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안재성과 함께하는 9. 23. 공부모임

2008-09-19 176

9. 23.(화) 19:00 독서모임에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현상 평전] 외에도 [청계 내 청춘(청계 피복노조의 빛나는 기억)] (돌베개) 등 의미있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독서모임 당일 이천에서 올라오십니다.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탄을 맞은 시체로 발견되어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는 이현상-그게 꼭 55년 전 9월입니다.

책 속에 닮긴 이야기는 물론, 닮지 못한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될 듯합니다.

일시 : 9. 23.(금) 19:00
장소 : 민변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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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 작가 선언](3) – ‘이현상 평전’을 펴낸 소설가 안재성

안재성(소설가)

세상에는 현실과 다른 헛소문이 떠돌곤 합니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괴담도 그 중 하나입니다. 벌써 십여 년 동안 여러 평론가들이 거듭해서 사실주의 문학의 죽음을 선언해 왔습니다.


진실보다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믿는 그들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이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관념적이고 사적인, 실험적인 작품들이 한국문학의 주류가 되었다고 진단하고, 그런데 도무지 이런 작품들이 팔리는 기색이 없으니까 이제는 문학은 죽었다고 과감히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진단하는 의사는 당장 돌팔이로 매장될 텐데 멋대로 문학 전체의 죽음을 언도하는 평론가들은 교수로, 학장으로 승승장구하니 참 요상한 세상입니다.


사실주의 문학은 죽었다





▲ 안재성 소설가
출처: 오도엽

그들이야말로 80년대 후반기 겨우 십여 편의 장편 노동소설이 나왔을 때, 마치 노동문학이 한국 문학판을 점거한 듯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만, 그들이 오늘날 한국 문단의 거의 모든 문학상과 출판사를 장악하고 자신들이 세우는 가상의 잣대에 맞지 않는 작품들을 걸러내느라 열심인 꼴을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한국 문학의 진정한 문제는 평론가들의 요설이나 출판사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진 무수한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써내지 못하는 우리 작가들의 문제라고 봅니다.


문제는 작가다


요즘 문학상 응모작의 절대다수는 관념적이거나 사적인 글들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찰이 들은 좋은 작품을 발견하기는 매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설사 좋은 작품이 있다 해도 응모작의 주류인 관념주의적인 작품들 중에서 하나를 뽑겠지만, 진보적 이념을 가진 작품들이 대중에게 다가갈 만한 흡입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특정한 특정 다수가 아니라, 적어도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진 30% 정도의 진보적인 대중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입니다.


이는 명백히, 독자들을 흡인하지 못한 작가들의 능력의 한계이거나 혹은 판단의 잘못입니다.


별로 해보지도 못한 노동문학의 실패가 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부정하거나, 섹스나 폭력 같은 상업적인 기법들을 동원하면 읽히지 않을까 하는 얕은꾀에 빠져버리거나, 아니면 자기연민에 푹 빠져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너무나 무겁고 지루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노동문학의 실패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너무 게으른 건 아닐까요? 아무리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더라도 작가로 등재한 이상, 혹은 문예운동가로 나선 이상 혼신을 다해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뛰어난 글재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시인, 소설가들이 생활을 이유로, 신변잡사들을 핑계로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않고 술에 묻혀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문학의 현실에 대한 장황한 진단을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리얼리즘 작가들을 질타하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리얼리즘 작가의 자기반성


어떤 위대한 개인도 그것을 밑받침해 주는 토대가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유구한 한옥의 전통 속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만들어지고, 석조건물의 전통 속에 콜롯세움이 만들어집니다. 에디슨이 조선 땅에서 태어났다면 뛰어난 대장장이에 불과했겠지요.


오늘의 문학 풍토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과 사회에 빛이 되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리멸렬하게 무너져가는 진보적 리얼리즘 작가들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저급한 문학풍토에 치어 자포자기하고 있거나, 정도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고 나섰다가 진흙수렁에 빠져있거나, 아니면 열의는 가지고 있어도 경험이 부족한 사람까지 포함하여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실천적 작가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힘을 모아 싸워나가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싸우는 조직이 필요


이를 토대로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이 이뤄진 바탕 위에 우리 중의 누군가는, 혹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지요.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자체가 이미 관념주의 문학에 대한 경고이며 이 땅을 지배하려드는 불의의 세력과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민족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오만 잡다한 경향이 집합되어 있는 진보문학 진영과의 차별화입니다. 명백히 민중주의 문학운동의 복권이자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한 재 선언입니다.


현실참여문학의 재 선언


따라서 저는 기왕에 리얼리즘 문학을 했다 해서, 명망이 있거나 연배가 높다 해서 가입을 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에 출판된 한국문학전집에 이름이 오른 작가 중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지요?


명망이란 진실로 하찮은 것입니다. 우리는 작가들이 들어오고 싶다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좁은 문을 세우고, 꼭 필요한 사람들만을 선별하고 초청하여 들여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신이 발전한다는 진단 이외의 예언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제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오늘 이뤄지고, 또 오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내일은 현실이 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은 질곡에 빠져버린 한국 문학을 되살리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리얼리스트 작가들이 모여, 오늘의 문학판을 뒤집어 버리고,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갑시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또 가능한 일입니다. 리얼리스트 작가들이여! 함께 합시다!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선생의 평전

이현상(1905~1953)의 생애가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에 의해 복원, 출간되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남부군 총사령관’…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에 비하면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진 것은 사실 전무하다시피 하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분단된 후, 반공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우리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왜곡,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현상. 분명한 것은, 그가 추구한 이상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그가 대항해 싸운 적들의 부당성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식민지 약소민족의 주권을 위해, 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인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여 모든 것을 바친 세계적인 혁명가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실로 그가 이끈 유격대의 규모와 전적, 그리고 그 끈질김은 세계의 민중혁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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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이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거니와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던 작가 안재성은,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역사 인식에 바탕하여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영웅 이현상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최후의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삶과 투쟁의 기록

이현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4남2녀 중 다섯째(4남)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이씨 양반가로 부친은 부농이었던 진사 이면배였다.

그는 중앙고보 재학 중이던 1925년부터 박헌영 등과 함께 공산당운동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7년 휴학 중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 청년들의 모임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1928년 8월 구속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총 12년간의 감옥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적극 가담하며, 남로당 연락부장, 간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공산당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월북한다. 1948년 다시 서울로 내려온 그는 빨치산투쟁을 위해 그해 11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그는 ‘조선 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지리산 등지에서 치열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경상도,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 인공이 수립되자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에서 하산하여 낙동강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미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한다.

1951년 7월 그는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총사령관의 위치에 오른다. 그러나 1953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과 함께 남로당 계열이었던 박헌영, 이승엽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된다.

그해 8월 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와 결정서 9호, 9월 6일의 결정서 10호에 따라 제5지구당은 해체되고 위원장이었던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의문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체로 발견되어 화개장터 앞의 섬진강변에서 화장되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평범한 키에 언제나 과묵하고 우수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대원들을 아끼고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으며, 남부군뿐 아니라 빨치산 모든 대원들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그 수많은 대원들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갈구했던 그래도, 큰 바위처럼 기대고 싶었던 선생님이었다.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 본문에서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그 어떤 문제를 놓고도 장황하게 말하는 법이 없고, 당 이론에 관한 것이면 안 읽은 게 거의 없으면서도 토론을 즐기지 않았다는 분. 지쳐 쓰러진 대원의 짐을 손수 짊어지고, 대원들의 시체를 볼 때마다 땅속 깊이 묻어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유일한 반찬으로 마련된 고추장 한 보시기를 굳이 가져오게 해 손수 나뭇가지를 꺾어 일일이 찍어 먹였다는 분. – 조정래, [태백산맥]10권에서

일제시대,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친 그의 여러 행적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빨치산 투쟁 전적만으로 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잔혹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 속에서 그것은 그저 작은 관목 한 그루일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민중혁명가

오늘까지도 이현상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삼십 년 세월을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받드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산주의자로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범죄시해왔다.

그러나 이현상은 한국 현대사의 격류를 건너갈 때 반드시 딛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전설적인 민중혁명가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모진 고문과 회유, 12년간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변절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더욱 가혹해진 탄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던 철저한 사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오직 민족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외세와의 투쟁에 모든 것을 바쳤던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었다.

지리산에서 고군분투하던 이현상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박탈했던 북한은 이현상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지자 다시 영웅으로 복권시켰다. 북한은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날짜로 이현상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으며 지리산으로 영웅훈장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1968년에는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제1호로 만들었다. 시신 없는 가묘였다. 이후 북한이 제정한 제1호 열사증을 추서 받았으며 사망 삼십칠 년 만인 1990년 8월에는 다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60여 컷의 화보 속에는 1990년대 중반, 최초로 공개된 이현상의 직계가족들 사진도 수록하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월간지 중 하나인 [금수강산]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시, 안내를 맡았던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을 비롯한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다.

김성동 선생의 발문은 [이현상 평전]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되살려준다. ‘남부군을 위한 변명’ 이라는 제목으로 80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에 담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참으로 깊고 생생하다.

김성동 소설가의 발문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호치민,티토,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게바라를 넣어서 위에 든 반제국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혁명에 성공해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새 세상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그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그리고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박주일배라도 올려야 한다.

현기영 소설가의 추천의 말

삼천리 오대악 중에 유일하게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하였다 하여 ‘불복산’이라고 불렸던 지리산은 조국 분단을 반대한 이현상 유격대의 항쟁으로 인해 또 한 번 ‘불복산’이 되었다. 민족 수난과 항쟁을 고스란히 보듬어 안은 지리산, 그 산의 얼굴을 닮은 이현상, 그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조정래 소설가의 추천의 말

우리의 비참한 식민지사와 서러운 분단사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 이현상이다. 그의 평전이 출간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민족통일을 절반쯤 이루어가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료 도움 – 실천문학사




덧붙이는 글

소설가 안재성은 강원대학교 재학 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제적되었다. 1983년부터 10여 년간 구로공단, 청계피복노동조합,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3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등의 장편소설과 [경성트로이카], [이관술 1902-1950], [청계피복노동조합사]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집필했다.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며, 리얼리스트 작가들의 새로운 결집을 준비하고 있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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