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마왕
(스포일러 있음)
글_천지선 변호사
1. 지난 31일이 할로윈이었다고 합니다. 제게는 낯설지만 이제는 하나의 명절이 된 듯한 할로윈 기념으로, ‘마녀’와 ‘마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녀’는 웹툰작가인 강풀의 2013년 최신작입니다. ‘마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마왕’은 김지우 극본, 박찬홍 연출의 2007년 작입니다. 마왕은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인생이 바뀐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2. 두 이야기는 애매한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녀의 여자 주인공은 미정은 미인입니다. 미정을 좋아하는 남학생은 사망하거나 중상을 당합니다. 미정은 마녀라는 낙인이 찍혀 따돌림을 당합니다. 마녀의 남자 주인공 동진도 미정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동진은 미정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합니다.
마왕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오수는 집단따돌림 가해자입니다. 그는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집단적으로 같은 반 친구인 영철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유일하게 영철의 편을 들어주던 태훈을 칼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 후로 오수는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인 태성은 죽은 태훈의 동생입니다. 태성은 태훈의 사고로 어머니마저 잃고 혼자가 됩니다.
미정과 오수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아무 책임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살인자라는 극심한 죄책감을 느낍니다. 동진은 미정을 혼자 지내게 한 것에 대해 연민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태성은 죽은 형과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낍니다. ‘분명하지 않은 책임’ 때문에 이 네 사람 모두는 죄책감과 억울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3. 두 작품의 주인공은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겁니다.
미정은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합니다. 마녀라는 소문은 고향 전체에 퍼집니다. 미정은 고향을 떠나 홀로 도시로 향합니다. 하지만 도시도 그녀를 반겨주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거듭되는 사고에 대학도 중퇴하게 됩니다. 미정은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가능한 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동진은 미정과 관련된 사고가 우연의 일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계학을 전공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동진은 통계를 통해 일련의 사고들을 우연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동진은 미정을 사랑하면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도 동진은 ‘미정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는 대신 본인의 목숨을 걸고 죽음의 법칙을 찾아갑니다.
마왕의 한 주인공인 태성은 자신이 느꼈던 고통을 오수가 느끼도록 치밀한 계획을 짭니다. 태성은 사람들 사이의 원한관계를 이용해서 오수에게 복수를 합니다. 태성은 오수의 주변 사람들을 다른 사람을 이용해 죽입니다. 그리고 오수가 처벌을 받지 않았던 논리와 동일한 논리를 들어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다른 주인공 오수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을 향한 복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수는 연이은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극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또한 오수는 추악한 진실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하지만 오수는 계속 살고 싶어 합니다. 오수는 자신이 도망치고 싶어 하던 과거를 되짚어 갑니다. 오수는 영철에게 사과를 하고, 살기 위해 좋은 놈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합니다.
네 주인공은 본인의 양심에 따라 나름의 해답을 찾습니다. 미정은 회피를, 태성은 복수를, 동진은 함께 사는 법칙을 찾는 것을, 오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4. 두 작품은 각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동진은 미정을 사랑하면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법칙’을 찾습니다. 미정도 자신만이 알 수 있었던 마지막 법칙을 찾습니다. 두 주인공은 오랜 시간을 들여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습니다. 동진은 마남인 중혁에게 이 법칙들을 알려주고, 중혁도 은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됩니다. 네 사람은 더 이상 죄책감이나 불안함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복수가 진행될수록 태성과 오수는 서로가 닮아있음을, 두 사람의 삶 모두 태훈의 죽음이 있던 때에 멈춰있음을 깨닫습니다. 오수는 태성의 입장을, 태성은 오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용서하게 됩니다. 태성은 자신의 복수에도 끝이 오기를, 자신이 멈추기를 바라게 되지만, 이미 시작된 복수를 멈추지 못합니다. 태성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결국 죄책감에서 벗어난 동진과 미정은 함께 살아남고, 양심의 가책을 계속 느끼던 태성과 오수는 함께 죽음에 이릅니다.
5.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미정과 중혁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미정은 고등학교, 고향, 대학교, 도시라는 사회에서 사실상 추방당하지만, 중혁은 학교와 직장에서 나름 인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작품 안에서도, 중혁이 (굳이 대응하는 단어를 찾자면) ‘마남’임을 눈치 챈 사람은 오직 동진뿐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주연과 조연의 차이이겠지만, 중혁이 주인공이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6. 이야기 속에서 중혁은 감정이 없는 남자처럼 묘사됩니다. 중혁은 운명에 빠지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이며 삶을 유지 합니다. 중혁 역시 피해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거리를 두지만, 중혁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사고의 책임을 중혁에게 묻지 않습니다. ‘불분명한 책임’도 문제이지만, 주인공들을 고통스럽게 한 숨겨진 원인은 그들의 ‘흔들리는 마음’, ‘죄책감’입니다. 주인공들이 다른 사람의 죽음에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7. 마녀와 마왕은 불분명한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분명한 책임은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책임의 범위를 분명히 정하는 것, 그래서 양심 있는 사람들의 삶이 오히려 고통스러워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입법자와 행정가, 법조인이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지금 결국 누구의 책임인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써지지 않는 서면 위에서 고민하고 계시다면, 쉬실 때 ‘마녀’나 ‘마왕’을 만나보심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