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적부심 재판에서 선거 부정을 낱낱이 고발하다!
드디어 1992년 4월 22일(수) 오전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재판장 홍순기 소령)에서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다.
이 날 재판에는 이 일병의 어머니 등 가족들과 이지문 중위의 부모, 1990년 기무사 민간인 사찰디스크 폭로로 수배중이던 윤석양 이병의 어머니 민인숙 씨, 유가협과 민가협 회원들, 민주당 관계자, 국방부 출입기자 등 40여 명이 방청했다.
재판은 군검찰이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에 기재된 선거부정 사실을 인정하느냐는 짧은 신문을 하고 이에 대해 피의자는 그 사실 자체는 모두 시인한다고 한 다음 변호인의 반대신문으로 이어졌다.
9사단에서 이지문 중위의 구속적부심 재판을 할 때에는 변호인으로 선임된 민주당 소속 장석화 변호사가 군사법정에서 헌병들에게 강제로 퇴정을 당한데다가 이 중위가 한 양심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사하고 그 동기 부분조차 신문을 제지당하여 끝내 묻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끝나 버린데 비하여 이원섭 일병의 구속적부심 재판은 약 2시간 10여 분에 걸쳐 별다른 무리 없이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법정에서 이원섭 일병은 국방부의 발표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선거 부정사실을 폭로하였고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자신이 겪은 군 부재자 선거 부정사실을 제보하게 된 배경과 과정, 동기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혔다.
원래 중대 소속 서무병으로 근무하던 이 일병의 업무는 중대의 행정지원이었는데 중대 간부들의 ‘가라’(허위) 야근수당 등을 챙기는 업무도 했다며 군 내부에 만연해 있던 비리도 지적했다.
그의 소속 중대는 1992년 3월 16일(월)부터 3월 20일(금)까지 부재자 투표하였는데
그가 3월 16일 대대 인사과에 전화로 소속 중대에는 천막도 없고 인주도 없는데 어떻게 투표하느냐고 보고하였으나 묵살당했다고 한다. 결국 소속 중대에서는 투표소도 따로 없었고 기표대에 천막도 설치하지 아니한 채 투표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기무대에서 매일 전화가 왔었고 투표 직전에는 자주 중대 행정반으로 찾아왔다면서 대대장이 정신교육도 실시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중대 인사계인 상사 조00는 중대장에게 현지에 가서 투표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중대장은 대대 인사과장이 전화로 해도 된다고 말했고, 그러자 인사계는 3월 17일 39사단 창원통신소장과 휴가자는 대신 다른 사람이 찍도록 하겠다고 통화했다고 밝혔다.
3월 18일(수) 오후 4시 반경 대대장이 중대장에게 모종의 전화 지시를 하자 그 직후 중대장은 이 일병에게 일직사관과 함께 사병들의 투표성향, 여야 득표비율을 알아보라고 지시하므로 이 일병은 내무반을 다니면서 십 수 명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무기명으로 여야로 구분하여 모의투표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야당 지지표가 약 75%로 나타나자 중대 일직사관인 중사 최00이 이 일병에게 이렇게 보고하면 중대장님이 걱정할 테니 50:50으로 보고하자고 하여 같은 날 오후 8시 반경 최 중사가 중대장에게 전화로 위와 같이 보고하자 중대장님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며 꼼꼼하게 보고를 받았다고 이 일병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날 오후 4시 반경 중대 소속 정00 중사가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2번을 찍자 중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간부가 그러면 되느냐고 질책하였고, 같은 시간 중대 소속 조00 중사는 현지 투표를 하는데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후보를 찍겠다고 말하자 중대장은 허삼수 후보가 자기 선배인데 그러지 말아 달라, 군인이 그러면 되느냐며 섭섭해 하였다고 한다.
같은 날 오후 6시경 대대 일직사령으로 근무하던 소속 중대장 대위 전00이 이 일병에게 전화로 “너가 파견지에 전화를 걸어서 확인한 뒤 너가 기표하라”고 지시하였고, 지시를 받은 이 일병은 중대장의 대리기표, 모의투표 지시가 부당한 명령이라고 생각해서 그래도 됩니까 하고 반문했으나, 현실적으로 중대장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만약 그가 거부해서 간부들이 대리투표를 하게 되면 본인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되어 기표가 되기 때문에 차라리 그가 사병의 의사를 물어본 뒤에 그의 의사에 따라 대리 기표를 하는 것이 그나마 병사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중대장의 선거 부정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중대장의 지시사항을 인사계인 상사에게 보고하자 인사계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중대장의 지시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 일병은 부산 시내 공군부대에 파견 나가 있는 병장 고00, 임00, 박00, 상병 김00, 일병 이00, 박00 등 6명과 진해 해군부대에 파견 나가 있는 병장 오00, 상병 배00, 손00, 일병 김00 등 4명, 휴가자인 병장 권00, 비파병 상병 박00 등 총 12명에게 전화해서 그들에게 각 입후보자들의 인적사항을 알려주고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기표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소속 중대 부재자 투표 대상인원 82명 중 채 30명도 투표하지 않았는데 같은 날 밤 중대 소속 정00 중사는 행정반과 내무반을 오가면서 병사들에게 “군인이 어디 야당 찍을 생각을 하느냐”, “군대 많이 좋아졌다.”, “서신검열기로 찍어보면 다 안다”는 등 말을 하여 여당 지지를 노골적으로 유도했고,
다음날인 3월 19일(목)에 진해에 파견 나가 있는 이00 일병에게 전화하여 의사를 물었는데 그가 2번이라고 말했는데도 1번에 기표해 버리자 이를 행정반에서 목격한 조00 일병이 이건 무효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부재자 투표 마지막 날인 3월 20일(금)에는 오후 3시경 대대 인사과 선임하사가 중대 인사계를 통하여 중대 전입 신병인 이병 김00에게 전화로 물어보고 대리기표 하였고, 인사계 상사 조00는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휴가자 상병 최00에게 연락이 안 되자 이 일병에게 너가 (1번으로) 찍으라고 하였으나 이 일병이 거부하자 인사계가 직접 1번에 기표한 뒤 이 일병이 대신 1번이 아닌 무소속을 찍었다고 위 최00에게 이야기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공명선거를 하라는 상급 부대의 공문은 없었느냐고 묻자 이 일병은 투표가 완료된 뒤에 중대에 도착하였다고 진술했다.
이어 언제 위와 같은 선거부정 사실들을 언론에 알릴 생각을 하였느냐는 변호인의 신문에 이 일병은 진실을 말한 이지문 중위는 도리어 구속되어 갇혀 있고 진실을 보도한 한겨레신문은 거짓을 말하는 국방부에 의해 고소당한 상태여서 이럴 때 나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한겨레신문에 전화를 걸어 이러한 사실을 알리겠다고 통화하고 만났는데, 그가 언론사에 제보하기로 마음먹을 때 자신의 신변 위험이나 가족들의 걱정 그리고 인간적으로 친해진 중대장과 인사계 등에게 끼칠 영향 등에 대하여도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사람이 형, 동생하는 사이이지만 당시까지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한겨레신문에 보도되기도 전에 진실 은폐에 나선 군 당국
이어 이 일병은 한겨레신문에 보도되기도 전인 3월 31일(화) 오후에 이미 소속 부대에서는 한겨레신문에 기사가 나온다고 하여 전화로 대리투표를 한 것이 아니라 직접 방문하여 투표를 한 것으로 서류를 조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중대 내 부정선거가 없었다며 입을 맞추는 교육을 했다고 폭로했다.
또한 그는 그날 밤 대대로 불려가서 한겨레신문 4월 1일(수)자에 그가 제보한 부재자 부정 선거 관련 기사가 나온 것을 확인했는데 기사를 보니 자기 이름만 안 나왔지 이원섭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대대장과 면담을 할 때는 일단 부인했는데 한겨레신문 기사를 본 중대 하사관들은 기사 내용을 보면 이원섭이 맞는 것 같다고 한 반면 인사계는 이원섭이는 그런 배포는 없는 놈이니 절대 아닐꺼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이 일병은 4월 1일자 신문이 아직 배달되기도 전인 같은 날 새벽 2시경에 대대장에게 불려갔고, 같은 날 낮에 다시 대대장에게 중대 서무계 4명이 불려갔는데, 대대장은 “2중대장이 먼저 전화로 투표하겠다고 보고하자 좀 찜찜했지만 충렬공사(대대 이전 공사) 때문에 바빠서 어쩔 수가 없어 승낙했다”, “정신교육을 한 것이 나의 오점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3중대 서무계 상병 이00은 대대장 앞에서 “대대장님 정신교육 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53사에서는 간부 3명이 1번만 보여주면서 나는 안 볼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찍으라고 했다고 저에게 토로하였는데 우리 부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신문에는 왜 정신교육을 한 내용은 안 나오고 대리투표 기사만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부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운용중대 서무병 상병 이00도 “대대장님이 정신교육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동료들이 저런 내용의 정신교육을 하느냐고 불평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3일을 불안하게 보내다가 4월 3일 국방부 합동조사단에서 조사하러 부대에 왔고 이 일병은 조사관에게 자신이 제보한 게 아니라고 계속 부인했지만 2박 3일간의 출장증을 받고 3중대장과 같이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비행기 안에서 같은 날 국방부장관의 기자회견 보도를 봤다는 것이다.
국방장관의 부정(不正)선거 부정(否定) 발표
당시 최세창 국방부장관은 국방부 산하 5부 합동조사반을 구성, 육군 제9사단을 비롯, 해병 제2사단, 방공포사령부 등에 대해 수사한 결과 이번 총선의 군부재자 투표과정에서 공개투표-기표확인-대리투표 등의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것은 사실 무근으로 확인됐다고 공식 발표했는데, 발표문에서 “군부재자 투표에서의 공개투표 여부에 특히 중점을 두고 수사했으나 이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로 판명됐으며 중대장이나 인사계가 투표내용을 확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재확인했다”면서 투표함 이송 중 기표확인과 대리투표 등도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서신 검열기는 군의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발표가 국민들을 기만한 허위로 밝혀지는 데는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7일간의 불법 구금과 국방부의 취조실
그리고 사건의 축소․은폐
국방장관이 군 부재자 투표 부정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 결과 군내 부재자투표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부 정신교육에 오해 소지 없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까지 한 마당에 그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힌 이원섭 일병의 운명은 이제 어찌될 것인지 그 누가 알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프린스 차량의 뒷자리 가운데에 이 일병을 앉히고 그 양쪽에 조사관이 앉자, 아직도 순진하기만 한 이 일병이 운전석 옆 앞자리가 비었는데 편히 앉아가시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자, 조사관 중 한 사람이 “니가 정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구나” 면박을 주고 난 뒤 그대로 출발했다고 한다.
차가 용산 국방부 입구를 통과할 때에는 눈에 안대를 해서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고 안대를 풀었을 때는 어느 지하실 문 앞이었는데 문을 여니 복도가 나왔고 복도에 있는 여러 개의 문 중에서 하나의 문을 여니 다시 복도가 나오는 문을 3개 정도 통과하고 취조실에 들어갔다.
취조실은 책상이 있고 벽에 아주 밝은 전구가 두개가 있고 이 일병은 전구를 바라보고 앉고 전구 쪽에 조사관이 앉고 불을 켜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조사관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이름, 군번 이런 것을 묻고 이 일병이 한겨레신문에 제보했는지 물었고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는데 다음날인가 제보한 것을 시인했다.
이 일병은 국방부 합동조사단에 불법 구금되어 있을 때 한겨레신문에 제보한 군 선거부정 사실들을 모두 밝힌 진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자 그 수사관은 중대장과 대리기표한 사실만 시인하기로 했으니 그 외 정신교육 실시나 기무대 부대 방문 사실, 인사계 관련 부분, 비파병 대리 기표 등 관련 부분은 모두 빼자고 해서 그렇게 따랐다는 것이다.
합조단에서는 한겨레신문에 어떤 자료를 넘겼는지를 매우 궁금해 했는데 이 일병은 군사기밀을 유출한 죄로 엮일 것 같아서 별다른 얘기는 안했지만 조사관들은 어떤 자료를 넘겼는지 대략은 아는 눈치였다고 한다.
그가 연행된 이틀 뒤에는 직속 2중대장도 연행되어 왔다.
조사관들은 인간적으로는 잘해줬지만 입을 다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다고 했고, 이에 그는 겁이 났지만 남자가 쪽팔리게 지금 말을 번복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별로 잃을 것도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런 제보내용을 번복하라는 압박 보다는 자신의 제보로 인하여 졸지에 함께 끌려온 중대장과 같은 방을 쓰게 하면서 인간적으로 힘들었는데 그게 죽인다는 말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합조단으로 부대 인사계가 찾아와서 “중대장, 인생 망치지 않게 입 다물라”고 하여 그때는 “예”라고 했지만 합조단에서도 그런다고 이미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서 국군통신사령관이 불쑥 찾아와 마지막으로 ‘회유’를 하였으나 묵언으로 거부하자 저녁 7시경에 합조단 사무실에 불려가 보니 구속되었다면서 수갑을 채워 국방부 영창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일병은 구속되었다는 말에 이제는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에 “살았다!”고 기뻐하였고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일주일 동안 일체의 출입이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국방부에서 사건을 덮기 위해 자신을 몰래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겁이 많이 났고, 실제로 수사관 중 한 명은 이 일병 한 명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 있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밤에는 자신이 월북하려다가 아군에게 사살되어 휴전선 철책선에 매달려 있다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정식으로 구속되어 영창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함께 구속된 2, 3중대장과 같은 방을 쓰지는 않고 장교는 옆방에서, 사병은 사병들 방을 사용했으나 오전, 오후 운동시간에는 서로 얼굴을 볼 수밖에 없어서 많이 불편했고 젊은 두 장교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미안함이 너무 컸다고 한다.
국방부의 때늦은 ‘구속’ 발표
이렇듯 이원섭 일병이 군 부재자 투표에서 대리투표를 하였다고 스스로 밝힘에 따라 국방부는 7일 만에 이 일병을 정식으로 구속하고 그 후 4일이 지난 4월 14일에 국군통신사령부 예하부대의 일부 대리투표행위를 인정하고 장병 3명을 구속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초 4월 3일 “일부 정신교육에만 문제가 있었다”는 선에서 육군과 사전에 합의를 한 뒤 대리투표는 없었다고 발표한 국방부로서는 대리투표를 행한 이원섭 일병이 직접 폭로함으로써 다른 부정제보 또는 주장과는 달리 폭로자의 신원과 증거가 확실히 드러난 이상 덮어둘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필자는 구속적부심 재판에서 이 일병이 처음 연행되었을 때부터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될 때까지 구속 또는 체포의 이유를 고지 받거나, 진술거부권이 있다거나 변호인 선임권이 있다는 사실을 고지 받은 일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 일병에게 군형법이나 군인복무규율에 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일병은 그것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면서, 군 부재자 선거 시 대리기표를 방지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정당 참관인이 부대로 들어오거나 외부에서 투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이 일병은 군 부재자 선거부정 사실들을 언론에 제보한 데 대해 후회하지는 않으나 그의 제보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중대장이 구속된데 대하여 인간적으로 괴롭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이렇게 하여 구속적부심 재판은 원만하게 끝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기각되었다.
다음날 언론에서는 이원섭 일병이 구속적부심에서 추가로 폭로한 선거 부정 사실과 불법 구금 중에 대리투표를 축소하라는 압력을 받은 사실 등을 집중 보도하였다.
그리고 7개월 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부재자투표소가 설치되어 군인이 직접 해당 투표소에 용지를 가져가 투표관리관 감독 하에 투표를 하도록 제도가 개선되었다. 이로써 대리투표나 공개투표의 시비는 원천적으로 차단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하는 남은 군 생활
이 일병은 5월 2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당초 나와 검찰부장이 한 신사협정이 원만하게 지켜진 데 대해 서로간의 신뢰도 어느 정도 쌓여서 앞으로는 이 일병이 남은 군 생활을 원만하게 마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나는 그 문제도 이미 최 검찰부장을 통해 군 측에서 절대 부당한 보복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 두었고, 실제로 군 측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 일병은 석방 후 과천에 있는 통신사령부 본부로 가서 대기하다가 원래 근무지인 부산이 아닌 원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전에 통신사령부 주임상사로부터 군 생활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는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부 단위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 일병은 그 이후 제대할 때까지 6번이나 부대를 옮겨 다녔는데 옮길 때마다 ‘문제 사병’으로 바라보는 눈들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으나 이 일병은 잘 버텼다. 국방부 검찰부와 합조단 측에서도 나름대로 도움을 많이 주었다. 아마도 이 일병이 군대에서 당한 부당한 행위들을 또 다시 폭로해 버리면 국방부로서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전무후무하게 ‘애국 군인상’을 수상한 이원섭 일병
그렇게 하여 서서히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던 1992년 7월 29일 ‘애국군인상 시상위원회’(공동위원장 문정현 신부, 조화순 목사, 지 선 스님 등 3명; 심사위원장 유현석 변호사)가 이원섭 일병을 제1회 애국군인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심사위원회는 이 일병이 사병으로서 지난 3․24 총선 군 부재자투표 부전을 용기있는 증언으로 사실임을 입증시켜 군의 정치적 중립과 군 민주화, 군민관계 개선에 공헌한 자기희생적인 노력이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면서 시상위원회는 이 일병이 휴가를 나오면 시상식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 보도를 접한 국방부 측은 발칵 뒤집혔다.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사병에게 듣도 보도 못한 ‘애국군인상’이라니, 그러면 다른 군인들은 애국군인이 아니라는 것이냐는 반응이었다.
국방부는 군인이 외부로부터 상을 받을 때에는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들어 이 일병으로 하여금 이 상을 받지 못하게 막았다.
이 일병이 부대에 복귀하여 근무하고 있던 중 부대에서는 ‘관심 사병’이라 휴가를 안 보내다가 법에 규정된 정기 휴가는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게 되자 시상위원회는 이 일병이 정기 휴가를 받아 외출을 한 날에 애국군인상 시상식을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에서 갖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군 측에서는 이 일병에게 정기 휴가를 미루자고 했지만 이 일병이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자 대대장이 직접 정기 휴가는 보내겠지만 애국군인상 수상 현장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이에 이 일병은 대대장님이 참석하지 말라고 ‘명령’을 하면 참석하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부탁이면 참석하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하던 대대장은 결국 명령이라면서 시상식장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각서를 쓰는데 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병은 다른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애국군인상 행사 장소에는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국방부 측과 협의를 하여 이 일병이 직접 수상을 하거나 행사장에 가지는 않되 어머니가 대신 수상하는 것까지는 막지 말고, 그로 인해 이 일병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시상위원회 측에도 이 일병을 이 일로 다시 구속되게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 이 일병 대신 어머니가 참석하여 대신 수상을 하면 나름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결국 1992년 8월 7일 이 일병의 어머니가 행사장에 대신 나가 수상하였다. 필자도 현장에 나갔는데 국방부에서는 혹시나 이 일병이 현장에 올까봐서 사복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있다가 이번에도 ‘신사협정’이 지켜지자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시상위원회 측에서는 같은 날 《이원섭 일병에 대한 애국군인상 수상거부 명령을 규탄하며》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원섭 일병의 애국군인상 시상식 불참을 명령한 해당 부대장을 비롯한 군당군은 양심을 억누른 명령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할 것을 촉구했다.
이렇게 하여 이원섭 일병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애국군인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 뒤 우후죽순으로 생긴 이른바 ‘애국’ 단체들은 과연 무엇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척 궁금하다.
설마 무조건적인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선거부정 행위를 감싸는 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리라고 믿고 싶다.
최초로 전경 양심선언을 한 양승균 상경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다.
애국군인상을 제정하게 된 데에는 고(故) 양승균 씨의 노고가 무척 컸다는 점이다.
1987년 7월 8일 경기도 이천경찰서 타격대 소속이던 양승균 상경은 한국기독교회관 안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군인․전경으로서는 처음으로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는 ‘독재에 고함’이라는 글을 통해 6․29 선언은 정부․여당이 국민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중의 투쟁 속에 누구하나 빠질 수 없는 대중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행정부의 시녀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5만 경찰과 7만 전경도 경찰권 독립이 민주화의 첩경임을 알고 부당한 명령에 명령불복종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10일간 농성을 하였고 그 후 2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다가 1989년 7월 29일 연행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마도 우리 민변의 조용환 변호사님이 변론을 담당한 것이 아닌가하고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의 뒤를 이어 1988년 1월 28일에는 서울 서부경찰서 201 전투경찰대 소속 연성흠(24, 감신대 3년 휴학)이 전경 해체 및 경찰 중립을 요구하는 양심선언을 하였다.
양승균과 연성흠은 1988년 5월 10일 ‘전경대 설치에 관한 특별법폐지 및 전경해체투쟁위원회’(전해투)를 결성하고 전경대 설치에 관한 특별법 폐지, 전경․백골단 해체 등을 요구하였다.
1988년 6월 24일에는 서울시경 소속 노재학 상경이, 1989년 1월 31일에는 강원도경 원주경찰서 2기동대 조규봉 이경이, 2월 18일에는 강원도경 태백경찰서 소속 임성호 일경이, 1992년 1월 15일에는 전북경찰청 제2308전경대 소속 강태중 일경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전경 해체와 군의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출소 이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양승균은 이지문 중위와 이원섭 일병 사건 때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애석하게도 1997년 1월 20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치고…
이 일병은 휴가 복귀 후 허리가 계속 아파서 국군광주병원으로 후송되어 3개월 정도 입원하다가 퇴원하여 원주 부대로 복귀하기 전에 과천 통신사령부에 대기하던 중에 거기서 부산에서 소속 중대장이었던 전00 대위를 복도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유죄의 판결을 받고 강제전역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 일병은 중대장에게 경례만 하고 서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가 일병 말 호봉 때 유격훈련 갔다가 중대 상병이 뇌출혈로 죽게 되서 헌병대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부대에서는 진실을 얘기하면 죽은 상병 머리를 발로 찬 유격 조교는 살인자가 되고 죽은 상병은 말 그대로 개죽음이 되지만 훈련 중 사망으로 처리하면 죽은 상병의 부모님에게 얼마 안 되지만 유족연금이라도 나가니까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부대 방침에 이 일병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대 이후에야 그 사실을 전해들은 나는 진실을 밝히고 양심대로 살기에는 정말 어려운 곳이 군대인가 보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군의문사 사건의 진상 규명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2004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일병은 원주 부대로 복귀한 후에는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태기산 통신소에서 지냈는데 정기 휴가 한 번과 제대 직전에 휴가 한 번 더 가는 것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제대 후 사회에 나오니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이 군대에서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이니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런 일을 해야지 하면서 그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지우려고 해서 몇 년 동안 접촉을 삼가기도 했다는 이 일병.
그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양심을 지키면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재현된 1992년 군 부재자 투표 부정사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1992년 당시 군에서 자행했던 부재자 투표 부정은 20년이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사실상 부활하였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군 당국이 시행한 이른바 ‘종북 정신교육’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군의 이른바 ‘종북 종신교육’ 내용은 철저하게 야권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거에서 자연스럽게 여당인 새누리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하였다.
원내 3당인 통합진보당을 ‘종북세력의 배후’로 규정하거나 제1야당에도 종북세력이 존재한다는 등으로 야당을 색깔론으로 공격하였다.
심지어 “종북세력은 유신체제 하에서 반유신, 반독재투쟁을 빙자해 세력 확산을 기도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군이 일선 장병들을 상대로 민주화운동과 평화운동을 친북 혹은 사회주의 활동을 위장하거나 은폐하려는 것이라고 사상교육을 한 것이다.
또한 군은 ‘국방부 2012 정훈·문화활동 지시’와 ‘호국보훈의 달 안보영상자료 활용지시’을 통해 각 부대에서 영상물과 외부 초빙강연을 이용한 ‘종북 교육’을 집중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군은 사지선다형, 단답형, ○×, 약술 등 150개의 종북 관련 문제와 답을 문제은행식으로 배포하고 시험을 치러 그 성과를 상급부대에 제출하도록 했다.
이는 1992년 군 부재자 부정 투표 사건 과정에서 여당 후보를 찍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방부가 집중적으로 실시했던 ‘종북 교육’에 ‘대선 공작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2013년 10월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지난해 육군에서 진행한 종북 방지 교육 강사로 초빙된 이00 씨가 자신이 국정원 소속 공무원임을 밝히지 않고 40여 차례 교육을 실시했다”고 폭로했다. 이00 씨는 국정원 직원이 아닌 한 사상연구회 부회장 자격으로 종북 방지 정신교육을 실시했으며, 육군에서 실시한 종북 방지 교육 53회 중 이 연구회가 초청된 강연은 43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정감사를 통해 18대 대선에서 국정원과 경찰청, 국방부, 군 사이버사령부, 보훈처, 통일부 등 정부 기관들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인 관권선거가 자행된 것이 아니냐는 국민적 불신을 키웠다.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과 상식의 승리
“남들이 이지문이라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군이라는 물을 흐려놓았다고 하지만, 군이라는 물에 폐수를 방류하는 집단이 누구라는 것을 상식있는 국민은 다 알고 있다.” 이지문 중위의 말이다.
“군은 잘못을 드러내놓고 용서를 구할 때 국민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국방장관의 투표부정이 없었다는 발언에 슬픔을 느낀다.” 이원섭 일병의 말이다.
우리 헌법 제5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그렇다.
군이라는 물에 폐수를 방류하는 집단이 누구인지,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한 세력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군이 선거 때마다 관습적으로 자행해 오던 선거 부정을 온몸으로 고발함으로써, 비록 구금되는 고초를 겪기는 하였지만,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제도적으로 이끌어 낸 이지문 중위와 이원섭 일병을 비롯한 수많은 군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군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픈 역사에서 배울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