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부정선거 안 했다는 국방장관의 거짓발표를 깨뜨린 참다운 애국군인, 『이원섭 일병』_안상운 변호사

2014-05-20 2,164

칼럼12

 

“구속”이라는 말에 “이제 살았다!”고 만세 부른 육군일병

 

 

안대를 하고 들어온 국방부 합동조사단 조사실.

직속상관인 중대장님과 옆 부대 중대장님이 같이 갇혀 있다.

아무 말도 없이 두 분의 원망어린 눈빛을 24시간 내내 받고 있다.

나 하나쯤은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수사관이 말한다.

눈을 감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오고 눈을 뜨면 인간적인 미안함에 가슴이 아프다.

 

거짓을 보고 그건 아니라고,
진실을 진실이라고 언론에 알려준 게 이런 죄 값(?)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번뇌가 밀려온다.

 

김해공항을 떠나 여기로 끌려올 때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본 TV 뉴스가 계속 괴롭힌다.


하늘같이 높은 국방장관께서 얼마 전 14대 총선 군 부재자 투표에서 대리기표나 공개투표는 절대 없었다고 공식 발표를 하는 뉴스가 목을 누르고 있다.

바로 그 시간에 스스로 대리투표, 공개투표를 했다고 밝힌 혐의로 서울 국방부로 끌려가고 있는 나는 이제 어찌 될 것인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아니 내가 죽어 줘야 할 운명이구나.

 

그렇게 해서 국방부 합동조사단 조사실에 갇히고 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하려다가 아군에게 사살되어 철조망에 시신이 걸려있는 악몽에 매일 시달리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철문이 열리면서

 

이원섭 나와!

한다.

 

누굴까?
이곳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혹시 어머니가 찾아오셨을까?
아니 어머니는 아직 내가 여기에 끌려와 있는 줄을 모르실텐데.

 

찾아온 사람은 어머니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고,


다름 아닌 국군통신사령관(육군준장).


입대한 지 8개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대 사령관께서 일개 일등병을 만나러 여기까지 직접 오시다니. 영광이기에 앞서 무섭다.


 

나보고 대리투표를 한 적이 없다고 하란다.


나보고 한겨레신문에 제보한 적이 없다고 하란다.


그러면 사령관께서 나를 부대로 친히 데리고 가서 제대할 때까지 잘 보살펴 주겠다고 하신다.

아무 일도 없도록 해 주겠다고 하신다.

 

그럼 이제 나는 사는 건가?


잠시의 번민을 뒤로 한 채 그래도 내가 한 일을 안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무 대꾸를 하지 않기를 수십 분.


사령관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체념한 듯이 자리를 뜨고 다시 갇힌 지하 감방.

그러자 더욱 더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리고 또 몇 시간쯤 지났을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러자 너무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


이제 살았다!


휴전선 철책에 시신이 걸려 있는 악몽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니 어머니가 곧 찾아오시겠지.

변호사님도 모시고 오지 않으실까?

 

그리고 나서 5일이 지나 나를 찾아온 젊은 변호사,


이젠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어머니의 소식을 묻는다.

 

첫 만남

필자는 1992년 3월 22일 군부재자 투표 부정을 폭로한 이지문 중위 구속 사건을 맡던 중, 4월 15일 민가협의 소개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온 이원섭 일병의 어머니를 만났다.

중대 서무병인 아들이 직접 군 부재자 대리투표 등 부정을 저지른 사실을 한겨레신문에 제보했다는 혐의로 국방부에 구속되었다는 통지를 어제 받고 가족 면회를 신청했는데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빨리 변호인 접견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긴 그동안 조직적이고 명백한 부정선거를 공식적으로 부인해 온 국방부가 어제(4월 14일) 국군통신사령부 예하부대에서 대리투표 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장병 3명을 전격 구속하였다고 밝혔기 때문에 그 구속자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서 오히려 내가 더 반가웠다.

 

이원섭 일병의 제보를 처음 기사화한 한겨레신문도 같은 날 《’감옥에 갇힌 양심’ 이원섭 일병》 《어둠속 진실 밝힌 ‘용감한 병사’》 기사에서 그 제보자가 이원섭 일병임을 밝혔다.

 

나는 즉시 어머니와 함께 국방부 위병소에 가서 변호인 접견과 가족 면회를 신청했더니 변호인 접견만 허용하겠다고 하여, 헌병의 안내를 받아 국방부 영창을 관리하는 근무지원단을 찾아가 단장 면담을 우선 요청했다.

 

이지문 중위 사건 때의 경험으로 볼 때 부대 지휘관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 문제 해결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층 단장실에 찾아갔더니 붉은 색 장성기(준장)가 걸린 사무실이 민간인에게는 꽤나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조금 지나 운동을 마치고 온 단장에게 가족 면회거부의 부당함을 알리고 시정을 요구하자 그는 헌병대대에 알아보고 시정할 것은 시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지문 중위 사건 이후에 국방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런 우려가 오히려 우려스러웠지만 서로 자극하는 언사는 자제했다.

 

이어 1층 어디에선가에서 이원섭 일병을 처음 만났다. 그는 내가 변호사라고 했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변호사를 가장한 회유 가능성 등)에 긴장을 늦추지 않다가 국방부 위병소에 어머니가 와 계시는데 국방부 측에서 가족 면회를 해주지 않아서 어머니의 자필 편지를 미리 받았다며 보여주자 그 동안 참았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군 부재자 부정선거의 진상 

접견을 시작하면서 이 일병에게 한겨레신문 1992년 4월 1일자 기사를 보여주면서 이 기사 내용이 그가 제보한 내용이 맞느냐, 그 내용이 사실이냐고 하자 다 맞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1992. 4. 1.자 15면 기사]
[한겨레신문 1992. 4. 1.자 15면 기사]
이 일병은 자신이 국군통신사령부 제2통신단 55통신지원대대 2중대 소속 서무병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실제 근무하는 곳은 부산에 있는 군수사령부에 파견 나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중대 서무계로 근무하면서 인사계나 부대의 준위와 잘 지내고 있어 편하게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달에 실시된 14대 총선에서는 부재자 선거에 관련된 업무를 맡게 되었고 부재자 투표할 때 선거 부정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좀 더 자세히 선거 부정 사실을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부대에 가림막 등이 없어서 공개투표를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대대에 했으나 묵살되었고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영외로 파견 나가 있는 사병에 대해서는 전화로 투표 의사를 물었지만 그의 의사와는 다르게 여당 후보인 1번(당시 민주자유당, 현 새누리당)에 대신 투표하고 전화연결이 안 되는 사병에 대해서는 그가 임의로 1번을 찍는 것으로 했으며, 그가 직접 전화통화를 한 일부 영외 파견자에 대해서는 그의 의사대로 대리투표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일병이 소속된 부대는 파견 중대라서 별도의 정신교육은 없었으나 기무사 하사관이 중대 행정반을 종종 방문을 하더니 선거 직전에는 더 자주 찾아왔고, 모의 투표 등 공공연하게 투표에 대한 압박을 주고 있었으며, 1번을 찍지 않으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하사관들이 있었고, 실제 부대원 중에는 부담이 된다고 호소하는 사병도 있어서 부대원들은 압박감 속에 투표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지문 중위가 구속되는 것을 보고

진실을 밝힐 결심을 한 이원섭 일병

접견하는 도중에 나는 그가 대학 ‘운동권’ 출신인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혹시라도 국방부 측에서 이 일병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고자 소위 운동권의 소행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4년제 대학이 아닌 동양공전 기계과 1학년을 다니다가 입대를 했고, 이념이니 운동권이니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런 순진한(?) 학생이 어떻게 해서 구속을 무릅쓰고 언론사에 선거 부정사실을 제보할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지문 중위가 양심선언을 했다는 이야기는 저 멀리 부산에 있는 그의 중대에서도 알고 있었는데 부대원 사이에서도 인생을 걸고 그런 일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서로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병은 군부재자 투표에서 공공연히 정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부정이 있는 줄은 당시 군인이라면 누구나 뻔히 아는데도 오히려 이지문 중위가 구속되고 부정을 자행한 장교들이 허위보도라면서 한겨레신문을 고소하는 것을 보고 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거 직후 상급 대대에 보낼 선거 결과 보고 문서를 만들면서 3부를 더 만들어 놓았는데 국방부(군인)에 고소당한 한겨레신문에 제보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한겨레신문 부산 지역 담당이던 이수윤 기자와 어떻게 연락이 닿아 관련된 자료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수윤 기자에게 준 자료 1부 외에 남은 2부 중 하나는 동양공전 동기인 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고등학교 동창생 여학생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혹시 내가 갑자기 연락이 안 되면 이번 일로 잘못된 것이니 한겨레신문 이수윤 기자에게 연락하라고 전달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는 제대하고 난 뒤 그보다 몇 달 뒤에 공무원의 선거부정을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하여 고초를 겪은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주례로 그 편지를 받은 고등학교 동창생 여학생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3월 28일 토요일에 외박을 나간 이 일병은 이수윤 기자를 두 번째로 만났는데 이 기자와 함께 온 시민단체 일을 한다는 박00라는 사람이 양심선언을 해달라고 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경북 경산시에 있는 중․고등학교 때 은사인 이00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서 군 부정선거와 관련한 자료가 있고 기자와 만난 사실을 말씀 드리자 그 선생님께서는 교과서적인 얘기로는 세상에 얘기하라고 말해야하지만 그냥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을 지키고 정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시기에 제자 걱정이 앞선 까닭일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이 일병이 만난 박00(가명)라는 사람은 노재학이었다. 그 역시 서울시경 동대문지구대 8중대 소속 전경(상경)이던 1988년 6월 24일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과 ‘전경대 해체’를 주장하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하였고 그 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초짜 변호사였던 필자가 변론을 맡았던 묘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출소 후 부산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일요일에 부대로 복귀하면서 이 일병은 이수윤 기자와 통화하면서 양심선언은 도저히 못하겠고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기사만 나가는 건 괜찮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 ‘운동권’도 아닌 그가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배경이 무척이나 궁금하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청량리역 구간을 오가면서 신문을 팔았는데 그 때 신문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조선일보 보도와 한겨레신문 보도의 차이점 등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는 ‘조중동’이라는 용어도 아직 나오기 전이었고 필자 또한 조선일보의 ‘본색’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던 때였는데 지하철에서 신문을 파는 전문대 1학년생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군통신사령관의 회유 공작

 

그런데 이원섭 일병과 접견을 하던 중에 충격적인 발언을 듣게 되었다. 소속 부대인 국군통신사령부의 사령관(육군 준장)이 국방부 조사실에 찾아와 그를 회유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고 추궁하자(?) 며칠 전 구속영장이 떨어지기 직전 사령관이 직접 조사실로 찾아와서 만났는데 대리투표를 한 적이 없다, 한겨레신문에 제보한 적이 없다고 하면 자신을 부대로 데리고 가서 제대할 때까지 잘 보살펴 주고 아무 일도 없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잠시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한 일을 안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십 분 동안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있자 사령관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며 체념한 듯 자리를 떴고 그 몇 시간 뒤에 구속영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소속 중대 인사계도 어제(4월 14일)와 오늘(4월 15일) 합동조사단으로 찾아와 그에게 ”너가 조용히 있으면 잘 될 것이다”, “중대장을 살려야 될 것이 아니냐”, ”밖에서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풀려날 것이고 그러면 나와 같이 근무하면 편할 것이다”라고 해서 한참동안 아무 말도 않고 있었는데 너무 간곡하게 얘기해서 예의상 “예”라고 짧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지난 4월 3일 국방장관이 직접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은 없었다고 공식 발표를 하였는데 그 뒤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원섭 일병의 ‘자백’이 나오자 군 장성까지 직접 나서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병으로 하여금 진술을 번복하도록 회유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오히려 이런 ‘자충수’로 인하여 이 일병은 이제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격려했다.

 

통신사령관은 구속될 위기에 빠진 자기 부하를 구해보려고(?) 자진해서 국방부 합조단을 찾아가 일등병을 ‘설득’해 보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국방부(장관)를 살리기 위해 선거 부정을 덮기 위해서 찾아가 ‘회유’하려고 한 것일까?

 

 

국방부 검찰부장과의 필담 담판

 

약 두 시간 동안 변호인 접견을 일단 마치고 나는 헌병대 측에 가족 면회를 빨리 해달라고 요구했고 헌병대로부터 오늘은 곤란하고 내일 조치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근무지원단을 나와 위병소로 나가려다가 나는 이 사건을 지휘하는 국방부 검찰부를 찾아갔다. 이지문 중위 사건을 담당한 9사단에서는 법무참모 면담신청을 수차 했으나 번번히 거부당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이나 영장도 없이 불법구금을 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를 하고 국방부가 진실 규명을 하지는 않고 오히려 진상을 호도하고 회유하려는 시도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예고도 없이 물어서 국방부 검찰부장실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더니 의외로 선뜻 만나주었다. 2층 검찰부장실에서 처음 만난 최영홍 검찰부장(공군 중령)은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 검찰부장은 전주고를 나와 민변 천정배, 유선호 변호사님과 동기인 서울대 법대 72학번이었고 3회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한 정통 군법무관 출신이었다(현재는 고대 법전원 교수). 이지문 중위 사건을 함께 했던 임종인 변호사님의 고교 선배이자 군법무관 선배이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최 검찰부장은 국방부 내에서 ‘야당’이었고 군 민주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최 검찰부장에게 방금 근무지원단에서 이원섭 일병을 접견하고 왔다면서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9사단에서 진행 중인 이지문 중위 사건 보고를 받아 나를 잘 알고 있다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갑자기 스테레오의 볼륨을 높였다. 혹시라도 감청이 될까봐서 그랬던 것이다.

최 검찰부장과 나는 간간이 종이에 필담을 하면서 대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이원섭 일병이 7일간이나 불법구금을 당해 온 점과 구속영장에 기재된 부정 선거 관련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부정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군 검찰의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특히 소속 부대장인 국군통신사령관이 직접 국방부를 방문하여 이 일병을 회유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지금 국방부 위병소에서 접견을 마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신문 기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겠다고 짐짓 협박(?) 했다. 그러자 최 검찰부장은 그런 사실은 잘 몰랐다면서 이 일병 사건을 ‘조용히’ 해결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 일병에 대한 가족들의 면회를 자유롭게 허용해 줄 것과 이 일병이 ‘자백‘한 선거 부정사실에 대해서는 군 검찰에서 철저히 조사해 줄 것, 상명하복의 철저한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군의 특수성에 비춰 상관의 지시에 따라 부정에 가담하여 대리투표를 한 이 일병에 대해 선처해 줄 것 등을 요청했다.

최 검찰부장은 나에게 자신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면서 그의 직속 상관인 국방차관에게 보고하고 승낙을 받아 보겠다고 했다. (당시 국방차관은 권영해였다. 그는 다음해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 국방장관에 발탁되어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다가 1994년 12월부터 1998년 3월까지 안기부장을 역임하였는데 결국 1997년 대선 북풍공작 등으로 구속되었다. 그가 안기부장 시절에 자행한 이른바 ’김대중 X파일 사건‘으로 인해 1998년 나와 그는 또 다시 ’악연‘이 되어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최 검찰부장은 국군통신사령관이 회유하려고 한 사실을 기자들에게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그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 국방부로서는 또 한 번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할 터인데 두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갈등이 생겼다. 나는 일단 오늘은 기자들에게 그 일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내일 가족들과 같이 와서 가족면회와 변호인 접견을 할테니 그 때 피의자와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피의자에게 그런 말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 일병도 이지문 중위의 사건처럼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테니 가족들과 기자들의 방청을 최대한 허용해 줄 것과 공개법정에서 합동조사단에서 축소․은폐한 일부 선거부정 사실을 법정에서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 그리고 사병에 불과한 이 일병을 불기소처분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 둘은 다음 날 서로의 입장을 가지고 다시 만나 의견을 계속 절충해 나가기로 했다.

 

 

국방부를 압박하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하다

 

면담을 마치고 국방부 위병소에 나가서 이 일병의 어머니에게 아들을 접견한 사실과 어머니를 무척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내일 오후에 면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물론 통신사령관의 회유 문제는 말하지 않았다.

 

당시는 이지문 중위 사건이든 이원섭 일병 사건이든 변호인이 한 발언이 그대로 보도되던 때였다. 그래서 국방부를 좀 더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자 신문에 오늘의 접견 사실이 보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기자들에게는 좀 더 자세하게 접견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날인 4월 16일(목) 예상대로 한겨레신문은 1면 상단 부분에 『민변, 이일병 변호맡기로』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한겨레신문 1992. 4. 16.자 1면 기사]
[한겨레신문 1992. 4. 16.자 1면 기사]
그 신문을 들고 나는 그 날 오후 4시경에 이원섭 일병의 어머니 고경애 씨(52)와 형 인섭(31), 우섭 씨(24) 등 가족 3명을 모시고 국방부 합동조사단실에 가서 1시간여 동안 이 일병과의 가족 면회를 주선하고 참관했다.

 

이 일병은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혹시라도 입 다물라고, 그래야 네가 산다고 설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면회 때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아들을 이해하고 지지해주시니 마음 편히 버틸 수 있다고 했다.

[한겨레신문 1992. 4. 16.자 기사]
[한겨레신문 1992. 4. 16.자 기사]

국방부 검찰부장과 ‘빅딜’을 하다

나는 가족들과 별도로 이 일병을 만나 통신사령관 관련 부분을 재차 확인한 다음 이 부분만 국방부 측에 ‘양보’를 하면 그 쪽도 기소를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전적으로 변호사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에 나는 이 일병의 조속한 석방과 선거 부정 진상 규명이 가장 중요하니 그에 관해 확답을 받을 수 있으면 통신사령관 관련 문제는 ‘양보’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러면서 국방부로서도 선거 부정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털어 버리려고 할 테고 중대장 두 명도 이미 구속한 마당에 사병 한 병을 풀어주고 조용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고 설득했다. 이 일병도 내 말에 동의했다.

[한겨레 1992. 4. 16.자 기사]
[한겨레 1992. 4. 16.자 기사]
가족 면회가 끝나고 나서 나는 다시 검찰부장을 찾아갔다.

최 부장은 오늘 기사를 봤다면서 통신사령관 관련 내용을 협조해 주어서 감사하다면서 어제 상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검찰부로 사건송치 → 구속적부심 청구 → 공개법정에서 추가 선거부정 사실 폭로 → 기소유예의 절차를 밟아나가기로 했다.

 

다음 날 접견을 가서 이러한 ‘합의’ 사항을 알려주자 이 일병도 좋아했다.

이 일병이 기소유예로 풀려나면 앞으로도 남은 군 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데 부대 사령관으로서도 자신이 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병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변호사 접견을 마친 뒤 국방부 위병소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에게 “빠른 시일 내에 민변 변호인단을 구성, 구속적부심을 청구하겠다”고 말하고 군검찰이 설마 사병을 기소까지 하겠느냐는 ‘희망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국방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도 이지문 중위도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는데 이 일병도 불기소 처분을 받지 않겠느냐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국방부도 이 일병을 구속한 것은 보복이 아니라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 1992. 4. 18.자 기사]
[한겨레신문 1992. 4. 18.자 기사]
이지문 중위에 대해서 이미 기소유예 처분을 한 국방부 측은 4월 18일 이원섭 일병을 중대장 2명과 함께 대리투표 등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법 위반혐의로 국방부 검찰부에 송치했고, 나는 바로 구속적부심을 청구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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