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후기

2008-01-10 110

법률에 대한 위헌심판권을 헌법재판소에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민의를 바탕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의회가 만든 법률을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엘리트 법관으로 구성된 사법부가 폐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바람직하냐는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답변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2004년 한국사회를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던 두 개의 헌재결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을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한 선관위 결정에서 시작된 탄핵심판과 행정수도이전 특별법에 대한 위헌판결 말입니다.

물론 탄핵심판과 위헌법률심판은 전혀 다른 제도이지만, 대통령과 국회라는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헌법기관의 정치활동에 대한 사법부의 제동이란 점에서 양자는 기능적으로 같은 범주에서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헌재의 두개 결정에 대해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아니 헌법이란 틀을 넘어서서 정당한 판결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앞의 질문과 달리 응답이 엇갈릴 겁니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관습헌법’이라는 헌법상으로 인정될 수 없는 법리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므로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질 수 있다고요? 관습헌법도 헌법상 원리라고 전제를 하면 또 어떤가요?

2004년 헌재결정으로부터 최장집은 ‘법관들은 민주주의 밖에서 법리를 근거로 민주주의를 심판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다 “‘법리’라는 말은 명시적으로는 정치를 비하하면서 암묵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범위를 축소시킴과 더불어, 파당적 정치를 초월하여 공익에 충실하고 이성적인 법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데올로기?)을 사회에 심는 것이다”라고 부연합니다.

사법제도와 사법부의 기능에 대해 상당한 도발이고 부정입니다.

다소 과하단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론 상당히 공감이 가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사법부가 의회가 만든 법률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민주주의 바깥에 있는 법관이 민주주의의 바깥에 있는 법리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심판하는 것이 정당한 제도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헌법원리의 근간을 뒤흔드는 반국가적 발상이라고요? 국가보안법 위반인가요? 헌법수호의 의무가 있는 법률가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위험한 상상인가요? 헌법상의 기본원리,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단지 현존하는 이론과 법조문을 암기하기만 했던 저로써는 헌법원리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적인 문제제기가 신선하기만 합니다.

법과 제도의 과잉, 사법부 기능의 확대, 특히 정치영역에 대한 사법부의 과도한 관여는 정치를 왜곡시킵니다. 법은 가정의 문턱뿐만 아니라 정치영역의 문턱도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례를 국가보안법으로 재단하여 학문영역의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또 어떤가요? 사법부가 정치의 영역에 과도하게 관여하면 정치는 다운사이징되고, 정치혐오관념은 더욱 심화됩니다.

정치의 결정체라 할 정당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정당이 자신이 기반으로 하는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고, 사회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면 정치는 더욱 혐오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 될 겁니다. 그러니 결국 대통령도 자신을 낳아준 당을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사법부에 돌릴 수는 없겠지만.

제왕적 대통령에 이어 제왕적 사법부의 출현은 국제적인 경향입니다. 이로부터 사법부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 갈수록 커져갑니다. 통치행위론, 합헌적 법률해석 등 기존의 이론만으로 제왕적 사법부에 대한 견제는 충분치 않은 듯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선 이제까지 당연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왔던 헌법원리와 기본질서까지 부정적으로 의문을 던지는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헌법은 선언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은 가능한가. 어떤 집단에 속한, 어떤 자격의 사람을 기준으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과연 정치적 평등이란 실현될 수 있는 것인가. 혹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평등권이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등등. 헌법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근본적 문제제기에서부터 헌법상의 기본원리의 하나 하나를 곱씹어보고, 그리하여 모든 자유와 권리, 제도 등등을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따라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개헌문제는 단순히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하는 차원을 넘어서 헌법이념과 헌법질서 전반을 점검하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미국헌법의 연방제, 양원제,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상원의 불평등 대표성 등을 분석하며 그 불합리성, 낙후성, 비민주성을 통렬하게 짚어내는 로버트 달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