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서경식 교수 강연 후기-김선수 변호사

2008-01-10 177

서경식 교수 강연 – 증인(프리모 레비)들이 죽어가는 시대

민변 월례회에서 초청
민변에서는 매월 1회 전체 회원들에게 공개된 행사로서 월례회를 개최하고 있다. 비회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은 참가할 수 있다. 올해 초부터는 우리 시대의 지성인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 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분들로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아랍전공자로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정수일 교수, 과거사문제에 대해 일가견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한홍구 교수, 방송인으로서 부부관계 상담으로 이름 높은 오한숙희 씨 등이 있다.
지난 6월 27일(수) 민변 월례회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이하 ‘서교수님’)를 초청하였다. 서교수님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일교포 형제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온갖 고초를 겼었던 서승, 서준식 형제의 친동생이다. 서교수님은 재일조선인의 처지를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 즉 학철부어(涸轍鮒魚)로 비유하고 있다. 옛날 강과 호수에 있던 우리들의 조상은 식민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흐름 속으로 끌려들어 갔고, 큰물이 빠진 후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재일조선인들은 남았다는 것이다. 수레바퀴 자국의 웅덩이는 염천(炎天)에 달구어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간다.(『디아스포라 기행』, 27-30쪽).

서교수님의 저술들
민변 내의 소그룹 중에 공부모임이 있다. 2주일에 한 번꼴로 책을 한 권씩 읽고 자유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공부모임에서 얼마 전에 서교수님의 『나의 서양미술순례』(창작과비평사)를 읽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05년 여름경에 위 책을 읽고 비로소 서양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후 미술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여 읽고 전시회에도 찾아다니게 되었다. 공부모임에서 위 책을 텍스트로 선정한 것은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고 또 발제를 했기 때문이다.
공부모임에서 서교수님 책을 다루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 서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구입해 읽었다. 『청춘의 사신(死神)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창작과비평사),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등이다. 모든 책들이 일관된 관점이 있고 글이 읽기가 쉽다. 책의 분량도 200 내지 300쪽 정도여서 읽기에 부담이 적다. 물론 서교수님이 지은 책들은 훨씬 더 많이 있다.
『나의 서양미술순례』와 『청춘의 사신』은 미술 관련 책인데, 화가나 작품의 선정이 고뇌하는 지성인의 품격을 엿보게 한다. 민변에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선정된 작품들이 대부분 너무 무겁고 어둡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역사와 사회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또한 진보를 향한 의지를 가진 인간들을 표현한 작품들로서 현재의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로 보였다. 강연 시작 전에 진행을 맡은 송호창 변호사(민변 사무차장)가 이에 관해 질문하였는데, 서교수님은 수천 년 전부터 인간성의 암흑과 어두움을 표현한 아픈 그림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러한 그림들을 지금의 내가 다시 보게 된 것은 예술과 예술가의 힘이라고 했다. 예술가가 우리에게 “이것을 보라. 이것을 직시하라.”고 질타하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서교수님 자신은 본인의 예술관이 ‘인간주의’적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예술작품의 배후에서 예술가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나는 작품 자체에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보다,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에게 관심을 갖는다.”(『청춘의 사신』, 11쪽)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서교수님이 쁘리모 레비의 궤적을 찾아 기행하면서 쁘리모 레비의 일생과 생각 및 역사적 의미와 서교수님 자신의 생각 등을 진솔하게 토로한 책이다. 쁘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살아남아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저서를 통해 20세기라는 잔혹한 정치폭력의 시대를 증언한 문학가로서 1987년 자살했다. 서교수님은 1996년에 쁘리모 레비의 무덤을 방문하였고, 1999년에 위 책을 출판하였으며, 2002년에는 위 책을 토대로 해서 서교수님이 직접 현지를 방문하고 설명한 『ETV2003 아우슈비츠 증언자는 왜 자살했나 – 작가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NHK에 의해 제작되어 2003년 2월 5-6일에 방영되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에서는 세계의 디아스포라와 그 예술을 소개하고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의 저자의 관점을 피력하였다. 원래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의미하였는데, 보통명사화한 디아스포라(diaspora)는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서교수님은 재일조선인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지칭한다.

기본적으로는 글쟁이
민변 월례회에서 서교수님의 강연 주제는 “증인들이 죽어가는 시대 – 프리모 레비의 자살부터 20년”이다. 민변에서는 월례회를 공지하면서 윤경원 숙명여대 교수가 서교수님을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한겨레21」 제528호(2004년 9월 22일) 관련 내용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강연 당일 민변 사무실에는 서교수님이 1999. 4. 8. 「도쿄신문」에 게재한 “증인들이 죽어가는 시대 – 프리모 레비의 자살로부터 12년”이란 글이 번역되어 놓여 있었다.
진행을 맡은 송호창 변호사는 서교수님에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이미지와 달리 도쿄게자이(東京經濟)대학 교수를 맡게 된 경위가 어떤지를 물었다. 서교수님은 기본적으로 자신은 학자나 연구자라기보다는 글쟁이라고 했다. 1990년대부터 글을 씀과 동시에 사립대학교에서 소수자 시선으로 본 인권과 차별 등에 대해 강연을 해왔는데, 도쿄게자이대학에서 특수성이 있는 사람을 초청하여 구체적인 소수자 및 차별문제를 강연토록 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2000년부터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인권과 소수자(minority) 강좌 중신으로 5강좌를 강의하고 있는데,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 일본식민지배의 역사, 나치의 문제, 성적 소수자의 인권 등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서교수님과 프리모 레비의 동질성
서교수님은 자신이 프리모 레비에 관심을 갖고 프리모 레비의 무덤을 찾아가고 책을 쓰고 또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첫째, 소수자(minority)로서의 동질성이다. 프리모 레비가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서 소수자였다면 서교수님은 재일조선인으로서 소수자이다.
둘째, 증언으로서의 문학에 종사하고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질성이다. 프리모 레비가 문학으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만행을 증언하였다면, 서교수님은 한국 감옥에서 참혹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형들을 대신해서 외부세계에 증언하고 재인조선인의 소수자로서의 지위를 글을 통해 증언하고 있다.
셋째, 일반대중이 망각에 빠져가려는 어려운 상황에서 기억의 투쟁, 증언의 투쟁을 하고 있다는 동질성이다.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가 종군위안부에 대해 증언한 이후 일본에서도 구체적인 증언의 시대가 열렸으나, 일본우익들은 이를 무시하려 하고 일반대중들은 손쉽게 망각하려 하고 있다. 망각하려는 일반대중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있는 서교수님이 프리모 레비에게서 모범을 보고 동질성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강연
서교수님은 프리모 레비의 인생궤적과 활동 및 자살 등에 대해 NHK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서 부연설명을 하는 형태로 강연을 진행했다. 다큐멘터리는 원래 90분 분량인데 적절하게 생략할 부분은 건너뛰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화면을 정지하고 설명하면서 진행했다.
다큐멘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알프스 부르송 산악지대의 레지스탕스 활동지역,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아파트와 무덤 등을 순차로 방문하는 모습을 담았다. 프리모 레비가 직접 설명하는 화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토리노에 살고 있는 프리모 레비의 지인과 프리모 레비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 대표와의 인터뷰, 1943년 프리모 레비가 잡히는 것을 목격하고 그 후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생환한 할머니들과의 인터뷰, 서교수님이 직접 해설하는 내용 등도 포함되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던 할아버지는 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느냐는 질문에 “자유가 인간의 원점이기 때문에 자유를 위해 참여했다.”고 답변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3개 부류로 구분되는데 공산당 계열, 정의와 자유(급진 리버럴) 계열, 천주교 계열이라고 한다. 프리모 레비와 위 할아버지는 정의와 자유 계열에 속한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생존한 할머니들은 팔뚝에 수인번호를 그대로 보전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 수인번호는 이름조차 빼앗기고 번호로 불리는 비인간화의 장치로서 일본과 한국의 감옥에서는 아직도 이름을 상실하고 번호로 불리고 있다. 위 할머니들은 산 증인으로서 팔뚝의 번호를 보여주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왜 전화번호를 팔뚝에 새기고 다니냐고 묻기도 한다고 했다.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이유와 경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대부분 가스실로 직행하여 즉결처분되었고 노동에 종사할 체력을 가진 사람들은 제3수용소(통상 ‘부나’)로 보내져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다행이 제3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증언하게 되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인간의 존엄성 파괴에 대한 인간으로서 수치심, 저항하지 못했다는 수치심, 소박하고 정직한 사람은 모두 사망한 반면 요령 있거나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한 자만이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등에 시달렸다. 그리고 증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에게 잊어버리는 것을 금하고 사회의 망각을 경계하면서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런 프리모 레비가 1987년에 자살하였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서교수님은 2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진군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이다. 피해자인 유대인의 조국 이스라엘이 공격적 국가주의 방향으로 나가면서 과거의 가해자 모습을 닮아갔다. 프리모 레비는 이스라엘의 철군을 주장하고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 밖의 존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과 시오니즘 및 이스라엘은 각각 수준에 차이가 있는데, 유대인이 대변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가 전부가 아니며, 유대인의 정체성은 시오니즘과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이 있으나 관용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내용으로 하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들과 이탈리아 유대인들을 프리모 레비를 배신자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둘째는 1986년경 독일에서 진행된 소위 ‘역사가 논쟁’이다. 역사가 논쟁에서 표면화된 수정주의자의 주장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선전하여 독일인들의 부담을 경감시킴으로써 독일 일반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프리모 레비로서는 일반대중들이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려는 현실에 저항할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프리모 레비는 사건의 증언과 증언의 불가능성이라는 2중의 증언을 수행했는데, 증언의 불가능성은 자살의 방식을 통해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프리모 레비의 묘비에는 이름 및 생존년도와 함께 수인번호(174517)가 새겨져 있다. 온 세계가 믿지 않더라도,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증언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증언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라도 증언하겠다는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 수인번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고학적으로 밝히는 과정에서 아우슈비츠의 참혹이 밝혀지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 시대에 주는 경고
일본은 식민지배, 특히 조선인에 가해진 만행에 대해 제대로 반성한 적이 없다. 한국정부도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은 채 65년 한일조약을 통해 민족적 요구를 포기해 버렸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구체적인 증언의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일본사회는 보수파가 승리하였고 진보적 진영조차 기본적으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일본 우파들은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문서자료가 없다든가 희생자들 증언에 일부 내재될 수밖에 없는 모순점들을 지적하면서 공격하고 있다. 결국 아직도 증언의 투쟁, 기억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증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거나 이에 무관심하면 제2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서교수님은 우리 사회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 접어들었고 과거와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불안하다고 하였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망각한다면 언제라도 그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서교수님은 다음의 말로 강연을 끝맺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질의시간에 일본문화의 한국 침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서교수님은 일본문화가 생활보수주의에 부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침투현상에 대해 솔직히 불안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서교수님이 디아스포라의 예민한 감각으로 민주세력의 집권 10년과 다음 대선 결과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궁금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선생님은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그것을 보는 편이 불안정하게 움직일 때는 달리 보인다.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소수자의 눈에는 보인다.’(15쪽)고 쓰셨습니다. 이는 소수자나 한계인이 예민한 감각으로 미세한 차이까지도 볼 수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우리 사회의 수구세력들이 민주정부 하의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지난 10년 동안 수구세력이 계속 정권을 유지했을 경우와 민주정부가 정권을 잡은 것에 차이가 없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올해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상관없다는 패배주의적 경향이 진보적 지식인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한계인의 입장에서 다음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서교수님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셨다. 한국의 구체적인 정치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고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주민등록체제를 갖추고 있고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국가에 대한 두려움, 한일협정을 재평가하여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전 민족적 차원에서 책임을 추궁하고 보상을 요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유추해볼 수밖에.

저자 친필서명을 받다
저녁 7시 30분이 조금 넘어 시작된 강연은 10시 20분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자리를 맥주집으로 옮겨 못다 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다. 월례회에는 약 40여 명이 참석했고, 술자리에는 15명 정도가 참석했다.
나는 서교수님에게 『나의 서양미술순례』의 계기가 된 첫 작품인 <캄비세스왕의 재판>에서 가죽껍질 벗김의 형벌을 받고 있는 판사를 혹시 형들을 재판한 판사들로 본 것은 아닌지 질문했다. 책에는 얼마 전에 죽은 아버지를 생각한 것으로 나온다. 또 서교수님은 한국이나 일본에는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이 있는가라고 문제제기를 한 바 있는데, 그렇게 평가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전혀 없는가 등등의 대화를 나누었다. 서교수님은 미술만을 주제로 해서 한 번 더 강연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술자리는 거의 12시가 돼서야 마쳤는데, 나는 가지고 갔던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와 『디아스포라 기행』 2권의 책에 서명을 부탁드렸다. 서교수님은 책 표지 안에 “김선수님 徐京植”이라고 친필서명을 하여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