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민변과 함께한 15년, 대전충청지부 임태영 간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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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한번씩 민변 전체 행사에 참여할 때면 늘 하회탈 같은 얼굴로 반갑게  인사하는 한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대전충청지부 임태영간사님인데요. 얼굴만 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이 분이 고3 딸을 둔 학부형이자 민변에 오신 지 15년이나 된 베테랑 활동가라는군요. 민변이라는 법률가단체에서 비법률가로 살아온 15년의 세월이 궁금해서 지부대표자회의 참석을 핑계 삼아 임태영간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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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안녕하세요. 저희가 회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변호사 회원 외에 간사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임태영 : 네 그러게요.

 

김지미 : 처음인 만큼 변호사가 아닌 간사 회원 입장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고 특히 대전지부의 활동 상황에 대해서도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다른 지역에 계신 회원들에게 대전지부를 알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우선 임간사님께서 민변에 처음 들어오신 게 언제이죠?

 

임태영 : 제가 2000년 4월에 들어왔으니까 올해로 15년차가 되네요

 

김지미 : 우와~민변 간사님들 중에 제일 고참이시네요.15년이면 그 때 태어난 아이가 지금은 중학생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인데요. 민변과의 인연은 조금 후에 듣기로 하고 민변에 오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임태영 : 음.. 학교 다닐 때는 일당 2만 원 정도를 받고 주말에 노가다나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해서 용돈벌이를 했었어요. 그런데 방학 때나 휴학할 때에는 대전에 있는 봉제공장을 다녔는데 월급이 14만원인거예요. 그게 87,8년도 쯤인데 너무 당혹스러웠죠. 주말 아르바이트를 해도 그것보다는 많이 벌 수 있는데 한 달 꼬박 일해도 그 정도도 못 받으니까..

 

김지미 : 그 때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신 건가요?

 

임태영 : 당시 대전역 앞에 코파카바나라는 유명한 나이트클럽이 있었어요. 콜라 값 내면 거기서 춤을 출 수 있는 무도회장이죠. 제가 봉제공장에서 일하기 전에는 거기에 가는 여성분들은 다 공순이들이다 이런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게 다 무너져 버리는 좋은 기회였죠. 여공들이 낮에 일하고 저녁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월급날 14만원 가지고 쪼개가지고 한 달에 한 번 놀러 오는 건데 오해를 한 거죠. 처음으로 갔던 봉제공장에서 노동조합도 아니면서 우연하게 안에서 싸움이 벌어져서 다 같이 떼거지로 그만두고 뭐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렇게 하고 저는 군대로 가버렸어요. 그 안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마무리가 됐는지 이런 걸 챙겨보고 뭐 이런 여력도 없었죠.

 

김지미 :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간 봉제공장에서 처음으로 저임금의 현실이라든지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서 접하게 됐는데 당시는 본질적으로 노동운동을 통해서 개선해야 할 문제다 라는 식으로의 접근까지는 안됐던 상황인거네요.

 

임태영 : 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굉장히 후회스러운 것이 그때 내 성질대로 하느라고 나머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더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분들은 계속 그 직장을 다녀야 하는 분들인데…

김지미 : 선동만 하고 빠지셨군요.(웃음) 불의를 보면 잘 못 참는, 내가 어떤 사회적 인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봤을 때 이건 아니지 않나 라고 하면 바로 행동하시는 그런 성격인가봐요.

 

임태영 : 네.. 노동조합을 하기 전까지는 별명이 사회부적응 환자였어요(웃음). 고향친구들이나 동창들이 저를 보고 넌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냐 이런 질문을 하염없이 받던 시절이 있었죠. 제가 당구 못 하고 고스톱 못 치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친구들하고 계모임을 하거나 동창모임을 하면 시간이 갈수록 슬슬 눈총을 받아요. 제가 빨리 가야 나머지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제가 있으면 뭣도 안 되고 뭣도 안 되고 그러니까..그런 게 좀 괴롭기도 하면서 그래도 뭔가 좀 같이 묻어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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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나만의 길이 있었군요. 고집이 상당히 센 편이신가 봐요. 그런 면에서 보면.

 

임태영 : 네.

 

김지미 : 그러다 군대를 갖다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들어간 곳이 엑스피아 월드인가요?

 

임태영 : 오뚜기 자회사인 상미식품이란 곳을 가게 되었는데요, 그때도 입사한 지 서너 달 만에 산재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관리자와 싸우고 8명 정도 그냥 일괄사표 내고 나오게 됐어요. 우리는 8명이 핵심멤버라 일괄사표를 내면 공장이 멈출 줄 알았는데..(웃음) 아주 순진한 생각이었죠. 그 다음에 대전에 있는 한울제약이라는 제약회사에 들어갔었어요. 의외로 제가 소소한 기술자격증이 많아서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항상 노동문제와 관련된 소소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저한테는 그게 도저히 그냥 덮고 갈 수는 없는 문제가 되더라구요. 그러고 94년도에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 위탁 운영 업체인 엑스피아월드에 입사하게 됐어요.

 

김지미 : 8,90년대에는 산재사건이나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싶은 사건들이 노동현장에 당연히 만연했을 텐데 조직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든다든지 그렇게 해서 대처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못하다가 엑스피아월드에 94년도에 입사를 하셔서 95년 4월 그 다음해부터 노조설립을 주도하시게 되는데, 그렇게 내가 노조를 설립해서 뭔가 대응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행동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임태영 : 입사하고 1년 동안 불만들이 우후죽순 여기저기서 막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에 조금 활동성이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설립에 관해서 공식적인 회의를 갖기 시작했어요. 그 회의에 제가 참여를 했는데 6개월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는 거예요. 뭐가 문제인가 보니 이게 노동청에 신고해야 하는 서류들, 총회자료나 규약 뭐 이런 것들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하소연들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내가 할게’ 해서 일주일 만에 다다닥 준비해왔죠. 오늘 회의하면 바로 다음 주 총회할 수 있다, 하자.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총회를 여니까 위원장 후보감들이 그 때만 해도 서 너 명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다 못하겠다고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총회 날 위원장 선출을 못하면 여태까지 준비한 게 다 무로 돌아가는데.. 그때 제가 28살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손들고 내가 하겠다, 바지 위원장 하겠다(웃음) 석 달 정도만 하고 석 달 후에 다시 총회 열어서 새로 뽑자. 그래서 위원장이 되었어요.

 

김지미 : 일단은 노조가 성립은 해야 하니까 바지위원장을 자청하신 거네요.

 

임태영 : 네. 그렇죠. 내가 위원장을 꼭 해봐야 되겠다, 노동조합 활동을 멋있게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김지미 : 처음에는 바지위원장으로 알고 시작하셨는데 바지가 아니라 진짜 위원장님이 되셨어요. 그렇죠?

 

임태영 : 당시 엑스포공원에 전체 직원 수가 천 명 이상 됐어요. 우리가 첫 회 만들 때 조합원 수가 400명 정도 됐었으니까 조합원이 많은 편이었죠.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노동조합이 잘해봐야 200명, 300명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제가 위원장이 되고 나니까 옛날에 위원장 안하겠다고 슬슬 빠졌던 사람들이 총무부장 뭐 이렇게 감투를 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때는 제가 어리고 세상물정을 몰라서 왜 그러는지 잘 몰랐어요. 근데 이게 돈하고 관계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독단적으로 취한 조치가 조합비는 아무도 못 건드린다 나도 안 건드릴 꺼다. 용돈 자기 월급에서 쓸라면 쓰고 이거는 파업기금으로 돌릴 꺼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계속 압박을 하는 거예요. 술값도 써야하고 뭐.. 전형적인 한국노총식 노동조합 활동을 생각 했나봐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깨나 고민을 하다가 뜻이 맞는 소수 간부들끼리 이 참에 파업을 해버리자(웃음) 그래서 3일 파업 했어요. 4월에 노동조합 만들고 한 4개월 후에

 

김지미 : 조합비를 쓰기 위해서?(웃음)

 

임태영 : 떨어져 나갈 사람 떨어뜨리기 위해서. 3일 파업을 하니 당연히 위원장 안하겠다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이 다 떨어져 나갔죠.

 

김지미 : 그 사람들은 정말 이런 식의 진성노조활동을 할 줄은 몰랐던 거네요.

 

임태영 : 네.(웃음) 그런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간 건 좋았는데 다른 한 축을 제가 놓친 게 조합원들의 두려움을 생각을 못했어요. 초짜여가지고. 이 어용 짓거리 하는 놈들 간부 쪽에서 떨어뜨려야겠다 이 생각만 했지 조합원들이 두려워서 못 쫓아 올 것이다 이 생각은 못했어요. 다 한마음 한 뜻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래서 3일 파업이 되어 버렸고요. 96년도 쯤에 조합원들이 훈련이 더 된 상태에서 두 번째 파업을 했었을 때는 한 6개월 정도 파업을 했었죠.

 

김지미 : 6개월 파업했을 때 파업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임태영 : 근로조건 개선이었어요. 임금인상 투쟁, 복리후생 관련한 투쟁 이런 것들이었죠. 엑스포 과학공원이 서비스 직종이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서비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사업장들이 거의 없었어요. 한국노총 쪽에 호텔이나 이런 노동조합들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파업을 하고 그 서비스 직군의 특수한 사항들을 근로조건 개선이란 요구로 내걸고 이러는 경우들이 거의 없었거든요. 예를 들면, 핫도그를 파는 캐셔들의 경우에 자기가 그것을 돈 내고 사먹으려면 제 값 주고 사먹어야 돼요. 바로 공원 밖에서는 노점이 500원에 파는데 공원 안에서는 이천 원씩 해요. 노점에서 사먹다가 걸려서 시말서 쓰고 반성문 쓰고.. 사장 입장에서 볼 때는 괘씸했겠죠. 우리 회사 물건을 사야하는데 감히 불법노점 것을 사먹고 있으니. 또 예를 들어서 지금은 도우미가 조금 특수한 용어로 쓰여지는데 그 안내하시는 분들, 이분들이 화장도 해야 하고 스타킹도 입어야 되고 하는 건데 스타킹은 하루에 보통 3개정도를 사용해야 해요. 그런데 이게 회사에서 지급을 해야 하는 지급품이냐 아니면 개인이 100만원 남짓 받는 월급 가지고 계속 구매해서 착용해야 하는 것이냐가 문제된 거죠. 당시는 요구들이 거창한 게 아니라 스타킹, 립스틱 뭐 핫도그 사먹는 거 이런 소소한 문제들, 또 점심시간에 식사하는 문제들 요런 것들 가지고 시비가 발생되기 시작했고 그 때 우리 엑스포 공원 단체교섭 요구안이 되게 재미있습니다. 스타킹은 하루에 3개씩 지급한다, 립스틱은 한 달에 몇 개씩 준다. 이런 요구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김지미 : 그게 결국엔 실질임금하고 관계가 되는 거잖아요. 내가 100만원 받는데 스타킹 사서 신는데 몇 십만원씩 써버리면 임금이 그만큼 낮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이전에는 서비스직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식의 요구를 할 생각을 못하다가 임간사님이 위원장을 하시면서부터 단체교섭에서 그런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하게 된 거네요.

 

임태영 : 동질성의 인식이랄까.. 서비스직종에서 시설, 관리파트를 간부들이 담당하다보니 현장에 있는 분들의 요구들을 제대로 못 끌어안고 있는 거죠. 그런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최소한 싸움의 시작이 거기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10% 올려봐야 월급 많이 받는 관리직들만 많이 올라가는 거지 이 분들한테 오히려 더 혜택이 안 가게 돼요. 그래서 임금인상을 하더라도 정액으로 가자. 그래서 관리직종이나 직책이 높은 사람들은 조금만 가져가라. 오히려 하위직급을 좀 많이 올려야 되겠다. 그 다음에 지급품을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해서 지급을 해라. 휴게시간 관련해서도 청소하시는 분들이 화장실에서 쉰다는데 여성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을 마련해달라 뭐 이런 요구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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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당시 파업하면서 명동성당에서 농성도 하시고 구속도 되신 거지요?

 

임태영 : 네. 집행유예로 나왔으니까요. 짧게 구속됐었어요.

 

김지미 : 그러면 당시 구속되면서 대전지역 민변 변호사들하고 인연이 되신 건가요?

 

임태영 : 네. 제 해고 사건은 서울에 있는 이원재 변호사님이 해주셨고, 대전 사건은 주로 정덕진 변호사님이 해주셨어요.

 

김지미 : 그러다가 99년에 엑스포 과학공원의 경영권이 대전시로 이관이 되었는데 당시 고용승계는 다 이루어진 것인가요?

 

임태영 : 오랜 기간 파업투쟁을 하면서 사실은 지쳐서 많이 떨어져 나갔구요. 끝까지 남아있던 노동자들 대부분은 비조합원 조합원 가리지 않고 고용승계가 되었어요. 그 대신에 몇 명 찍어서 얘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은 빠지기로. 그렇게 해서 저도 자연스럽게 빠져주기로(웃음) 그렇게 된 거죠.

 

김지미 :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실직이 되었는데 2000년 4월에 민변에 와서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하신 분은 누구인가요?

 

임태영 : 김연수 변호사님이시죠. 당시에 김연수 변호사님이 대전민변 사무국장님이셨고 저는 떡볶이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김연수 변호사님께서 저를 와봐라 하셔서 장사하다 말고 옷 입은 그대로 변호사님 찾아뵙고 지금 제 행색이나 여러 가지 처지가 민변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변호사님이 난처해지실 수 있을 것 같다고 제가 만류를 드렸는데 그런데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김지미 : 내가 직접 당사자로서 재판을 받아보긴 했지만 법률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변호사 단체에 와서 간사로 일을 하시기가 처음에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임태영 : 노동조합을 하면서 어떤 사건이 있을 때 변호사님들께 상담을 하면 변호사님들이 아직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판례가 없다. 재판으로 가면 어려울 수 있다. 이런 대답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서비스직은 일요일에 근무를 하잖아요. 취업규칙에는 일요일이주휴일로 되어 있고. 그리고 월요일에서부터 금요일 사이에 대체 휴무를 하라고 하는데 왜 할증임금을 안 주는가. 할증 임금을 달라. 이 문제에 대해 95,6년 때에는 노동청에서도 되게 머리 아파했습니다. 대체휴무를 한 거는 100%임금을 공제하고 주휴일은 150%할증을 해서 줘야 되는데 어차피 한 달에 4일 쉬는 건데, 그런 소송이 한 번도 없었던 거죠. 또 제 해고사건도 1심 집행유예 선고가 나고 항소를 했는데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는 형사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해고사유로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변호사님! 아니 무죄추정 원칙이라며요. 해고당하든 징계당하든 대법원 판결까지 나고 난 후의 문제 아니냐 그랬죠.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당시만 해도 되게 어둡게 대답을 주셨어요. 그래서 몇 가지 건들은 나홀로 소송으로 많이 했드랬어요. 그래서 성과를 본 것들이 아까 말씀 드렸던 주휴일 부분이라든지 부당노동행위 소송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나홀로 소송을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덤벼들었고 그렇지 않은 건들은 우리 지부 회원 변호사님들이나 서울회원 변호사님들이나 이렇게 도움을 받아서 진행했던 것이고요. 그래서 민변에 오면 어떻게 하나 이거 큰일났다 하는 두려움이 덜했던 이유가 그런 도전정신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김지미 : 민변에 처음에 와서 주로 하셨던 일은 어떤 건가요?

 

임태영 : 우리 민변 대전충청지부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김연수 변호사님, 정덕진 변호사님 이렇게 여러분들께서 생활법률 상담소, 노동법률 상담소, 가정법률 상담소 이렇게 3개의 법률상담소를 운영하고 계셨어요. 간사들도 각 상담소마다 두 명씩이나 두고 6명에 대해 인건비를 소수 변호사님들이 다 감당했던 겁니다. 일상적으로다양한 것들을 교류하고 지원을 받았죠. 그런데 노동조합사건들이 구속사건, 해고사건 같은 조금 센 사건으로 가면서 상담소가 활용되기 보다는 변호사님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그리고제가 민변에 올 당시에는 이게 통합 돼가지고 간사 2명으로 줄어 있는 거예요.

 

초기 3년은 공부를 하느라 좀 고생을 했어요. 오히려 15년 째인 지금이 조금 더 게을러져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잘 안되어 있던 때라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질문을 전화로 하면 답을 팩스로 보내준다던지 생활법률이라는 두꺼운 책자를 내준다던지 요런 정도 였어요. 모르다 보니까 자꾸 찾아봐야 되잖아요. 찾아보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 저 사람이 뭘 요구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듣는 시간이 길어져요. 첫 번째 강점이었죠. 듣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 그러고 찾아보고 그것을 말로 설명해주려 하니 너무 제 준비가 안 돼서 그 정보를 복사하거나 출력물로 그 사람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밑줄 쳐줄 것 쳐주고 요렇게 해답이 나와 있는데 절차가 어떻다. 오히려 상담 초창기에 몰라서 준비하는 기간이 길었고 그게 내담자들에게는 더 풍족한 서비스였던 것 같아요.

 

김지미 : 내가 어떤 상담을 하러 가면 그곳에서 해결책을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지고 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왔는데 아 제가 좀 알아봐야해서요 그러면 왜 즉답을 안해주느냐 이런 불만도 있었을 것 같아요.

 

임태영 : 네. 간혹 그런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는 내담자들이 더 좋아합니다. 상담원이 전혀 모르면서 찾아주겠다 요런 대답을 설마 하랴. 이런 생각이 하나 있을 거고, 그 다음에 아 저 사람이 어느 정도 여지들을 찾아보느라고 좀 더 시간을 달라고 하는 거구나. 나한테 설명을 잘 해주려는 모양이구나. 뭐 이런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이 사실은 더 많아요.

 

김지미 : 저도 변호사지만 법률상담 들어오면 굉장히 긴장되거든요. 법률상담이라고는 하지만 분야가 워낙 다양한데 전문적으로 법률지식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을 시작하기가 굉장히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아까 공부를 3년 정도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좀 알려주세요.

 

임태영 : 주로 사례집 공부했고 그리고 나머지 절차 부분은 법원에서 나온 책이 있더라고요. 한 열다섯 권짜리. 돈도 한 2-30만원 하는 것 같던데. 그걸 사놓고 나니까 끔찍한 거예요. 그걸 언제 다보나.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걸 다 못 봤어요. 볼 수가 없죠. 일부러 무슨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서 보따리 싸고 공부하는 게 아닌 이상. 그런데 이걸 가장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몇 년 안가서 찾았어요.

 

김지미 : 아! 그게 뭔가요? 비법을 알려주세요(웃음)

 

임태영 : 깊이 있는 부분은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잘 모릅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거예요. 하지만 놓여진 처지나 상황을 저한테 이야기 하시면 제가 안 되는 부분은 우리 회원 변호사와 상의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피해가는 방법인데 그 분들 되게 좋아해요. 상담원이 일방적으로 이래서 저래서 안 돼요, 이래서 저래서 돼요, 이렇게 하는 것 보다 모르는 부분을 솔직히 말하고 이 부분은 변호사와 상의해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듣는 대답은 변호사의 대답을 듣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법률 상담원이 최소한의 소양은 갖춰야 하겠지만 우리 변호사님들처럼 깊이 있게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김지미 : 그래도 이거는 내가 좀 전문분야다 하는 게 있을까요? 노동?

 

임태영 : 아, 그렇진 않고 오히려 호적사건이..가사사건 중에서 특수하게 호적 사건을 좀 더 공부 하게 된 이유는요. 예를 들어서 친생자확인이라든지 친생자부존재라든지 그 다음에 개명이라든지 그 다음에 출생 연월일이 잘못돼서 호적정정을 해야 한다던지 이런 것들이 과거 법무사 사무실이나 이런 데서도 복잡하기만 하고 돈도 많이 받을 수 없고 그래서 기피사건이었나봐요. 그러다보니 민변으로 찾아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민변에서도 우리도 잘 몰라요 이래버리면 안되니까. 그렇다고 그런 사건을 변호사 선임해서 몇 백씩 주고 하라고 하면 불가능하고. 그러다보니 사무처 상담소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사안들이었죠. 그래서 한 10년 전에는 호적 사건들을 많이 했어요.

 

김지미 : 그것도 공부를 많이 하셨겠네요.

 

임태영 : 네. 호적사건 같은 경우는 취지 쓰는 게 많이 힘들더라고요. 책 가지고 공부가 될 수도 없고. 그런데 나홀로 소송의 강점이 정말로 창피할 정도로끄적끄적 써서 내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형식이 갖춰지면 판사들이 교통정리를 해줘요. 청구취지도. 이 사람하고의 친생자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친아버지 밑으로 호적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또는 성본을 창설해야 하거나 이런 상황에서 어떤 호적을 먼저 말소하냐가 맨 마지막에 받는 호적이 깨끗할 수도 있고 조금 지저분해 질 수도 있고 이렇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팁들을 오히려 재판부가 많이 줬어요. 청구취지를 이왕이면 이런 식으로 변경할 것을 고려해 볼 것. 보정명령이 요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나홀로 소송하시는 분들은 판사로부터 보정명령이라는 형식을 갖춘 조언을 들을 수도 있어서 오히려 강점이 있었어요.

 

김지미 : 이걸 실무로부터 배워야 체득이 되는 건데, 이런 거는 사실 변호사라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보면 임간사님이 이런 사건에서는 왠만한 변호사보다는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임태영 : 글쎄요. 과찬이세요.(웃음)

 

김지미 : 아까 초창기에 강점이 내담자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만 해서 이야기를 깊이 있고 길게 들을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처음에는 또 자존심이나 고집이 매우 세다는 말씀도 하셨고. 직업상, 환경상 남의 이야기를 쭈욱 들어야 하는 그런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그런 면에서도 성격이 조금 바뀌었을 것 같아요.

 

임태영 : 네. 많이 차분해지고 조금 더 온순해지고, 제가 볼 때 부적응 환자에서 적응하려고 하는 요런 식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웃음)

 

김지미 : 저희도 민변에 있다 보면 상담전화가 와요. 그 중에는 정말 도와드리고 싶은 사건도 있지만 대체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사건들도 있거든요.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 귀의 도청장치 사건’같은 것들인데 국정원이 자기 몸에 생체실험을 하고 있고 자기 귀에 도청장치를 심어놨다 이런 식의 허황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도 꽤 많은데 상담을 10년 넘게 쭉 해 오셨으니까 그런 분들도 당연히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어떻게 대처하세요?

 

임태영 : 잘못 대처한 사례를 소개해 드리면(웃음) 천안에 계시던 여성분이었는데, 그 여성분이 실지로 외계에서 뭔가 다 알 수 있는 작은 칩을 자신에게 박아 놨다고 인식을 하시는 분인데 그 집안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의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천안이니까 내담을 안 하시고 주로 전화상담만 했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이분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안할 테지. 이렇게 생각해서 정말로 도청이 의심스러우면 서울 용산상가나 이런데 가면 그걸 탐지해주는 곳이 있으니까 정 잠이 안 오면 그것도 방법이다, 해서 그 도청장치를 찾아낸다던지 이러면 고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고소가 어려운 것 같다. 이미 동일 사건으로 지역 경찰서에 하도 많이고소를 해서 경찰관들도 기피하는 그런 분이셨기 때문에 저희가 돕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닌데, 정 잠이 안 오면 그런 방법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1달 있다가 전화가 오는거예요. 임간사님, 임간사님 말 믿고 150만원 들여서 했는데 이 놈들이 탐지하기 전에 도청장치를 다떼놨다가 다시 붙였어요.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 생각을 못한 거죠. 이 분은 어느 경우든 의심을 할꺼라는 생각을.. 그래서 제가 놀라서 정말로 하셨어요? 150만원이나 들여서? 죄송해요. 그것을 하라고 가르쳐 드리는 게 아닌데 그랬더니 그 분 대답이 더 웃겨요. 하고 나니까 시원은 하대요.(웃음)

 

김지미 : 아니 뗐다가 다시 붙였는데 뭐가 시원할까요(웃음)

 

임태영 :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조사하면서 밥값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도청장치를 감출만한 곳을 몇 군데 알려주고 갔대요. 그래서 앞으로 요런 요런 곳만 점검하세요. 이런 걸 알려 줬나봐요.

 

김지미 : 그래서 그 분은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안오나요?

 

임태영 : 지금도 가끔씩 와요.일상이 됐나 봐요.(웃음) 인터넷통해서 보면 그런 피해자 모임이 전국적으로 몇 만명 된대요 카페도 만들어 활동하고 그래요.

 

김지미 : 그런 분들이 꽤 많잖아요, 그때 그때 어떻게 대응하는지 너무 궁금해요. 상담을 주업무로 하고 계시니까 전화를 끊을 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임태영 : 듣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상담원이 변호사님하고는 또 차이가 있는 게 상담원들한테 더 막하거든요. 빨리 끊자고 이야기 하면 매일 전화해서 괴롭히기 때문에 그건 오히려 더 바보 같은 방식이에요. 보통 1시간 상담하는 것은 기본이죠.

 

김지미 : 그러면 다른 업무를 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아요?

 

임태영 : 처음에는 주로 야간에 했어요. 상담을 하면서 서류를 작성하고 이거는 더 어려운거라 상담이몇 건 없어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상담이 계속 있으나 드믄드믄 있으나 어느 경우든 뭔가 서류에 집중하는 작업은 낮 시간대에는가능치 않더라고요. 오히려 저녁때나 주말시간으로 미뤄서 처리를 했고요. 낮에는 편하게 놀면서 상담이나 하자 이런 마음으로 해요.

 

김지미 : 민변 대전지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까 상담게시판이 주 역할인 것 같아요. 민변 대전지부는 역사적으로 상담부터 시작을 했던 곳이어서 법률상담, 민생상담을 주력 사업으로 하고 있는 건가요?

 

임태영 : 네. 사이버 상담은 한 달에 한 두 건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아요. 사이버상으로 글을 써서 물어볼 정도가 되면 인터넷으로 대충 다 찾아볼 수 있는 분들이거든요. 인터넷으로 질문할 수 없는 분들이 더 많고 그래서 주로 사이버 상담보다는 전화 또는 방문상담 요런 게 좀 더 많죠.

 

김지미 : 전화나 방문상담이 와서 이게 법률적 구조가 필요한 사건이다 라고 판단이 되면 대전지부 회원분들이 역할을 나눠서 하시는 건가요?

 

임태영 : 네. 주로 저희가 결정을 해놓은 사건들은 노동사건, 가정폭력사건, 이주노동자, 이주여성사건, 성매매, 성폭행 사건, 그 다음에 형사사건 중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특수한 영역만 정해 놨어요. 나머지 일반사건으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있고 또 억울함을 가진 사람이 있을 텐데 이걸 다 우리가 구조하기로는공식적 결정을 못했어요. 내부적으로는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구조에 준에서 회원변호사님들이 맡아 달라 이런 식으로 호소해서 배정을 하는 형편이고요. 간혹 예를 들어 땅을 뺏겨서 억울하다든지 하는 사건은 소유권분쟁이 되는 거잖아요. 이걸 과연 민변이 해야 되는 거냐, 이 조차도 사실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번외로 사무처에서 상의해서 요건 좀 우리가 도와주자 이런 사건들이 가끔 있죠. 많지는 않습니다.

 

김지미 :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별의 별 사연들이 다 있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자신의 삶도 돌아보게 되는 효과도 있지요?

 

임태영 : 상담하면서 항상 느끼는 부분인데요, 사실은 내담자들로부터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위로받는 부분들이 있는데 오히려 제가 많이 부족해서 이것들을 제 것으로 온전히 녹여낼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좋고 이 일이 제게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김지미 : 저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곳은 ‘민생네트워크 새벽’의 사무실인데요, 임간사님은 ‘새벽’의 출범부터 함께 하셨죠? 새벽의 출범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임태영 : 지금은 공식 이름이 사회적협동조합 민생네트워크 새벽입니다. 이름이 조금 바뀌었어요. 2004년도 쯤에 통합도산법이 제정되면서 개인회생제도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처음 파산회생 관련해서 상담을 해봐야 되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2004년도만 해도 파산이나 회생을 권유하면 내담자들이 저를 혼내고 가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빚을 안 갚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지금 어려워서 이 위기를 잠깐 모면할 수 있는 법률적인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다 그러면서요. 그런데 그 분들의 빛이 최소한 억대 이상 되니 변제기간을 몇 년 유예해 준다고 해서 특별하게 새로운 경제적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니까 영원히 못 갚을 텐데, 그래서 파산이나 회생을 권유했던 건데 아직 그러한 인식들이 우리 저소득층한테 없었던 거예요. 우리 국민들이 되게 착한 거죠. 제가 상담하면서 자주 드리는 말씀이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에이 빚을 잔뜩 져서 망해버려야겠다, 아니면 기초수급자가 돼서 나는 평생 월 40만원씩 받으면서 편하게 일 안하고 살아야지, 나는 장애인이 돼야지 그러면 일 안해도 될 거야.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어요? 그렇지 않고 대체로는 돈을 무지하게 많이 벌어야지 하는 꿈을 가지고 갖은 노력을 다했을 텐데 안 되고 오히려 빚만 늘은 거 아니겠어요. 그런 처참한 결과 속에서도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을 하니 세상에 우리 국민처럼 착한 사람이 없다. 오히려 은행이 망하고 위기가 되면 몇 조원씩 공적자금 투입해서 도와주면서.’ 이거였어요.

 

2004년도에는 상담원의 역할이 내담자의 경제적인 처지를 도와주느라고 좀 애먹었던 시기였어요. 그래도 노무현 정부 때는 파산회생의 인용률을 좀 높혀 주려고 노력을 했고, 그런 것이 좀 홍보도 됐어요. 그래서 파산회생이 옛날보다는 조금 더 당당한 권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속에서 지금 새벽의 대표이신 김철호 목사님, 당시 민주노동당의 파산회생 상담역할을 했던 한분, 우리 회원이신 이종명 변호사님,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각자 개인플레이 하지 말고 모아서 해보자 해서 2010년도에 이 사무실을 얻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혼자 민변의 무료법률구조센터에서 할 때는 1년에 10건에서 20건 정도 밖에 못했거든요. 그런데 모아서 새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해보니 1년에 100건씩 하게 되더라구요. 활동했던 상담원들도 공이 있는데, 이종명 변호사님께서 그거 다하느라고 애 좀 먹으셨죠.

 

김지미 : 그러면 초기 상담부터 시작해서 실체 파산 신청서의 작성까지 다 무료로 해주시는 건가요?

 

임태영 : 네. 그렇죠.

 

김지미 : 요새 법무사 변호사도 파산 개인회생 광고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 일이잖아요. 내가 돈이 없어서 파산 신청해야 하는데 돈 내고 해야 하는 좀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무료로 해주신다고 하니까 호응이 좋았을 것 같아요.

 

임태영 : 최저생계비 150%미만 소득자, 장애인 등등 소위 소송구조 지원제도를 통해서 변호사를 무료로 지원해 준다고 법원 스스로 광고했는데 파산신청하는 사람들 중에 150% 미만 소득자 아닌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냐. 법원이 왜 그것을 감독을 안 하냐. 이런 요구를 법원에 몇 차례 했는데요. 법원이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엔 예산문제이겠죠. 소송구조 할 예산은 조금 밖에 없으면서 광고는 마치 다 해 줄 것처럼.. 또 파산회생지정변호사제도가 있어요. 대전에서도 12명의 변호사가 지정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지정변호사들조차도 오히려 구조한다는 광고효과를 내는 수단이 되고 나머지는 다 유료선임하기 위해서 구조지정변호사가 되는 것을 선호하는 거 같아요. 실지 구조사업에뛰어들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파산 신청하는 사람이 소득이 최저생계의 150% 이상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구조지정 변호사로 지정된 사무실에서는 이 사람이 무료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최초 상담하면서부터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안내를 안 해버리고 그냥 유료로 선임을 하는 거죠.

 

김지미 : 그런데 새벽에서는 이런 파산, 회생절차를 무료로 해 주신다는 거지요?

 

임태영 : 파산회생이 소송구조의 형태로 하면 오히려 상담원들의 개인비용이 1,2만 원 정도 들어 갈 때가 많아요. 같이 모시고 다녀야하고 뭐 주민등록등본 같은 거 발급도 받아야 하고 소송구조로 가면 법원이 변호사에게한 건당 23만원씩 변호사보수료를 줘요. 그러면 10건하면 230만원이니까 한 달에 10건씩 하면 변호사 사무실 담당직원 인건비 딱 떨어지고 종이 값 빠지고 뭐 이런 셈이 되는 거죠.

 

김지미 : 파산사건 이외에 노동사건이나 일반사건은 어떤가요?

 

임태영 : 네. 노동사건도 3,4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지부가 구조할 때 받는 변호사 보수료가 110만원 정도였어요.10년 전이나 현재나 그냥 110만원. 그런데 어느 순간에 민주노총 법률원으로 가야될 사건들이 민변으로 오는 거예요. 우리 지부에 어떤 탁월한 능력이 요구돼서 온다고 하면 반가울 텐데 단지값이 싸서 오니까(웃음) 그래서 민주노총 사건은 가능하면 법률원에 가서 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랬는데 또 고집하시는 분은 계속 하시겠다고 해요. 통상임금 사건도 원고가 200명인데 그걸 110만원 받고 하셔가지고 참..

 

김지미 : 그게 각자 110만원이 아니라 총액 110만원인거죠?(웃음) 상담업무 말고 시민사회단체 연대활동이라든지 민변의 대전지부가 주로 활동하는 다른 모습들도 있을까요?

 

임태영 : 우리 회원 변호사님들이 주로 민변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대전의 시민단체들, 민언련, 여민회 같은 시민단체도 창립멤버이고 거의 집행부 내지는 대표단에 들어가 계세요. 그렇게 해서 지역활동 연계가 되고 있어요.

 

김지미 : 굳이 연대활동을 하고자 해서 하시는 게 아니라 2중 멤버쉽, 3중 멤버쉽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연대활동이 되는 거네요. 제가 언뜻 듣기로 임간사님이 대전지역의 양심수들도 후원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임태영 : 대전에 양심수 후원회라는 단체가 있었고 지금은 양심수 후원 사업은 이어가되 인권과 관련된 사업을 추가 확장해보자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명칭을 ‘인권과 나무’로 개칭해서 활동하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민변간사로서 또는 민변 차원으로 협력하고 있는 정도지요 뭐.

 

김지미 : 내년 4월이면 민변에 오신지 만 15년이 되시잖아요 민변에서 보낸 15년에 대한 소회를 말씀해 주신다면?

 

임태영 : 뭔가 활동 속으로 뛰어든 건 노동조합을 시작하면서부터인데 노동조합활동은 투쟁을 해야 해서 다소 거칠고 투박하고 현장투쟁 중심으로 생활을 했다면 민변에서는 상담활동을 통해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삶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고 그 분들의 문제를 같이 공부하면서 해결하고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해결해야 될 현안문제들이 참으로많구나 하는 공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작은 일부터 한 번 해보자 한 게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실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는가, 나로 인해서 또는 우리 사회가 발전적인 사회로 변하고 있는가 이렇게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다 라고 자꾸 자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러다보니 사실 가끔씩 민변이나 이런 활동에서 도망가고 싶은 그런 생각도 들지만 발목 잡혀서 그럴 수 없는..(웃음) 특히 노동조합 활동은 한 사업장에 들어가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그 다음에 투쟁하는 속에 결합하고 그 싸움이 끝나면 외부지원자로서의 저의 소임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는 그런 맛이 있잖아요. 그런데 노동조합 밖으로 나와 보니 서민들의 민생의 문제가 무수하게 많이 있더라는 거죠. 그런데 이 부분은 해도 해도 야 이거 정말로 답이 없구나 나 혼자 한다고 해서 이게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정책적 차원에서 뭔가 바뀔 때 비로소 가능한 문이 열리는 거구나. 활동을 하면서 희망을 가져야 하는데 사실 지금은 이렇게 회의스러운 것들이 더 많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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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 민변의 간사로 시작은 했지만 자기가 해야 하는 정해진 역할을 넘어서서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 영역도 점점 넓혀 가시고 다양한 일들을 하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나는 이런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앞으로 내 꿈은 뭐다 이런 것 좀 알려주세요.

 

임태영 : 민생상담 영역을 좀 완성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요. 민변 차원에서는 변호사단체로서 민생상담 영역을 욕심내보는 것도 좋겠다 이런 것도 있고 그 다음에 개인적으로 민간영역차원에서 민생상담 영역을 시스템화 해서 그것이 좀 완성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김지미 : 민생상담 영역에서의 완성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임태영 : 첫 번째는 상담하는 단체 기구들의 네트워크화. 시공간적으로 결합시켜 주는 것일테고요. 그 다음에는그 상담사업을 원스톱 서비스 같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리해 드리는 거. 이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러려면 결국에는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가 새벽을 통해서 ‘아,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그러면 파산사건 같이 해보자’ 해서 파산사건 해본 거예요. 해봤더니 ‘와, 이렇게나 많아? 우리 힘으로 감당이 안 되는 거 아냐? 지금 전체 대전 건수가 1년이면 한 3,000건인데 겨우 100건 했단 말이야 이거 몇 프로 한거야? 이거 우리가 별로 역할을 못하는거아냐? 그래도 처음 시작한 지 몇 년 안됐으니까 좀 더해보자. 우리가 이것을 하는 것보다 법원을 공격해나가는 게 일에 효율성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효과도 더 크고. 그래서 법원 쪽에 접촉을 시도해보자. 데모를 해볼까?’ 이렇게 했는데 파산면책하면 이 분들의 경제적인 문제가 새 출발할 수 있게 해결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거든요. 파산신청해서 면책결정 받으신 분 중에 90%는 저희하고 연락이 단절이 됩니다. 그건 또 새로운 곤경에 처했다는 거거든요. 회생신청해서 회생인가 받으신 분들은 법원 통계로 봤을 때 5년 동안 이행하는 비율이 10%가 안 된다고 해요. 파산상담외에도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취업이나 창업상담을 붙여 나가야 하는데 우리 역량으로는 아직 그것까지는 안 되는 거지요. 그러면 재무상담 영역을 붙여보자. 그래서 지금 옆에 재무상담팀이 또 들어와 있어요.

 

김지미 : 저도 파산이나 개인회생을 도와주는 게 1차적으로는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빚을 탕감하거나 면책된다고 해서 자활이나 자립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돼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문제의식 하에 재무상담 영역까지 확장하신 거군요.

 

임태영 : 지금 재무상담 전문가가 1명 있는데 1명 가지고 최소한 대전권역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냐 하면 당연히 못하지요. 단체 교육 들어오는 거 처리하기도 정신없거든요. 그래서 결국엔 인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에요.

 

김지미 : 결국은 이 문제는 사적인 영역에서 민간단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정부나 정치권이 나서서 뭔가 해결책을 도모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움직임은 전혀 없는 것이죠?

 

임태영 : 네. 2가지 의문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면 쉽게 정리가 될 수 있는데 국민행복기금에서 부실채권을 사들여서 50%만 변제하는 것으로 신용회복 시켜 주겠다고 그랬거든요. 국민행복기금에서 부실채권을 3% 금액에 사들이는데 채권을3%에 사서 47%의 마진을 붙인 거잖아요. 굳이 저것을 왜 소각을 안 하고 회수하려고 할까. 전 그것에 대한 진의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 이런 것을 구실 삼아서 국민을 더 옭죄려고 하는 거구나. 부채탕감 해주려는 진의가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3%를 국가가 내주면 그 채권을 소각시킬 수 있는데 3%에 사서 괜히 사람 끌어다가 채권회수하게 만드는. 오히려 지금 소송을 가장 많이 하는 투신사가 국민행복기금이거든요. 국민행복기금이 주식회사에요.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선전할 때는 주식회사를 빼고 국민행복기금이란 것만 광고하고 있잖아요.

 

김지미 : 마치 공적기금인 것처럼?

 

임태영 : 네. 또 하나가 대한법률구조공단이 대국민서비스로 유일하게 법률적으로 광범위한 토탈서비스를 하는 존재잖아요. 그런데 파산신청서 보시면 알겠지만 써야 할 서면이 3,40장 넘어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서비스가 그런대로 지금의 문제들을 흡수할 수 있다면 저희 새벽같은 존재가 있을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에요. 떼야할 서류가 한 30가지인데 목록 다 프린트해서 주고 이것 떼 오세요, 상담이 5분 만에 끝나는 거죠. 그러면 거기까지는 이분이 뗄 것이 겁나게 많은가보다 하고 받아들이는데 그 다음에는 30장짜리 파산신청서 내주면서 이거 써오세요 이러는 거에요.

 

애초에 그것을 쓸 줄 알면 볼펜으로 써서 직접 내지 뭘 또 타이핑 쳐달라고 공단으로 가겠어요. 답답하지요. 법원에서는파산회생지정변호사로 신규개업 변호사들을 많이 지정해주는 경향이 있나 봐요. 막 개업해서 어렵기도 하고 경험도 쌓게 해 주고 뭐.. 그런데 이 정책이라는 게 소비자를 중심으로 해야지 변호사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책이 나오면 안 되는 거잖아요. 딱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이 있는 거죠. 바로 제 자리만 잡아도 대체로의 큰 문제들은 해결이 될 텐데.. 그런 걸 민변이 소리를 내주면 좋은데 너무 소소한 영역이려나요.(웃음)

 

김지미 : 제가 임간사님을 몇 번 못 뵈었지만 볼 때마다 늘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짓고 계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게 다 15년 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겪으면서 쌓은 내공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소중한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임태영 : 저야말로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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