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나라, 가난한 국민> 공부모임 후기-김선수 변호사

2008-04-18 207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또는 시민)]



공부모임 후기
– 김선수 변호사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대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



두 책 모두 일본에 관한 책이다.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은 네덜란드 사람인 카렐 반 월프런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에서 30여 년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바를 토대로 해서 일본을 해부한 책이다(1994년에 초판되었다). 반면에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은 일본 사람인 데루오카 이츠코가 몇 년간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바를 기초로 해서 객관적 시각에서 독일과 비교하여 일본을 평가한 책이다(1989년에 초판되었다).
일본에 대해 나라는 부자이나 그 구성원들은 가난하다는 문제의식은 두 책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그 구성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번역서의 제목이 하나는 ‘국민’이고 ‘시민’으로 다르다.
카렐 반 월프런은 ‘시민(citizen)’, ‘신민(subject)’, ‘국민(national)’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민은 국적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국가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반면에 시민은 정치적 주체로서, 항상 사회에서의 자기 운명에 관해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부정에 대해 분노하며, 사회문제에 관여한다. 소극성은 시민정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카렐 반 월프런은 일본의 국민은 아직 민주사회의 시민이 아니라는 전제에 서 있다. 원저의 제목은 『정치화된 사회의 허위적 현실(The False Realities of A Politicized Society)』로서 ‘가난한 국민’과 같은 표현은 없다.


데루오카 이츠코가 쓴 책의 원제목은 『풍요란 무엇인가(豊かさとば何)か)』이다. 책의 본문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쓴 부분들이 눈에 띄고, 국민과 시민의 차이에 대해 논의한 부분은 전혀 없다. ‘가난한 시민’은 번역자의 표현이다.


 


구성원이 가난한 나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2차 대전의 폐허 위에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20세기 말에는 미국을 추월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일부 있었다. ‘경제동물’이라는 국제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부가 그 구성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했고, 그 구성원들은 여전히 가난한(즉, 풍요롭지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장시간노동, 긴 출퇴근시간, 과로사, 토끼장 또는 새장과 같은 좁은 주거, 열악한 노인복지, 자연환경의 파괴, 의식의 획일화, 사회자본의 부족 등등이 구성원들의 가난한 삶의 형상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풍요’라는 개념으로 바람직한 삶을 표현하는데(그래서 책의 부제도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이다), 일본인의 삶은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주택, 노인복지, 자연환경 정책 등의 측면에서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여 일본의 열악한 현실을 집중 조명했다.


카렐 반 월프런도 일본의 중간계급인 샐러리맨들이 회사 일로 너무 많은 시간과 지적 에너지를 뺏기고 있어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가정생활조차 제대로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다고 분석한다. 일본 중간계급 남성이 회사에 대한 의무감이 강한 것은 사회가 정치화되어 있는 결과이다.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처자식과 같이 있는 것보다 직장동료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고 있다. 일본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중간계급은 철저하게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관료독재주의


 


카렐 반 월프런은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그 폐단의 궁극적인 원인이 문책에 응답할 의무(the absence of political accountability)를 결한 관료독재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에 있다고 본다.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관료독재주의는 민주주의 형태를 띤 껍데기 속에서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권력시스템을 말한다.
일본의 관료들은 경제성장을 유일한 목적으로 추구했고, 모든 것을 이에 종속시켰다. 정부 관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계열기업과 업계단체의 대표들, 검찰청과 사법부, 대학의 학자들과 언론사 편집자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관리자들(administrators)로서 사회의 지배연합을 구성했다.
55년 체제를 통해 보수진영의 자민당이 장기 집권을 했다. 1993년에 비자민연합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여 55년 체제가 종식을 고했다. 그러나 10개월만인 1994년 6월 다시 자민당이 포함된 연립정권이 성립하였고, 이후 자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카렐 반 월프런은 일본에서 법률은 관료들의 전용도구이고, 사법시스템도 관료들의 손 안에 있다고 평가한다. 최고재판소는 사무총국에 의해 지배되고, 사무총국은 법무성의 보수적인 고관에 의해 지배된다. 검찰은 일본민주주의의 적이다. 고도의 자유재량과 거대한 권력, 엄청나게 높은 유죄판결율 등을 통해 검찰은 기성질서인 관료독재주의에 기여한다.
일본은 법률의 불명확성으로 인한 관료의 폭넓은 재량이 인정되어 숨겨진 권력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비공식적 권력’과 ‘인맥’이 작동한다. 법률의 명문 규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규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관료들과 같은 권력을 갖는 입장에 있는 자에 대항할 유효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소할 대상이 없다는 의미이다.
관료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과 선전이 유포되어 허위적 현실로 되어 버렸다.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의 역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치가는 불안정하고 부패했다는 선전, 일본인은 문화적으로 조화를 존중하고 집단적 지향을 지닌다는 환상, 일본은 콘센서스 데모크러시(합의에 의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구미 제국의 관료가 받고 있는 의회에 의한 지배는 필요 없다는 거짓말 등이 동원되었다.



관료독재주의가 불러온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거품경제의 붕괴이다. 거품경제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은 계열시스템에 의해 정치적으로 보호된 대기업들이었다. 국민에게 저축을 강요하여 산업부문으로 부를 이전시키고, 증가된 저축은 부동산가격을 폭등시킴으로써 국민의 주거비용을 증가시켰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 발생한 거품경제의 붕괴는 가계부문에서 산업부문으로 한꺼번에 부의 이전을 초래했다. 그 과정에서 책임을 진 관료는 아무도 없었다.
카렐 반 월프런의 분석과 관련해서는 문화적인 맥락과 역사적 청산(특히 천황제의 청산)이라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이 보강되면 더욱 좋겠으나, 그의 분석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사회의 탈출구는? –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시민운동



카렐 반 월프런은 일본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전망한다. 일본은 조직적인 유해한 타성에 젖어 있는데, 이는 운영에 간섭할 책임이 있는 시민들의 근본적인 무관심과 조직을 운영할 책이 있는 관료들의 근본적인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카렐 반 월프런은 여기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국민 개개인이 민주사회의 주체로서의 시민으로 재탄생하고 시민사회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가 관료들을 통제하게 해야 한다.
시민은 먼저 일본사회의 구조와 작동원리 그리고 관료들의 구체적인 행태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관료들의 정책결정에 대한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야 하고, 시민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실제로 저자는 일본사회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한다). 관심 있는 시민들이 그림자 내각을 구성하여 정부 정책 등을 검토하는 것이 유용하다.
언론도 관료에 포획되어 있는데, 언론에 대해서도 시민의 입장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카렐 반 월프런이 제시한 언론에 대한 대책은 주요 언론의 편집자에게 편지쓰기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너무 안이한 대책이 아닌가?
카렐 반 월프런은 관료독재주의를 해부했지만 결국은 일본 시민의 무관심을 질타한 것이다. 무관심은 조직에 있어 최대의 위협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에게의 시사점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 초판된 것이 19년 전이고,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이 초판된 것은 14년 전이다. 그런데 위 책들에서 일본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국민들의 가난한 삶과 여유 없는 생활, 문책에 응답할 의무 없는 관료독재주의, 강고한 지배블록의 형성, 경제성장 우선주의, 빈약한 사회보험, 사회의 양극화 등등은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너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오히려 일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렐 반 월프런이나 데루오카 이츠코의 분석과 해결책은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유효하다.
일본에서 진보진영이 급격하게 쇠락한 계기는 1970년대 초 전공투의 좌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도 그 즈음 보수적 인사들이 장악했고, 진보적 법조인 단체인 청법회에 가입한 판사들에 대한 숙정작업도 이루어져 사법부도 철저하게 보수화되었다.
우리의 경우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의해 정권교체를 경험하였지만, 10년 만에 다시 정권을 탈취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 총선으로 국회도 보수진영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 버렸다. 일본의 55년 체제 또는 1970년대 이후의 보수화와 같은 상황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그렇게 될 경우 카렐 반 월프런이 끔찍하게 묘사한 모습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의 실천적 대안은 무엇인가? 어느 책을 읽든 우리의 논의는 최종적으로 이 문제로 귀착한다. 경쟁의 쳇바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그 흐름 자체에 파열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시대를 사는 진보적 지식인이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이다.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기본부터 다시 공부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