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 마세요?
퀴즈 하나
– 다음 노래를 부른 사람은?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내가 아는 정답은 문주란이다. 내가 살아본 ‘과거’가 그 정도이기 때문에. 하지만 가요무대를 첫 방송부터 즐겨 본 사람이나 우리 부모님들이라면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 노래의 원조가수를 ‘나애심’이라 답할 것이다.
퀴즈 둘
–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사람은?
“과거의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밝은 면을 이어받아 발전시켜야 합니다. 뒤만 돌아보고 있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발목 잡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중략) 한국과 일본도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합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답이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검색창에 ‘삼일절 기념사’라고 쳐보시면 된다. 의례적인 기념사 같은 것들에 식상하신 분들도 검색창에 뜨는 이 기념사 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한번 읽어보시라. 여든 아홉 번째 3. 1.절 아침에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독립유공자들”께 했다는 이 기념사를!
과거의 힘
‘역사’를 주제로 삼아 독서모임에서 처음 읽은 책은 『과거의 힘』이다. 모임에 참석한 어느 변호사님의 말처럼 제목 자체가 기가 막히다. – ‘The Powers of the Past’
저자 하비 케이(Harvey J. Kaye)는 진보적 역사연구 학풍으로 유명한 미국 위스콘신 대학‘위스콘신학파’의 일원이라고 한다. 책이란 읽는 시기에 따라 그 느낌과 감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발제를 맡아주신 변호사님께서는 이 책을 탄핵정국과 총선 이후의 상황에서 읽으셨다한다. 광화문의 촛불도 그 이후의 변경된 정치지형도 이젠 모두 ‘과거’가 된지 오래다. 하지만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요즘 오히려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서론부터 5장까지를 꼼꼼히 읽다보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 보자.
3월 월례회 때 김수행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전후 서구유럽에서 이루어졌던 노-자 합의가 깨어진 것”을 말한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는 적자예산, 완전고용 성취, 복지국가 유지를 내용으로 하는 “케인즈식 사회민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도 “국가에 의해 천명된 자본과 노동의 약정”이라 불리는 자유주의적 합의(liveral consensus)가 유지된다.(71쪽)
그런데 위와 같이 유지되던 ‘합의’가 ‘해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합의의 해체’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는 1979년 영국 보수당 대처의 집권과, 1980년 레이건의 집권이다. 대처는 전후 합의를 “사기”라고 부르고 그것을 믿는 보수당 지도자들을 “반역자”로 몰면서 격렬히 비난하였다. 레이건은 조세감면, 사회복지지출 억제를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를 내세워 강경한 국내외정책을 표방한다.
저자는 위와 같은 ‘합의의 해체’와 이로 인한 역사학의 위기를 A. Gramsci의 헤게모니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잘 아는 것처럼 Gramsci에게서 헤게모니란 “한 계급이나 집단이 타계급들을 강제력보다는 합의를 통해 압도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유럽(영국)과 미국의 경우 전후 합의는 ‘헤게모니적 지배’의 대단히 성공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후 6-70년대를 거치면서 일어난 ‘합의의 해체’는 ‘헤게모니의 위기’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05쪽)
저자는 헤게모니적 질서의 추구수립유지를 위하여 성취되어야 할 조건으로 Gramsci가 언급한 다음 4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지식인 엘리트의 창출과 조직(106쪽), 둘째, 다른 사회계급과의 동맹 또는 연합체의 결성(107쪽), 셋째, 국민적민중적 이해와 열망에 호소하는 이념의 정교화 즉 지배계급의 이념을 지배이념으로 만드는 것(107쪽), 넷째, ‘경제발전’에 대한 약속(111쪽)이 그것이다.
예컨대, 위 4가지 조건 중 세 번째 조건을 이 책의 주제에 대입시켜보면 “지배계급 지식인들이 현재의 사회질서와 발전 형태를 합리화, 정당화하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상들을 제시함으로써 집단적인 역사기억, 의식, 상상력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제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108쪽)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대처와 레이건이 영국과 미국의 과거에 대한 특정한 해석들을 열심히 동원”했으며, “단절과 쇠퇴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고취시킬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과거상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140쪽)
대처가 전후 사회민주적 합의를 비난하면서 ‘의존문화’와 이른바 ‘영국병’의 해결을 위해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나, 레이건이 ‘뉴딜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념’에 호소한 것이 그것이다.
– 저자는 대처와 레이건의 이러한 ‘과거의 남용’을 『미국 헤리티지 사전』에 나와 있는 ‘테러’에 관한 정의(지배권을 획득하거나 유지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폭력정책)를 원용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대처와 레이건은 (과거를 침입한) 테러리스트였다.”
기억의 정치 :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3. 1.절 기념사 이야기를 한 것은 괜한 시비가 아니다. 실언은 반복되지 않으나 의식적인 발언은 반복되는 법이다. 발언은 반복되고 있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다음 언술에 주목해보자.
“어떤 특정한 사건을 기억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각각의 정치 세력들은 자신들의 지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들을 기억하고자 하며, 반대로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는 사건은 애써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망각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사건을 기억하고자 하는 세력과 망각하고자 하는 세력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전개되기도 한다.”[김진균 편저,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2』, 김민환「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400쪽]
최근 논란이 되었던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보자.『과거의 힘』에서도 ‘역사교육’의 문제가 언급된다.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개편하려는 대처주의와 레이건 공화당의 신우익으로서는 당연히 교육문제, 특히 역사교육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공교육에서의 역사교육은 헤게모니 장악 프로젝트의 핵심적 목표가 되는 것이다.”(155쪽)
『한국 근현대사 대안교과서』에 대해 나온 반응으로 ‘좌파 교과서의 독을 빼다’라는 식의 칼럼-가소(可笑) -에까지 토를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논쟁도 격(格)이 맞아야 되는 법이다.
허나, 이 책의 저자들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 책과 관련한 친일파 논란은 과거 냉전 시대 ‘빨갱이’ 논란과 닮은꼴이에요. 평가주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거나 논박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외면한 채 국민정서를 등에 업고 우리를 수세에 몰고 갈 수 있는 일제강점기 관련 언급만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책이 보다 많은 학생 손에 들려 현행 교과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보충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한 과제예요”
– 내 생각으로 대안교과서의 저자들은 『과거의 힘』이 책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아니면 Gramsci를 읽었거나! 헤게모니 장악 프로젝트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다.
후기를 쓰는 동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인명사전 수록 인물 명단 공개가 있었다. 한번 그 반응을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마치며
이 책의 저자는 “역사가들이 스스로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보기를 제안”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시민이자 학자(citizen-scholars)’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Gramsci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김진균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역사의 어떤 사실을 헤게모니의 기억장치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역사 세우기가 달라진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망각’의 반대말은 기억이 아니라 ‘정의’라는 말”을 기억해두자.
기억투쟁을 위한 ‘진지전’에서 상대는 이미 강고한 참호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