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나의 동양고전독법 후기 – 좌세준 변호사

2008-01-10 177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자 신영복 선생은 스스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 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신영복 선생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꼭 20년 20일을 복역하셨습니다.
아! 20년 20일. 상상이 되시는지요. 27살에 시작된 옥살이가 47살이 되어서야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 세월을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송구스러운 말이 될지 모르나 감옥은 때론 “고전의 학교”가 되고 “명작의 산실”이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가 선고한 20년 감옥생활이 낳은 그람시의 [옥중수고], 유신의 종말과 80년 5월 학살의 복마전 속 15년 징역을 견디어 낸 시인 김남주의 절창(絶唱) [나의 칼, 나의 피]는 모두 감옥이 그 ‘사상의 거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자신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 노촌 이구영 선생을 꼽고  있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4년 이상 같은 방에서 함께 지낸 이구영 선생은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였고,  청년기에는 항일운동을, 분단 이후에는 대남공작원으로 운명이 바뀌는 삶을 사신 분이라 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하신 삶을 사신 분”이라 하고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이름 ‘이구영’과 같은 국어사전 ‘290’쪽에 바늘을 숨겨두셨다는 노촌 선생. 바로 그 분이 옆에 계셨던 탓에 신영복 선생은 “그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시경(詩經)」으로부터 들어가는 신영복 선생의 동양고전 읽기는, 이 책의 말미에서 독자들에게 남기는 과제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선생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공자가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라고 시경을 평한 것은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임을 강조한 것이라면, 신영복 선생은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길 때 그 온전함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시와 산문 읽기를 통한 감성적  정서의 재무장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관계론의 보고 「논어(論語)」를 이미 원전으로 읽으신 어느 선배 변호사님께서는 논어를 접하게 된 계기로 돌아가신 홍남순 변호사님을 회상하셨습니다. “항상 온화하고, 말이 부드러우시며, 예절이 몸에 붙어 있으셨다”는 백발의 홍변호사님을 회상하시면서, 논어에는 ‘인간 공자’가 나온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하셨습니다.
– 논어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라는 구절은 “내용(質)이 형식(文)을 앞서면 거칠고(野), 형식(文)이 내용(質)을 앞서면 사치스럽다(史)는 의미입니다. 위 문구를 해석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상품을 선전하는 광고카피의 경우 “형식(文)이 내용(質)을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며, 현대자본주의 상품문화의 본질은 바로 “형식을 먼저 대면하고 내용은 정작 만나지 못하는 구조”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예리한 고전독법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맹자(孟子)」를 읽으면 “가슴이 트인다”는 표현을 쓰신 어느 변호사님의 말씀처럼, 맹자에는 당시 위정자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있습니다.
「맹자(孟子)」에는 “왜 하필이면 이(利)를 말하십니까”라며 초장부터 양혜왕(梁惠王)에게 대드는 맹자의 깡다구도 있지만,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의 진정한 의미-“바다처럼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라는 맹자의 성찰적 태도 또한 함께 담겨 있습니다. 개혁의 뜻을 품었던 조선의 몇 몇 선비들이 ‘눈빛이 지배(紙背)를 철(徹)할’ 정도로 정독하였다는 「맹자(孟子)」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노자(老子)」는 몇년전 어느 동양학자의 TV강의로 ‘노자 붐’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하는 ‘도가’를 가리켜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 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라 평하고 있습니다. 동양사상에는 유가를 중심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를 사전과 사후에 지양하는 체계가 이미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것이 바로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사상이라는 것입니다.
– 노자 제3장에는 “사부지자불감위야(使夫智者不敢爲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릇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벌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해석됩니다. 아주 거칠게 의역한다면 “뭣 좀 안다고 하는 놈들이 나대지 말도록 하라”라는 정도가 될까요.  신영복 선생은 위 노자의 문구에 다음과 같은 토를 달고 있습니다. 요즈음 시의적절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 장의 지자(智者)는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사람이며, 무언가를 하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노자적(非老子的) 성향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자(莊子)」에는 노자보다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이 있습니다. 하룻밤에 구만리 장천을 날아간다니 “구라도 이만 저만한 구라”가 아닙니다.
–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는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없는 ‘절대 자유’ 초월의 경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영복 선생이 평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본성의 최고 단계임”을 선언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식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말 따위는 장자의 시각에 의한다면 한낱 ‘꿈속 헛소리’가 되고 맙니다. 자본주의도 하나의 단계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한 미몽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동양고전에「묵자(墨子)」가 있었다는 것은 신선한 일입니다. 묵(墨)은 하층민의 이미지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조직이었음에도 2000년 만에 복원되었다가 우파와 좌파로부터 모두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한 사상.
– 그러나, 유가에 대하여 “남성우위 사상”이며 “상하 위계질서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비판을 하신 어느 변호사님의 말처럼, 묵가 조직이 강조한 ‘엄정한 실천성’과 ‘반전평화 사상’은 묵가사상에 우리들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순자와 법가 사상에 대한 소개도 나오고, 주역에 대한 독법이나 불교와 신유학에 대한 소개도 나오며, 이 부분에 대하여도 참석하신 변호사님들끼리 많은 토론이 있었으나, 이 부분을 온전히 옮기지 못함은 아쉬운 일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 “가슴에 두 손”이라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이나, 앞으로 읽으실 분들과 함께 생각하고 싶은 구절입니다.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