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폐기가 대한민국 정체성 뒤엎는다?

2004-09-08 253

“한나라당, 헌법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요즘 들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고 상대방에 대한 공격수단으로만 쓰이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명시하고 있다. 결국 그 정체성이란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자인 공화국이란 뜻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엎는다는 것은 주권을 국민으로부터 빼앗아 누군가에게 넘겨준다는 뜻 일게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방송프로에서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을 가지고 한나라당은 즉각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뒤엎는다’고 반발하였다. 한나라당의 말대로라면 대통령은 내란을 선동한 것이므로 당장 권좌에서 물러나 준엄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과연 그런가. 대통령의 발언의 취지는 국보법이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법으로서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이고,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라고 지적하면서 야만에서 문명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국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말 중 어디에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강탈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는가. 군사독재정권인 3공과 5공의 정통성을 승계하였다고 자임하는 한나라당 대표조차도 국보법이 지금껏 독재정권에 의해 악용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또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발언이 ‘헌재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여 그 권위를 정면으로 거부했다’고 반발한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국보법 일부조항을 합헌이라 발표하면서 재판관이 아닌 일개 연구원이 국회에게 경고성 발언을 하여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대법원도 국보법 관련 사건 판결을 하면서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적이 있다. 이런 판결들은 사법부가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중대한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게 한다.

  헌법상의 국가권력에 대한 기본 원칙은 삼권분립이다. 삼권분립원칙은 권력이 특정기관에 집중되면 남용되기 마련이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에 따라 헌법에 명시된 것이다. 우리 헌법은 입법부에게 법률의 제정과 폐지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고, 사법부에게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사법부가 입법부에 특정법률의 개폐여부에 관련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중대한 헌법침해행위이다. 이번 사법부의 발언은 흡사 1987년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구헌법을 ‘호헌’의 명분으로 폭압적으로 수호하려 하던 전두환 정권을 연상시킨다. 그때도 구시대의 낡은 유물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세력들은 마지막까지 ‘호헌’을 외쳤고, 반대자들을 체제전복세력이라며 국보법으로 처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권자인 우리 국민은 ‘직선제 쟁취, 호헌철폐’를 외치며 독재정권의 전횡에 항거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한 87년 6월 민주항쟁을 일으켰다. 사법부의 월권행위는 현 사법부가 과거 전두환 정권의 전철을 되밟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한나라당은 북한의 핵보유 의혹도 있는데 국보법을 폐기하는 것은 안보적, 사상적 무장해제와 다름없다고 반발한다. 도대체 국보법과 북한의 핵보유가 무슨 상관인가. 국보법이 북한의 핵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건가. 핵폭탄을 법전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면 이건 정말 억지라고밖에 할 수 없다. 북한의 핵문제는 남북, 국제관계에서의 긴장관계의 문제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는 화해와 긴장완화 정책이다. 국보법을 고집하면서 북한을 계속 적으로 규정하고, 자극하자는 주장이 오히려 남북간의 긴장을 고조시켜 북한의 핵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이제 평범할 뿐인 상식이다.
  
  최근의 정체성 논란을 보면서 아무리 지탄받는 정치인들이지만 국가의 정체성을 논하려면 최소한 헌법은 한번 보라고 충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 <프레시안> 2004. 9. 7. 송호창변호사 긴급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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