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언론사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하다
그러고 난 며칠 뒤, 민변 언론위원장이던 필자는 당시 민교협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서울대 강명구 교수님(언론정보학과)으로부터, 정현백 교수님에 대한 ‘북한 장학금 교수’ 운운 보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 뵌 정 교수님은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북한 장학금에 관한 질문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단지 재독학자 김용무와 관련된 내용을 조사받았는데 모두 해명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북한 장학금’과 관련하여서도 정 교수는 197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76년 독일 에큐메니칼 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77년 독일로 유학을 가 그때부터 1984년까지 독일 보쿰대학에서 공부하여 1984년 6월 「혁명과 개혁사이에서의 노동자 문화운동」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수여받고 1984년 7월 귀국하여 1986년 2월까지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교수로 재직하다 1986년 3월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교수로 전직하여 재직해 왔는데 유학 비용 일체를 독일 정부의 장학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았다는 것이다.
독일 개발원조처가 그 재정을 절반 이상을 지원하는 에큐메니칼 재단은 왕복 항공권, 체류기간 동안의 생활비, 심지어는 귀국 때의 이사비용과 박사논문 출판비용까지도 부담해 주었는데 ‘북한 장학금’ 보도라니 하면서, 정 교수는 사실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1면 머릿기사로 뽑고, 또 왜곡된 보도에 대해 정정할 줄도 모르는 언론의 부도덕성에 몸을 떨었다.
그는 앞으로 ‘북한 장학금을 받은 교수’라는 낙인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식인을 옭아매는 국가권력과 언론의 합작품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반복될 것이 두렵다고 하였다.
필자는 즉시 언론위원회를 통해 오보 내지 허위보도를 한 모든 언론사에 대해 먼저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최영도 변호사님, 송두환 변호사님, 김기중 변호사와 변론팀을 꾸렸다.
1994년 10월 24일경 언론중재위원회에 KBS, MBC, SBS 등 방송 3사와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 중앙일간지 6곳 등 모두 9개의 언론사를 상대로 정정보도신청을 제기하였다.
그 중 MBC와 신문사 6곳과는 다소 미흡하기는 하지만 적절한 선에서 정정보도를 받아내 타결이 되어 지면을 통해 정정보도가 이루어졌다.
KBS, SBS를 상대로 법원에 정정보도청구 소를 제기하다
그런데 KBS와 SBS는 끝까지 정정보도를 거부했다.
방송에서 정 교수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균관대 정현백(사학과)교수”라는 자막과 함께 이름과 나이, 주소, 직장 등을 명시한 MBC와 달리 ‘서울 모대학 정모 교수’라고 방송하였다거나(KBS), ‘서울 대학 교수’라고만 방송했다는 것이다(SBS).
즉, 1994년 10월 6일 방송한 KBS-1TV의「KBS 9시뉴스」에서는 <北장학금 교수조사>라는 제목(크로마키)하에
“국가안전기획부는 오늘, 서울 모대학 정모교수 등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연행해서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장학금으로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된 사람이 있다는 지난 8월 서강대 박홍총장의 발언과 관련을 해서 그동안 10여 명의 대학교수들을 내사해왔다고 밝히고, 유학시절에 북한과의 접촉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 교수들은 연행해서 조사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라고 보도하였고,
같은 말 방송된 SBS의 「8시뉴스」에서는 <북 장학금 교수> 구속이라는 제목 하에 [혐의] 밀입북 등, 친북한 활동여부, 북한장학금 수령여부라는 자막을 함께 박홍 총장의 1994. 7. 19.자 기자회견을 자료화면으로 비추면서 국가안전기획부는 현직 대학교수 2명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보도내용에서 성명이나 초상 등을 통하여 특정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도내용 자체로서는 보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경우에도, 언론기관이 당해 보도를 하기 위하여 취재한 내용 등과 당해 보도의 내용을 대조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에 당해 보도가 그 사람에 관한 것으로 명백히 인정되는 때에는 피해자가 특정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우리 측의 주장을 두 방송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언론중재위원회에 KBS 측의 대리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심지어 자기 얼굴(입장)을 봐서라도 신청을 취하해 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필자를 아연실색케 하였는데 그는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포항남ㆍ울릉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형태 당시 사회부 차장이었다.
그는 필자가 KBS 시청자위원으로 활동하던 2002년경 시청자위원회 업무를 담당하는 시청자센터의 주간으로 발령받아 어색한 조우를 하기도 했다.
결국 KBS와 SBS가 끝까지 정정보도를 거부하므로 필자는 1994년 11월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현재는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정정보도청구 소를 제기하였다.
재판은 비교적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쟁점은 여전히 ‘피해자 특정 여부’여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마침내 1995년 2월 20일 재판부(제5민사부, 재판장 김용주 부장판사)는 KBS(94카합 3123호 정정보도심판청구)와 SBS(94카합 3122호 정정보도심판청구)에 대해 정정보도문을 방송하라고 판결하였다.
사상 최초로 메인 뉴스 첫머리에 정정보도를 한 KBS와 SBS
결국 KBS는 이 판결이 송달된 다음날인 2월 24일에 메인 뉴스인 「9시 뉴스」 첫머리에서
“한국방송공사는 1994. 10. 6. 9시 뉴스에서 ‘북 장학금 교수조사’라는 제목하에 서울 모대학 정모교수 등이 박홍총장의 북한장학금 교수 발언과 관련해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하였으나, 당사자인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정현백교수는 1976년 독일 에큐메니칼 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을 한 것일 뿐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적이 없어 박홍총장이 말한 북한장학금 교수와는 무관하며 안기부 수사과정에서도 북한장학금 수령여부나 친북활동 등에 관한 조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반박해 오므로 이를 시청자 여러분께 밝혀 드립니다.”라는 정정보도문을 방송하였다.
[KBS 9시 뉴스(1995년 2월 24일) 첫화면]
[KBS 9시뉴스(1995년 2월 24일) 정정보도문 방송]
같은 날 SBS도 「8시 뉴스」 첫머리에서 거의 같은 내용의 정정보도문을 방송하였다.
한국 방송 사상 메인 뉴스의 첫머리에 정정보도문이 방송된 것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원 보도가 첫 머리에 보도된 것이 아닌데도 법원은 이례적으로 정정보도를 첫 머리에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자 KBS는 이 판결이 부당하다면서 항소 및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즉, 대법원 1996. 12. 23. 선고 95다37278 정정보도 판결은 KBS 보도에 정현백 교수의 실명을 밝힌 적이 없으므로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KBS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방송법(1995. 12. 30. 법률 제5145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41조 제1항이 정하는 ‘방송에 공표된 사실적 주장에 의하여 피해를 받은 자’라 함은 그 보도내용에서 지명되거나 그 보도내용과 개별적 연관성이 있음이 명백히 인정되는 자로서 자기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그 보도내용에 대한 반론 내지 반박을 제기할 이익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당원 1986. 1. 28. 선고 85다카1973 판결 참조).
여기에서 개별적 연관성이 있는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그 보도 이후에 이루어진 다른 방송이나 신문 등의 보도내용까지 종합하여 이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아니하다 함은 논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구 방송법이 규정하는 정정보도청구권(위 법 개정으로 반론보도청구권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은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한다는 주관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방송이 사실보도한 내용과 개별적으로 연관된 사람(위 법 개정으로 국가, 지방자치단체 등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에게 방송의 사실보도 내용과 반대되거나 다른 사실을 주장할 기회를 부여하고, 이를 통하여 시청자들로 하여금 균형잡힌 여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객관적 제도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음(당원 1986. 12. 23. 선고 86다카818 판결 참조)에 비추어 보면, 비록 그 보도내용에서 성명이나 초상 등을 통하여 특정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보도내용 자체로서는 보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경우에도, 언론기관이 당해 보도를 하기 위하여 취재한 내용 등과 당해 보도의 내용을 대조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에 당해 보도가 그 사람에 관한 것으로 명백히 인정되는 사람, 또 당해 보도를 한 언론기관에서 보도내용이 그 사람에 관한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 등은 보도내용과 개별적인 연관성이 있음이 명백히 인정되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피신청인이 한 보도내용이 신청인에 관한 것임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다툼이 없는바, 그로써 신청인과 보도내용의 개별적 연관성은 명백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논지는 이유가 없다.“고 판시하였다.
이어 원 보도의 내용보다도 더 많은 글자 수의 정정보도를 명한 것도 위법하다는 KBS의 주장에 대해서는,
“방송법상의 정정보도청구권은, 방송의 보도가 개인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는 내용인 경우에 여론 형성에 미치는 방송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그 개인이 입는 피해가 참으로 큰 것이므로 이른바 무기대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피해자인 개인에게도 신속하고 대등한 방어수단을 부여할 필요가 있어 인정되는 것이므로, 구 방송법 제41조 제5항이 규정하는 정정보도문의 자수 제한은 훈시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으로서, 법원이 방송을 명한 정정보도문의 내용이 원문보도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알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에 관한 간결한 기재로 구성되어 있는 이상, 정정보도문의 자수가 원문보도문의 자수를 초과한다고 하여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며 배척하였다.
마지막으로 방송사가 뉴스 중간 시간에 원문보도를 한 데 대해 뉴스 시작과 동시에 정정보도를 하도록 명한 것은 부당하다는 KBS의 주장에 대해서는,
“법원은 사안에 따라 적절한 반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정정보도방송의 시간과 순서를 정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원심이 방송사가 공표한 내용이 “정정보도신청인 등이 북한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큰 전파가능성을 가진 것인 반면, 정정보도문의 내용은 국가의 안보와 교육, 사회 등 여러 부문에서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문보도와 같이 큰 전파가능성을 가진 것이 아님에 비추어, 방송사가 뉴스 중간 시간에 원문보도를 한 데 대하여 뉴스 시작과 동시에 정정보도를 하도록 명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하였다.
이러한 대법원 판결은 그 이후 정정보도청구사건(이후 반론보도청구사건)의 선례적인 판례(leading case)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SBS가 법원 판결에 따라 정정보도 방송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SBS는 “SBS는 8시 뉴스 첫머리에서 … 진행자로 하여금 정정보도문을 뉴스 진행보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낭독하게 하여야 한다.”는 판결에 대해 ‘저녁 8시’가 아닌 ‘저녁 7시55분’경, SBS 8시뉴스의 타이틀이 나간 다음 광고방송 직전 위 정정보도문을 방송하였고 그것도 메인 앵커가 아닌 보조앵커(여자)가 평소의 뉴스진행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낭독하는 꼼수를 썼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었다.
이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질까 두려워 필자는 SBS가 법원 판결대로 이행을 하지 않다는 이유로 남부지원에 간접강제신청을 제기했고 그 과정에서 적절한 합의가 이루어져서 이를 취하했다.
KBS․SBS의 ‘보복성 취재’ 공격
우여곡절 끝에 KBS와 SBS에서 정정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난 후 어느 날 KBS 9시 뉴스에서 갑자기 남부지원 판사들에 관한 보도가 방송되었다.
당시 남부지원이 있었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소재 남부지원(현재 서울 양천구 목동 소재)의 맞은 편 건물 옥상에서 법원에 출입하는 판사들의 차량을 촬영하여 판사들이 근무시간보다 늦게 출근하는 등 근무태도가 좋지 않다는 내용인 것으로 기억된다(방송 프로그램은 그때그때 영상물을 별도로 보존하지 않으면 이를 다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ㅠㅠ).
그들에게는 판사들이 기록을 싸들고 귀가하여 판결문을 쓴 일은 알지 못했나 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KBS가 법원에 보복한 것이라는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나중에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한 법관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법원행정처에서 KBS 때문에 적지 않게 고생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순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언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사가 불러서 ‘조지고’, 판사는 기다리게 해서 ’조진다‘면 기자는 기사로 ’조졌다‘.
공영방송 KBS가 사법부에 대해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SBS도 그냥 있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정방송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검찰 출입기자이던 문화일보 이00 기자(후에 동아일보로 전직)가 어느 토요일 필자의 사무실로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당시는 토요일 오전 포함 주 6일(44시간) 근무하던 때였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 기자는 다짜고짜 내 은행통장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먼저 통장을 보여 달라고 해서(그 때는 인터넷 뱅킹이 도입되기 전이었다) 부끄럽지만 마이너스 통장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방금 전에 서울지검의 어느 검사실에 들렀더니(그 때는 서울중앙지검으로 개칭 전이었고 지금처럼 출입이 까다롭지 않았다) SBS의 모 기자가 검사에게 정현백 교수는 정정보도 소(간접강제)를 취하하고 싶은데 필자가 수임료를 수천 만 원이나 받아 만약 소를 취하하게 되면 필자가 거액의 수임료를 돌려줘야 해서 억지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안 변호사가 그런 사람이 아닐텐데 하면서도 이를 직접 확인해 보려고 필자를 찾아와서 통장부터 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4명의 민변 변호사가 9건의 언론중재신청과 2건의 소송 수행을 수행하면서 받은 수임료는 무능하게도(!) 건당 30만 원도 안 되었다. SBS는 추후 정 교수에게 이 돈을 물어주어 정 교수가 지급한 수임료가 얼마인지를 잘 알게 되었다(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으면 차라리 거액의 수임료를 받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ㅠㅠ).
그러면서 필자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도 은행에 가서 살펴봤고, 서초세무서에 가서 소득세 신고내역도 알아 봤더니 룸싸롱 등 술집을 드나들거나 골프를 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아직 금융실명제나 과세정보 비밀보호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기자들은 ‘요령껏’ 금융정보나 과세정보 그 외 개인정보 등을 수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필자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 이전까지 필자는 법조 출입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법조계 특히 검찰의 수사발표에 대해 법조인 특히 재야 법조계의 입장을 취재하여야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고 취재의 방향 등도 정하고 사건의 다양한 의미도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변론활동을 하고 검찰․법원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필자에게 취재요청을 자주 해왔다.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필자로서도 언론을 통하여 검찰의 정치지향적인 수사를 비판할 수 있어서 유용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거의 모든 언론을 상대로 일거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청구하자 순식간에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언론사나 기자들로부터 집단 왕따(?)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본의 아니게(?) 언론사를 상대로만 하는 변호사가 되어 버렸다.
당시 고영구 회장님 등은 언론에서 필자를 죽이려고 하면 먼저 죽이는 게 낫다며 필자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는 언론사 쪽을 대리하려는 변호사는 많이 있어도 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언론사를 상대로 하는 소송을 대리하려는 변호사는 거의 없었다. 언론사 쪽 대리인을 보고 오죽하면 ‘생명보험’에 가입했다(언론사로부터 공격을 받을 염려가 없어졌다는 의미로)는 우스개 소리가 유행했을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보도 피해자 측(주로 원고) 대리만 하게 되니 희소가치가 있어서인지 으레 필자를 찾아오게 되어 비록 돈은 많이 벌지 못하고 몸은 힘들지만 언론 소송의 전문성을 제고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는 필자와 소송을 한 상대 언론사의 기자들도 막상 자신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필자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이 사건 이후로 필자는 본격적으로 시민언론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언론으로부터의 취재요청도 사그러들었고, 필자 입장에서도 명색이 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시민운동을 한다는 놈이 언론에 출연하여 또는 언론을 이용하여 시민운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들과의 관계는 끊겼지만 아직도 우의를 나누는 기자들도 있어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주사파 발언의 후유증 … 매카시즘의 시작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공안검찰까지 당황하게 한 박홍 총장의 이른바 ‘주사파’ 발언은 ‘주사파’의 이름만 걸면 누구든지 단죄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실상을, 레드 콤플렉스의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 보도를 기호학을 토대로 박홍 총장 발언 자체의 담론과 이에 대한 언론 담론을 분석한 백선기 교수(당시 경북대 신방과, 현재는 성대 신방과)는 한국기호학회의 <문화와 기호>(문학과지성사)라는 논문집에서(1995년 간), 박 총장의 담론이 표출된 계기를 준 것(발송인)은 ‘대통령과의 오찬’인데, 이 모임이 담고 있는 상황이 친정부적이라는 의미가 있어, 여기서 행해진 담론들의 성격을 규정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담론에 대한 협조자로는 ‘주사파에 대한 강력 촉구’를 표시한 김영삼 대통령과, 주사파들의 과격 행동을 지적하고 ‘정부가 이들을 힘으로 다스려줄 것’을 제안한 대다수 대학 총장들이며, 이 담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수혜자)은 주사파 척결과 운동권 세력 약화, 대학 안정화 등이었다는 것이다.
서울신문·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등 4개 신문의 보도 경향에 대해 백 교수는
박 총장의 발언 행위를 ‘용기 있는 행위’ ‘바람직한 지성인의 행위’ ‘결단에 찬 행위’ ‘시대적 욕구의 표현 행위’라고 규정함으로써 그의 발언 내용 자체를 믿었던 반면 한겨레신문은 이 발언이 ‘편견과 무지의 행위’ ‘무책임한 행위’라고 규정하고 증거 부족을 내세워 발언 내용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행위가 나타나게 된 배경과 의도에 대해 주목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박 총장 발언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는 증거 부문에 관하여 백 교수는 4개 신문이 1차적으로 검찰이 제시한 ‘한총련과 이북 단체들과의 팩시밀리 교환’ ‘북한 구국의 방송 녹취문’ 등으로 충분하다고 하고, 2차적으로는 박 총장 발언이 ‘체험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으므로 증거를 대는 것은 ‘인격적인 모독’이자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 반면 <한겨레신문>은 주사파가 북한의 지시 및 지령을 받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주장했으며, 팩시밀리 교환이나 구국의 방송 녹취문 정도로는 ‘지령 및 지시’를 받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항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따라 백 교수는 박 총장 발언의 담론 주체는 박 홍 총장이자 이에 대한 신문의 부각이고, 대상은 ‘주사파 존재의 확인’ ‘주사파와 친북파의 연계’ 및 ‘주사파 척결’을 들 수 있다고 파악했다.
결론적으로 백 교수는, 박 총장 발언은 그 발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도 있지만 그의 발언과 관련된 우리 신문들의 보도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되었는데 “우리 신문들은 박총장 발언과 관련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일반 보도 원칙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입장 및 관점에 따라 편향되고 불균등하게 보도하였고, 나아가 자신들의 시각이나 관점을 반영하거나 관철하고자 노력했다”고 결론 맺었다.
한편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2014년 5월 한국역사연구회 주최로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 역사에서의 매카시즘’ 학술회의에서 ‘현대사에서 매카시즘: 탈냉전 이후 매카시즘의 부활’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미국과 서구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냉전의 시작과 함께 나타난 것과 달리 한국 현대사에서는 탈냉전 이후, 즉 1987년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나서야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교수는 1994년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 파동’을 한국 사회 매카시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1994년 파동부터 2012년 매카시즘의 결정판이던 <종북백과사전>(조갑제닷컴)까지 이런 주장이 한국 사회에서 40%가 넘는 구성원들로부터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매카시즘이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매카시즘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홍의 매카시 광풍은 단지 정현백 교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통신(KT)노동조합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