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노동위의 일본 기행을 추억하며
민변 노동위의 일본 기행을 추억하며
– 민변 노동위원 김수영
일본은 난생 처음이었다. 일본의 최신 노동판례와 입법동향에 관해 알아본다는 매우 학구적인 이유로도 들떴지만, 처음으로 일본에 가본다는 설렘도 상당했다. 새벽시간 공항에 모여 출발을 앞둔 소감을 나누던 중 단연 인상적인 것은 ‘이 여행을 허락받기 위해 명품 신발을 바쳐야 했다’며 쇼핑백을 들어보이던 어느 선배 유부남 위원의 장탄식이었다.
비행기가 뜨고 눈을 붙일까 했더니 이미 도착이다. 이렇게 가까운 곳인 줄 몰랐다. 왠지 아쉬웠지만 곧 말로만 듣던 신칸센을 탈 예정이어서 여전히 설렌다. 이번 교류회의 초특급 가이드를 자임하신 김진국위원님의 안내에 따라 “에키벤”을 하나씩 챙겨 열차에 올랐다. 신칸센 초특급 열차 노조미에 올라 도시락과 캔맥주를… 몹시 비현실적이다.
히로시마역 플랫폼에 왁자지껄 내렸는데, 아뿔싸 오사카노변단에 드릴 선물이 아직 객실에 있다. 이현아간사님의 지령을 받은 이용우위원이 번개같이 몸을 날려 신칸센으로 뛰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히고 열차가 떠난다. 비극적인 이별이다. 과연 이용우위원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딘가 부산 같기도 한 역 광장을 나서니 오옷~! 노면전차다. 낭만적인 전차에 몸을 싣고 나니 이용우위원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알아서 잘 돌아 오겠지 뭐. 전차는 우리를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내려주었다. 원폭을 맞고 앙상한 뼈대만 남겨진 돔 건물을 시작으로 꽤 넒은 공원이 펼쳐진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공원을 거닐며 평화롭기 그지없는 햇살을 즐겼다. 공원 내 평화 기념관에는 원폭 당시의 비극적인 모습이 전시되어있다. 탈핵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시간이다. 위원장님과 함께 온 아들 유겸군이 진지한 자세로 원자물리학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과학자가 되려나.
기념관을 보고나니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분께서 열정적으로 공원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신다. 몇 시간째 공원 이곳저곳을 누비며 원폭의 참혹한 피해에 관해 듣고 있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활동가분의 바로 앞에서 눈빛 반짝이며 듣고 있던 고윤덕 변호사님의 고개가 크게 끄덕인다. 새벽 비행기로 일본에 와 저녁까지 탈핵의 결의를 다지고 있자니 적잖이 피곤한 게 사실이다. 다행히 기념관으로 잘 찾아온 이용우위원도 오는 길이 힘겨웠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둘째 날의 열정 가득했던 세미나와 훈훈하던 교류회는 김진위원의 후기가 있으니 넘어가자. 단언컨대 놀다온 것만은 아님을 세미나 후기를 통해 확인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짧은 지면이니 지금은 셋째 날 방문했던 미야지마섬(宮島)에 관해 말해야 한다. 환상의 섬과 같던 그곳. 일본인다운 장인정신의 발현으로, 일정량이 팔리면 문을 닫아버리고 모두가 저녁이 있는 삶을 살던 그곳. 덕분에 굴카레빵을 먹어본 자와 못 먹어본 자로 운명이 갈리던 잔혹한 섬. 뿐만 아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신사의 아름다움과 작은 상가 골목에 어스름이 질 때의 풍경, 섬 중앙에 자리한 웅장한 원시림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아기자기한 케이블카와 오래되었으나 단아한 멋을 풍기던 여관까지. 섬 전체가 큰 목소리로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 외치는 것 같았다. 나는 물론 민변을 사랑한다. 그러나 연인과 함께 왔어야 했다는 한탄을 한 것은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넷째 날 기행은 팀이 나뉘었다. 후쿠오카 시내와 맥주공장을 찾아 나선 도시팀과 일본의 3대정원이라는 오카야마현 소재 고라쿠엔(後樂園)을 찾아 나선 전원팀. 도시팀도 나름 즐거웠겠으나 고라쿠엔 한 가운데 자리한 연못 위 전통가옥에 앉아 진한 녹차와 모찌를 음미하던 시간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고라쿠엔 정원은 봉건영주의 악취미가 만들어낸 공간이었겠으나 이제는 800엔으로 그 때 그 악취미를 희화화 할 수 있다. 특급 가이드를 해주신 김진국위원님을 이 자리에 모셔야 하지 않겠냐는 김준우위원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호방한 웃음으로 함께해주시니 그 모습이 어딘가 계몽군주 같은 느낌이다. 최근 연달아 시를 발표 중이신 위원장님의 시 한수가 곁들여졌다면 더욱 멋졌을 텐데.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의 공기는 차가웠다. 찬 공기만큼 황당한 현실도 기다리고 있었다. 민변 내에, 부당한 정치권력의 하수를 자임하는 공권력의 도발에 맞선 결기가 날카로운 시점이다. 큰 싸움을 앞두고 짧게나마 아름다웠던 시간을 함께 되새기며 잠시 호흡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기행문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