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문제연구위]9.11테러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2002-05-30 111

안녕하세요.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입니다.

지난 9.11테러 사건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있어 여기에 게재해봅니다.
아래 별표 문장을 클릭해보세요~

*한호석소장(통일학연구소)의 9.11테러에 관한 논문

*”한겨레 21″에 실린, 프랑스 언론인 티에리메쌍이 펴낸 <2001. 9. 11. 믿을 수 없는 협잡극:펜타곤에 충돌한 여객기는 없었다>

*”시사저널(637호)”에 실린, 독일정보전문가 뷸로프가 제기한 <9.11테러자작극설>
(아래 글 참고)

‘미국의 대도시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벌인다. 미국 여객기를 납치한다. 관타나모에 있는 미국 해군기지를 폭파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테러 작전의 이름은 노스우드(Northwood).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조직 알 카에다가 꾸미고 있음직한 이런 시나리오를 미군 합참본부가 1962년에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폭로한 인물은 제임스 뱀포드. 그는 1982년 자금·인원·기술 장비 면에서 중앙정보국(CIA)을 능가하는 비밀 조직인 국가안보국(NSA)의 비밀 공작을 다룬 <수수께끼 궁전>을 펴내 추적 보도 기자로 이름을 떨쳤다. 뱀포드는 그후 20년 동안 국가안보국의 비밀 정보를 계속 추적해 지난해 펴낸 (<미국 국가안보국 NSA>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판)에 담았는데
‘노스우드’는 바로 이 책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합참본부는 미군과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벌이고 이것을 쿠바 카스트로 정부의 범죄로 꾸며 쿠바 침공에 필요한 여론을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거부해 비밀 문서실에 묻혀 있었다. 뱀포드는 케네디 정부가 이 작전을 승인했다면 미국의 비밀 공작 가운데 가장 추악한 사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스우드 작전의 전문은 지난해 말 기밀 해제되어 ‘워싱턴 안보 사료실’을 통해 읽어 볼 수 있다.

미국 군부가 자국 시민과 군대를 상대로 테러를 벌여 전쟁 구실을 만든다는 발상을 했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 시점은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2월15일 쿠바 거주 미국 시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아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쿠바를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은 국제재판소나 중립국과 사건을 공동 조사하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조사했다. 그 후 함선이 외부로부터 받은 공격으로 폭파되었다고 발표하고 함선을 바다 쪽으로 끌어내 외부에서 조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은 조사 발표 하루 만에 스페인에 쿠바 개입을 포기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고, 언론은 스페인의 테러에 보복하라고 선동했다. 4월10일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요구한 모든 조건에 따르겠다’는 전문을 받았지만 바로 다음날 선전포고를 하고 23만 명을 동원해 쿠바 봉쇄 작전을 벌였다. 미국 역사가들은 미국이 쿠바의 독립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스페인의 항복 선언도 무시하고 무력을 투입했다고 분석한다.

스페인 전쟁 후 13년이 지난 1911년에 주목할 일이 벌어졌다. 함선 메인이 인양된 후 선박업자들이 몇 달 동안 조사한 결과 함선이 내부에서 폭파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외부공격설을 뒤집는 이 조사 결과를 미국 해군은 폭파 사건 후 90년 만에 인정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쿠바를 장악하려고 함선 폭파 사건을 꾸몄고, 여기에 쿠바의 사탕 산업을 노린 미국 은행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스페인 전쟁은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으로 패권을 확대하는 전초전이었다.


  21세기 전쟁의 막을 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바로 스페인 전쟁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전쟁의 계기가 된 테러 사건의 진상 조사를 미국이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부시 정부는 지난 1월 말, 국회에서 9·11 테러의 진상을 조사하자는 민주당의 제안을 거부했다. 지금은 국력을 분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 조사를 더 미룰 수 없다는 여론도 커지고 있다.

독일의 변호사 뷸로프(65)는 바로 유럽에서 이런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로 주목되고 있다. 뷸로프는 사민당
국회의원(1969∼1994년)으로서 국방부 차관과 과학기술장관을 지내고 통일 이후에는 국회 정보부 통제위 소속으로 활동해 독일에서는 손꼽히는
정보 전문가이다. 서방 정보부와 국제 테러의 유착관계를 파헤친 저서 <국가라는 이름으로>(1998년)는 마치 ‘반테러 전쟁’의 시작을
예언한 듯한 구절로 가득차 있다. 9·11 이후 독일의 일간 신문과 공영 라디오, 공영 텔레비전에 소개된 그의 발언은 유럽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9·11 사태에 대해 미국과 서방 언론이 유포하는 ‘공식 버전’은 믿을 수 없으며, 서방 언론은 바로 이 근거
없는 ‘공식 버전’으로 여론을 속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발표된 납치범 이름, 탑승객 명단에 없어

그는 ‘9·11 공식 버전’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전세계에 감청망을 갖고 있는 미국의 비밀 정보부들이 9·11과 같은 테러에는 무방비였다고 말하면서 이틀 만에 아랍계 테러범 19명의 완벽한 신상 명세서를 내놓았다. 그런데 CNN이 공개한 탑승객 명단에는 이들 이름이 없다. 더구나 이들 중 적어도 7명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납치된 여객기 조종사들은 아무도 관제소에 긴급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미국의 비행 학원에서는 그곳에서 수업을 받았다는 납치범들이 경비행기 조종도 못하는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납치된 여객기를 군 작전을 방불케 하는 궤도를 그리며 목표물에 충돌시키는 정밀 비행은 누가 했으며 19명이라는 납치범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중에는 아랍어 비행 교습책을 택시에 두고 내리고 유서가 든 손가방을 화물칸에 맡긴 사람도 있다. 정밀 비행 테러를 준비하는 마지막 시간까지 비행 교본으로 공부를 하고 아무도 찾을 사람이 없는 가방까지 준비했으니 어떻게든 자기들이 아랍인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던 것같다. 신분 위장을 해야 할 테러범으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다.

블랙박스 7개는 어디로 사라졌나

뷸로프는 여객기가 원격 조종되었을지 모른다는 영국 항공 전문가들의 분석을 소개했다. 여객기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조종사가 통제할 수 없는 항로를 따라 공격 목표에 충돌했다는 것이다. 항공 전문가들은, 납치된 여객기를 원격 조정해서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기술을 미국이 오래 전에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이 기술이 테러 공격에 사용되었을지 모른다는 지적이다. 이 문제를 푸는 정답은 비행 기록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를 열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발견된 블랙박스는 하나뿐이며 그 내용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항공 전문가들은 원격 조종 장치가 가동할 경우 블랙박스는 작동을 중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블랙박스가 공개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원격 조종 장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객기에 2개씩 탑재된 블랙박스 8개 가운데 7개가 사라졌다는 것도 의혹을 사고 있다. 무역센터에 충돌한 여객기의 블랙박스는 고열 속에 파괴되었다고 해도 나머지 두 여객기의 블랙박스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9·11 당일 무역센터에서는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약 1억 달러 규모의 금융 이전 거래가 있었다고 한다. 그 거래의 내막을 추적하는 작업을 독일 정보 보안업체가 진행 중인데, 이 업체는 무역센터 현장에서 발견된 컴퓨터의 디스크를 꺼내 거의 완벽하게 데이터를 복원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렇다면 사무실의 컴퓨터 정보도 복원하는데 블랙박스를 복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좀처럼 파괴되지 않는 블랙박스가 7개나 사라진 반면 납치범의 신분증이 무역센터 1층에서 발견되었다. 여객기에서 흘러나온 신분증이 불길을 뚫고 무사히 1층까지 내려왔으니 블랙박스가 사라진 것만큼이나 진기한 일이다. 블랙박스의 행방과 관련한 또 다른 의혹은 여객기 4대가 무역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하기까지 왜 공군의 방어 조처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백악관 주변에는 앤드루 공군기지가 있다. 이곳에 주둔한 전투비행단은 비상시 대통령 전용기와 펜타곤 본부를 방어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미국 정보 분석가들은 사건 다음 날 앤드루 공군기지 웹사이트가 내용이 바뀌어 비상대비 업무를 삭제했다고 지적했다.

테러 공격을 방치한 책임을 의식한 조처로 보인다. 미군은 사건 당일 앤드루 기지에 전투기가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4대의 여객기가 모두 떨어진 후에야 앤드루 기지에서 워싱턴 엄호를 시작했다는 보도와도 엇갈린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해 유명해진 우드워드 기자는 9·11 당일의 정부 동정을 취재한 기사에서 펜타곤이 여객기 납치 사태를 파악하고 요격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펜타곤이 공격을 받기까지 출동한 요격기가 없었다는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이때 보스턴 주변 기지에서 요격기가 뉴욕을 향해 이륙했는데 무역센터가 공격을 받을 때는 100km 밖에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 여객기가 펜타곤에 충돌한 것은 무역센터가 공격받은 후 약 40분 후였다. 그렇다면 이 요격기가 펜타곤으로 방향을 돌리지 않은 것도 의문이다.

테러 직전, 두 항공사 주식만 ‘대량 거래’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무역센터 내부에 입주한 투자사와 민간 항공사 주식을 사고 파는 대량 거래가 있었다. 이 중 항공사 거래 종목에 든 것은 우연하게도 납치된 여객기가 소속된 두 항공사뿐이다. 필시 테러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경로를 거쳐 이런 정보에 접한 것인지 또 금융 당국에 대한 수사 결과는 언제 공개될 것인지 아직 밝혀진 사실이 없다. 뷸로프는 국가 권력과
금융 권력을 건드리지 않는 한 언론이 진실을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9·11 테러를 둘러싸고 이렇게 떠오르는 의문에, 뷸로프 자신은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 해답을 찾는 것은 국회나 수사기관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널려 있는 의혹을 방치하고서는 어떤 답변도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반 테러 전쟁은 냉전 시대가 끝난 후 ‘적’을 상실해 위기에 빠진 군산복합체가 새로운 ‘가공의 적’을 만들어 탈출구를 찾는 과정이라며 ‘테러 대 반 테러’라는 조작된 대결 구도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경고이다.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