가 민변이 창립한 때이잖아요. 변호사님도 창립 멤버시죠? 새내기 변호사일 때 바로 민변 창립멤버가 되셨네요.
유남영 논의 과정에 참여한 거죠. 그 당시에 이미 정법회라는 곳이 있었는데 정법회 막내 멤버로 박원순 변호사, 백승헌 변호사가 있었고 젊은 사람 중에 김응조 변호사님, 안영도 변호사님, 박연철 변호사님. 선배변호사님으로는 유현석, 이돈명 변호사님부터 시작해서 한승헌 변호사님도 계셨지요. 우리 청년법률가들은 선배들하고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그 당시에 일본 자료를 보니까 청년법률가협의회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본 자료를 많이 봤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번 그걸 구성해볼까라고 하고 있던 참에 박원순, 백승헌 변호사님 같은 분들이 다리역할을 해줬어요. 그렇게 해서 민변이 만들어진 거죠. 출발은 한 50명 정도로 시작했고 이름은 아시다시피 조영래 변호사님이 상상력이 있으셔서 시민단체 중에 최초로 우리나라 말로 이름을 지었죠.
김지미 민변 창립멤버로서 80년대 주요 변론활동이라든지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어떤 게 있을까요?
유남영 나는 1년간 서울에서 있다가 광주로 내려가서 나 혼자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89년도부터 2000년도까지는 일종의 공백기에요. 광주에서의 활동은 민변 활동의 일환이기는 했지만 개인활동이었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말할 것은 없는데 다만 기억나는 건 그 때 민변에서 처음 나온 출판물이 있었어요. 악법개폐의견서라고 해서 그게 민변에서 처음 나온 공식 출판물이었어요. 그걸 변호사님들이 나눠서 썼는데. 조용환 변호사가 그 당시에 안기부법에 관해서 의견서를 한 50페이지를 썼어요. 모두가 깜짝 놀랬고 탄복을 했지요. 나는 행형법을 썼어요. 그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를 썼는데 그 중에 내가 ‘감옥과 인권’이란 걸 쓰게 됐어요. 감옥과 인권이라는 것을 쓰면서 양심수들에 대해 알게 됐지요. 민가협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그래서 내가 양심수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행형법에 관해서 악법개폐의견서를 썼지요,
김지미 변호사님은 옥고를 치르신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양심수에 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남영 특별히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그 때 당시 박원순변호사가 각자 쓸 분야를 상의하거나 지정해줬는데 그렇게 우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 거지요.
김지미 광주에서 95년까지 변호사생활을 하시다가 서울로 올라오신 게 아니고 유학을 가셨네요. 이때가 30대 후반인데,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시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유학을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남영 96년 1월부터 99년 7월까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어요. 광주 생활이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원래 공부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람이나 쐬자 하고 간 게 한 3년 6개월 있었던 거죠.
김지미 저는 변호사님이 이렇게 학벌이 높으신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워싱턴 로스쿨 석박사를 다 따신. 어휴~ 전공은 뭘 하신 거에요?
유남영 국제사법을 전공했어요. 국제사법이라고 하면 크게 2가지에요. 섭외 소송이 생겼을 때 어느 나라 법정에서 어느 나라 법을 적용하는가를 공부하는 법제입니다. 우리 때는 사법고시1차 시험과목이었는데 조문이 30개밖에 안돼서 득점하기 좋은 과목이었지요. 나는 미국 로스쿨에서 주로 사법쪽을 들었어요. 예를 들면 민사소송법, 불법행위법, 그 다음에 국제사법. 미국은 52개 주가 있고 연방법까지 있으니까 모든 문제가 생기면 다 섭외사법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정규과목으로 가르쳐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법 과목이어서 재미가 있었지요. 굉장히 다이나믹하고 여러 가지 이론도 많고 재미있는 케이스도 많고. 또 역사적인 연원이 12세기,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에서부터 시작하니까. 볼로냐 대학의 교수였던 바르돌로스라는 사람이 쓴 국제사법책이 지금도 있어요. 그것부터 제가 공부를 했지요.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번성하다가 그게 불란서로 넘어가요. 불란서가 국민국가로 통일되기 전에 각 지방에 여러 영주들이 있잖아요. 그 가운데 누구의 토지를 누가 상속을 하느냐가 늘 문제가 되었어요.귀족들의 법이 되지요. 그러다가 그게 16세기 네덜란드로 넘어갑니다. 당시 16세기 네덜란드는 1648년인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도시국가 7개가 모여서 하나의 연합된 독립공화국 형태로 운영이 될 때에요. 유럽의 상업의 중심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그 화려했던 네덜란드. 많은 화가들이활동하던 당시, 네덜란드의 황금기에요. 그게 7개 공화국이 있으니까 7개 공화국 사이에 어떻게 법이 적용되는가 발전을 하다가 그게 이제 유럽으로 넘어가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데.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독자적인 법들이 많고 별의별 희한한 법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국제사법이 발전한 것이죠.
김지미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것 같아요(웃음).
유남영 겸임교수도 몇 번 해봤어요.
김지미 99년도에 귀국하셔가지고 그때부터 KCL에서 쭉 근무를 해오셨잖아요.
유남영 미국에서 3년 6개월 있었는데 그 동안에 IMF가 일어났어요. 800원대에 미국을 갔는데 1달러가 2,000원이 됐어요. 있는 돈은 다 쓰고 집도 팔아먹고. 들어올 때 수중에 한 2천만원 있었을 거예요. 집은 장모님이 돈을 대줘서 전셋집을 하나 얻었는데 직업을 구해야 했지요. 이 로펌에 마침 친구가 있었는데 일은 많은데, 경험 많은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여기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집도 마련을 하고. 여기서 한 8년 근무했을 때 쯤 바깥바람 한 번 쐬어야겠다 했는데 마침 국가인권위원회로 들어가게 됐어요.
김지미 귀국하신 이후에는 다시 민변 활동을 하신건가요?
유남영 회원은 회원인데 거의 활동은 못했죠, 돈 버느라고. 그리고 일이 많았어요. 97년도에 IMF가 생겼으니까 97년, 8년, 9년 그때가 한국 로펌의 황금시대에요. 일이 사방에 널려 있던 때에요. M&A, 자산정리, 구조조정. 상사거래가 너무 많다보니까. 자문 건도 많고 일이 넘쳐흐를 때에요.
김지미 2006년도에 민변 부회장님이셨네요?
유남영 가끔 한 달에 한번 정도 월례회에 참석하고 다른 활동은 별로 안할 때에요. 그런데 백승헌 변호사가 회장이 되고 나서 나한테 부회장을 한 번 해보십시오 하기에 나는 보수적인 사람인데 무슨 부회장을 하냐 돈이나 열심히 내겠다 그러니까 백변호사가 보수적이면 어떠냐 그런 사람도 있어야하니까 와서 해보십시오 라고 해서 한 거예요.
김지미 민변의 한미-FTA 특별위원회 위원장도 하셨었죠?
유남영 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부회장 중 한 명이 하라고 해서 제가 그걸 맡아서 했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부가 주장했던 만큼 장밋빛 효과도 없었고, 반대파들이 주장했던 만큼 큰 폐해도 없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조금 시간을 걸쳐서 천천히 했으면 괜찮을 일을 급히 서둘러서 문제가 된 거에요.
김지미 그 때 민변은 한-미 FTA 반대 입장이었었죠?
유남영 네. 그런데 반대하는 입장도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민변 내에도 결사반대하는 입장도 있었고. 나 같은 사람들은 왜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그렇게 하느냐, 민주주의의 침해다라고 하는 입장이었지요. 조약이라는 것을 맺으면 조약은 우리가 폐기할 수 없잖아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김지미 외부활동을 2000년 들어서 많이 하셨는데, 보면 대한변협 재무이사도 하시고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교육정보화 위원회도 하셨네요.
유남영 그 때 대한변협 회장이 박재승 변호사님인데 변협에 위원 추천이 오면 상임이사들을 추천을 해요. 그래서 다 하게 된 거지요.
김지미 2008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계셨잖아요, 이때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상이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고, 기대도 그만큼 많았었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어떻게 해서 가게 되셨어요?
유남영 국가인권위원회로 가게 된 계기는 내가 로펌생활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주위에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근데 그 당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자리가 빌 예정인데 법리도 알고 여러 가지 식견도 있는 사람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안경환 위원장도 나를 추천한 모양이고. 그래서 제안이 왔을 때 내가 두 말 않고 yes 했어요. 내가 12월 24일 날인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한테 임명장을 받았는데요. 그때가 대통령선거 지고 나서였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어떻게 될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어요.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난거지요.
김지미 상임위원으로 재직 중이실 때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 결과를 발표하셨지요? 국가인권위원회 처음 오고 나서 이제 우리나라에 고문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텐데 이 사건이 나서 좀 놀라셨겠어요.
유남영 그때 한국의 인권상황을 보면,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 다 리바이벌 됐어요. 첫째가 양천서 고문 사건이 생겼고, 국무총리실에서 민간인 사찰을 했었고. 그래서 옛날 독재정부 시절에 있었던 고문과 민간인 사찰이 다 돌아왔다, 판단했죠.
김지미 양천서 사건만큼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인권 의식이나 민주주의의 후퇴와 어울려서, 과거로의 회귀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를 해서 권고를 내려도 예전만큼의 반향은 없는 거 같아요.
유남영 그렇죠.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를 내리면 도덕적 권위가 있는 거죠. 신문에다 발표만 하는데, 예를 들어 ‘고문했다 조심해라’, 하면 창피하잖아요. 불명예스럽고 그러니까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촛불 집회 이후 정부와 갈등이 있고 그 여파로 조직축소가 되고 나서는, 그 기관의 위상이 자꾸자꾸 떨어졌어요.
김지미 얼마 전에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를 경찰이 명시적으로 안하겠다, 이런 기사가 났더라고요.
유남영 변호사 조력을 받을 권리와 관련해서 그런 보도가 있었지요. 2009년도부터 권위가 자꾸 떨어지고 있어요. 참여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인권에 대해서 신경을 썼지요. 정부기관이 잘 안 들으면 민정수석실에서 정부기관을 다독거렸고. 대통령 스스로가, ‘정부 정책 반대해도 인권위가 그런 거 하라고 있는 거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장관들이 마음대로 못하죠. 그리고 인권위원장 하시던 분들도 인품이나 경력이나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김지미 지금의 인권위를 바라보는 심정이 좀 착잡하시겠어요?
유남영 그런 건 없어요. 인권이라는 게 늘 정치 속에 있는 거니까. 각 국가의 인권위원회가 권력으로 하여금 인권을 챙기도록 하는 건 어렵죠. 그렇지만 참여정부 때는 권력이 그것을 용인했으니까 활동을 했던 거고. 지금 인권위를 보면 국가인권기구의 역설을 생각하게 돼요. 예를 들면 인권침해가 많아서 인권기구가 필요한 시점에는 인권위가 죽어 있고, 인권이 보장되어서 국가인권위는 그렇게 안 설쳐도 되는 때는 오히려 인권위가 활성화 되고. 국가인권기구의 역설이죠. 세계 다른 여러 나라의 인권위원회도 부침이 있어요. 정치에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겪어야할 문제죠.
김지미 상임위원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자진 사임을 하셨잖아요. 이때 인권위원들이 줄줄이 사퇴하고 그런 시기였죠?
유남영 조직축소를 하자 안경환 위원장님이 항의 차원에서 사표를 쓰시려다가 부하들 살려야 하니까 안경환 위원장님이 손에 피를 묻혔죠. 그렇게 정리를 하고 물러났어요. 그 당시에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세계연합기구인 국제조정위원회 (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약칭 ICC) 부의장 국가였어요. 다음 의장은 한국으로 사실상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저도 UN에 가면 부의장석에 앉았었어요, 제가 자주 국제회의를 갔기 때문에. 모든 관계자들이 차기 의장은 한국이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안위원장님이 사퇴하시면서 국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 보내 달라 그 말씀을 하시면서 그만 두셨죠. 그런데 현재 위원장을 보냈어요. 현재 위원장은 그런 거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보니까 내가 구사하는 정도의 영어 가지고도 ICC 의장은 못해요. 그런 거 전혀 관계없이 현재 위원장을 보낸 거죠.
김지미 저는 올해 사무처 일을 하면서 변호사님을 거의 처음 뵀는데, 지금 말씀을 쭉 들어보면 민변에서의 활동은 오히려 올해가 가장 활발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지금 민주변론 편집위원장을 하시고, 징계변호인단 단장님도 하고 계시잖아요. 먼저 민주변론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민주변론이 2년 가까이 휴간했다가 복간을 하면서 복간 첫 호의 편집위원장을 맡으셨어요. 재작년부터 들어온 신입회원은 민주변론이 뭔지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민주변론의 의의랄까, 그런 거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주신다면.
유남영 우선 편집위원장이 된 건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한택근 변호사가 ‘형님, 이것 좀 해주십시오.’ 하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웃음) 민주변론이 2013년부터 안 나왔는데, 현재 정부 들어오고 나서 쌓인 이야기들이 많잖아요. 우리 민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 학술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그런 것을 잘 정리해서 공유하는 매체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민변이 지금 만큼 공격을 받은 때는 없었을 거예요. 이럴 때 우리 회원에게 우리가 만들어온 스토리를 잘 전달하는. 그래서 회원들로 하여금 공유할 수 있는 자산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김지미 무엇을 실을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백지상태에서 시작을 했잖아요. 이 뉴스레터 인터뷰가 15일 날 나갈 텐데, 민주변론은 월말쯤에 발송을 해서 우편으로 받는 사람은 내년 초쯤에 받아보시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미리 내가 보니까 이번 호에서는 이게 제일 재미있더라, 이런 게 있을까요?
유남영 아무래도 변론기가 가장 재밌겠죠, 변호사들한테는. 그 다음에는 이제 현 정부 들어와서 계속 수난을 당하고 있는 권영국 변호사 이야기. 그게 이제 권영국 변호사 개인의 삶이기도 하지만, 민변의 삶이기도 하니까. 권영국 변호사 이야기를 회원들이 많이 보고 심정적으로라도 지지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지미 지금 징계개시신청이 류하경변호사까지 하면 8명인데 그에 대한 대책위가 꾸려졌고, 지금 징계변호인단 단장을 맡고 계신데, 단장님은 자의에 의해서 하신 거죠?(웃음)
유남영 이것도 한택근 변호사가 ‘형님, 좀 맡아 주십시오.’ 한 건데, 우리 회원들이 이렇게까지 기소 당하고 징계까지 당하는 마당에 속칭 창립멤버라는 사람이 어떻게 못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김지미 이렇게 민변이 탄압을 받는 건 처음인 거죠?
유남영 없어요. 옛날에 한승헌 변호사님이 2번 기소를 당하셨지요. 70년대 김지하씨 사건에 관한 글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를 당하셨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셨지요. 홍성우 변호사님이 10.26 사건 끝나고 잠깐 변호사를 강제로 휴직을 당하셨고. 광주에 계신 홍남순 변호사님이 광주사태로 수형 생활을 2년 간 하시고. 이돈명 변호사님이 86년에 이부영씨 범인은닉죄로 기소당하시고. 강신옥 변호사님이 1975년 민청련 변론하실 때 변론석에 계시다가 피고인석으로 가셨고, 다들 특수한 정치적 격변기에. 그거 외에는 진짜 없었던 일이에요.
김지미 개인이 아니라 민변이라는 조직을 타겟으로 해서 그 회원들에 대한 징계이기 때문에 젊은 변호사들 보다는 역사를 쭉 알고 계시는, 예전 7-80년대에도 없던 일이라는 걸 체감하시는 선배 변호사님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이 더 강하신 거 같아요.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하려고 하시는 거 같고.
유남영 독재정부 시절에는 아무리 심해도 변호사들까지 건들진 않았어요. 다만 사찰이 있으니까 의뢰인들이 사건을 안줬죠. 그래서 인권변호사를 했으면 배가 고팠지만.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변론권 문제로 트집 잡지는 않았어요. 징계 신청까지 하거나 한 적은 없지요.
김지미 이렇게 변호사들의 변론권을 위축시키는 것이 변호사의 문제가 아니라 의뢰인이나 국민들의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공안정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속속 나오고 있는데, 이 뉴스레터 인터뷰는 홈페이지에 올라가서 시민들도 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짤막하게 해 주세요.
유남영 5명 변호사님들 사건은 변호사로서라기보다는 시민으로서의 집회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기소가 있었기 때문에 징계 개시가 신청이 됐는데, 그것은 형사 판결 결과에 따라서 유죄 판결이 되면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등록 취소 사유가 되는 거죠.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나머지 두 명 같은 경우에는 피고인의 진술거부권을 권유했다는 것이거든요? 피고인으로 하여금 허위의 말을 하게 했다고 하는 건데. 두 사건 다 크게 보면 피고인들이 계속적으로 변호인하고 이야기를 할 때, 자기가 여러 가지 사유에 의해서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런 내용을 변호사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고문을 당했다든지, 그런 일이 없는데 있다는 등 사실관계를 계속적으로 공소장과 다르게 이야기를 할 경우 변호사 입장에서는 피고인 말을 진실로 믿고 변론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그렇지 않고, 피고인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피고인 말대로 그렇게 진술거부를 해라, 하는 것이 징계 사유가 된다면, 형사 법정에 선 변호사 중에 무죄 선고를 받아낸 변호사 이외에는 전부 징계 신청해야 돼요. 심지어 비근한 예로, 대형로펌에서 재벌들 사건 변론할 때 보면 검찰 고위직 출신부터해서 많은 검사출신 변호사들이 예상 질문과 답변을 작성해서 ‘이렇게 답변하십시오, 이건 안 좋습니다.’ 이런 내용에 관해서 자문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 경우가 신문에도 밝혀진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 진술 권유하는 게 밝혀져서 윤리위반 했다, 허위진술 강요한다고 신문에도 나왔는데 그때는 오히려 징계신청 없었어요.
김지미 장경욱 변호사님이나 김인숙 변호사님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변호사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건데, 그걸 징계한다면 안 할 사람이 없다. 지금 변론의 기본 중의 기본을 했을 뿐인데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징계라는 거죠. 이렇게 무리한 징계 신청을 하는 걸 보면 검찰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뭐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유남영 그게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공안기관 입장에서는 민변이 눈엣가시가 아니겠어요, 김성호 전 국정원장이 새누리당 의원들 앞에서 말한 걸 보면, 민변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 못 이긴다, 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니까. 저 친구들만 없으면 사건이 쉬울 텐데. 아마 그게 가장 큰 이유가 될 테지요.
김지미 저희가 여름에 민주변론 첫 회의를 시작해서 벌써 겨울이 되었고, 가을쯤부터는 징계 건으로 숨 가쁘게 흘러왔던 올해인 것 같은데. 내년에는 개인적으로나 민변활동과 관련해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세요?
유남영 어려운 질문하시네요. 나는 계획을 안 하는데.(웃음) 개인적으로는 크게 계획하는 건 없는데요, 저는 주로 인권에 관한 책을 많이 봐요. 한 달에 1-2권씩은 꼭꼭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원서로도 많이 보고.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고요. 뭐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김지미 인권이라고 하는 것도 여러 분야가 있잖아요. 그만큼 포괄적인 단어가 없는 것 같은데, 특정분야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가요?
유남영 나는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국가제도 안에서 근무를 해보았으니까, 어떻게 하면 인권문제가 우리나라의 정치과정과 국가의 의사결정에서 늘 고려되고 반영되고 논의 되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죠. 어떻게 하면 인권문제가 정치과정이나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되고 논의되고 실행되고 하는 프로세스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게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기준이 있어야 될 것 아닌가. 국제인권기준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잘 실현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절차나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것이 늘 제 관심사이지요. 그래서 제가 그 문제에 대해서 ‘인권 기본법 제정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어요. 나는 그게 지난 대선에서 공약용으로 만들어낸 건데, 문재인 캠프에서는 안 받아들여졌어요. 근데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와 박근헤 정부에서 이를 104개 국정과제중의 하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법무부 국정과제예요. 이름을 달리 했는데, ‘국가인권정책기본법’인가 이렇게 법무부가 그걸 받아가지고 국정과제가 됐어요. 그래서 제가 담당 실무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느냐, 내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느냐,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논문을 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지금 인권정책연구소의 이사로 계시면서 추미애 의원과 함께 준비하고 계신건가요?
유남영 그건 내가 한 게 아니고, 추미애 의원이 준비를 한 건데 내가 아이디어를 낸 거지요.그래서 토론회에 나와 달라 해서 두 번 나간 적이 있어요. 내가 만든 법안은 아니고.
김지미 인권기본법이라고 하면 가장 어려운 인권, 기본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 제목만 봐서는 내용이 잘 가늠이 안 되거든요. 개괄적으로라도 설명을 좀 해주신다면요.
유남영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인권조약처럼 권리의 내용과 리스트를 정리한 게 아니고요. 인권에 관한 이슈가 지자체, 국회, 행정부 내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하는 절차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에요. 제가 주장한 것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하나는 이런 거예요. 유엔에서 우리나라가 7개의 국제인권조약에 가입해 있기 때문에, 매년 1-2개의 권고를 받습니다. 그 권고를 받기 위해서는 미리 국가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하고, 국가보고서에 대해서 시민단체가 의견도 내고 제네바에 가서 로비도 하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권고를 받습니다. 국가보고서도 공개도 어쩔 땐 안하고 유엔권고안은 받아다가 담당부서에 뒀다가 5년 뒤에 똑같은 이야기합니다. 우선 국가보고서 만드는 과정부터 투명하게 공개하고 권고를 받으면 그것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그런 과정을 만들고,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NAP도 법령에 근거를 두게 해서 규정하는 절차도 만들고 인권교육에 관한 근거를 규정하고 그렇게 인권을 제도화 하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에 인권발전경향이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가 되는 것이고, 하나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가 되는 것, 두 개가 함께 가는 거예요. 유엔의 인권시스템이 있듯이 유엔의 인권시스템과 비슷한 시스템을 국내에서도 한 번 만들어보자, 하는 게 인권기본법이에요. 그래서 내 목표는 human rights politics, 인권을 둘러싼 정치를 활성화하자 라는 겁니다.
김지미 민주변론 회의 마치고 회식자리에서 강모 변호사가 28살인데 자제분과 같은 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보면 이제 자식 같은 후배 변호사들이 속속 들어오는데 후배들이 지금 변호사 시장이 한참 어려운데 들어와서 고군분투하고 있잖아요. 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한 마디 해주신다면.
유남영 오늘 질문 중에서 가장 마음이 무겁고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민변에 들어오는 변호사님들은 그래도 사회정의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인권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온 변호사들이거든요. 인류역사에 있어서 사회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굉장히 소중한 보물 같은 마음이에요. 그게 처음부터 태양처럼 빛날 수는 없으니까 촛불처럼 조그만 불씨가 세월과 고통과 연륜과 자기고민을 통해서 조금 조금씩 자기 가슴에서 커 나가면서 때로는 꺼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제가 40대 후반이 되면서 우연한 기회에 논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 나와 있는 여러 종류의 논어를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감동을 받아 눈빛이 폐이지를 뚫을 정도로 열심히 읽었지요. 많은 논어책을 덮은 후에 제 머리 속에 딱 세 구절이 남았습니다. 논어의 맨 처음 편에 나오는 세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늘 생각합니다. 우리 후배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끊임없이 사회와 역사에 발맞추어 공부하라는 이야기지요.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혼자 골방에서 외롭게 공부만 하지 말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관심과 활동을 조직화하라는 뜻이겠지요. “세상이 나를 몰라도 화내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질투, 분노, 한탄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무슨 원망이 있을까요? 난세 속에서 끝없이 궁구하다가 하늘이 나를 버렸다는 회한 속에 죽어간 공자의 모습, 그 모습이 우리와 후배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기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