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깜깜한 새벽, 다시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 이유정(민변 사무차장)
언제부터인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이 심드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새해가 시작된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운동을 시작하고, 영어학원에 등록을 하고,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하는 일들이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2002년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월드컵과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1년 동안 시끄럽겠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2002년 한 해 동안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서른 다섯 해 가운데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월드컵 기간동안 전국을 뒤덮은 붉은 악마의 함성,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고 불평등한 SOFA개정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대, 그리고 노사모와 희망돼지저금통으로 상징되는 자발적인 정치참여문화 등… 이 모든 것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이처럼 숨가쁜 변화 속에서 정신없이 바쁜 한해를 보내며, 나는 마음속에 뿌리깊게 남아있던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내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의 변화. 그것이 작년 한해동안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2003년 새 아침을 맞는 느낌은 여느 해와는 다르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 위에 함부로 발자국을 내지 못하고 망설일 때처럼 설레
고 조심스럽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올 한해 우리사회를 어디까지 이끌고 갈지.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민변의 역할도 많이 달라질 텐데, 비판과 참여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새해에 민변이 풀어야 하는 과제들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과제라고 하더라도 회원들의 힘과 지혜를 모으면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민변의 회원 모두가 “깜깜한 새벽 다시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2003년을 시작했으면 한다. 이것은 새해를 맞는 나의 다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