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공부모임 후기
지금까지의 학문, 특히 철학의 역사는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가장 차원 높은 범주라면 인류가 속해 있는 세계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철학자는 왜 세계를 알려고 했을까요. 맹수의 발톱, 매의 날개, 들소의 힘처럼 자기를 보호할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초기 인류에겐 생존을 위해 세계를 알아야만 했지만 나중엔 세계를 통제하고, 자기 발 밑에 두어 지배하기 위해 철학자는 세계의 원리를 분석하였고, 그것은 과학이란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떤가요. 인류는 산을 옮기기도 하고 바다를 육지로 만들기도 하며 멸종된 생물까지 살려내고, 심지어는 기후까지 인위적으로 조절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인류 여러분. 모든 것이 발전한 것 같기는 한데 지구의 앞날은 어둡기만 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면 최초의 질문과 그 질문이 나오게 된 이유까지 다시 되짚어 봐야 합니다. 되돌아보니 답보다 중요한 건 역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진경은 질문에 몰두합니다. 특히 현대철학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근대적 사유’란, ‘근대’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사유합니다. 근대를 알려면 당연히 대개념이라 할 수 있는 중세와의 비교가 불가피하겠지요. 그래서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데카르트부터 시작합니다. 데카르트는 주체의 설정에 주목했고, 그 주체를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지금이야 뭘 당연한 걸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만물의 창조자, 주체가 ‘신’이었던 중세라는 상황에서 보면 가히 목숨을 걸고 나선 혁명이라고 할 겁니다. 또 하나 중세와 근대를 갈라놓은 중대한 역할은 갈릴레오의 몫이었습니다. 사유의 모든 영역, 학문의 모든 영역을 수학화한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지식이라고 하는 진리가 되려면 모든 자연현상은 실험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수학으로 계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음악과 미술조차 수학에 따른 것입니다. 현악기의 현이 각각 다른 음을 내는 것은 현의 절반을 자르면 정확하게 한 옥타브가 올라간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고, 근대미술은 정확하게 평균비에 따라 계산된 투시법(원근법)의 도입으로 인해 중세미술과 구분되었습니다. 이런 경향이 근대를 특징짓는 소위 ‘과학주의’를 낳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가 한 때 박찬호를 좋아하는 사람과 박찬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세상사람들을 단순 명쾌하게 나누었듯이, 세계는 ‘과학과 비과학’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이 구분의 결과는? 과학으로 증명되는 것은 진리가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허구가 되어 배척되었고, 과학이 아닌 것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거나 절멸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과학주의는 마녀사냥으로 나타났습니다. 과학이 아닌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마녀가 되어 화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중세가 아니라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시기라는 것은 이를 증명(앗! 과학…)합니다.
이런 과학주의를 급속하게 확산시켜 서구사회의 일반적 기준이 되게 한 결정적 촉진제가바로 가치를 수학화한 화폐입니다. 모든 상품에 가격을 매기기 위해 가격의 기준이 되는 가치를 수치화해야 하고, 가치는 인간의 노동시간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노동가치론인 거지요. 토끼와 사슴의 가격이 다른 것은 사냥하는데 드는 시간 때문입니다. 사슴 1마리를 잡는 시간과 토끼 5마리를 잡는 시간이 같다는 식이지요. 결국 이들의 가치는 그 동물을 잡아 죽이는데 드는 시간이고, 그걸 수치화한 것이 가격이란 겁니다. 참 잔인하지요. 그렇지만 이게 바로 인간중심의 휴머니즘입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에겐 최상의 이념일지는 몰라도 인간 이외의 것에게는 최악의 이념인 셈입니다. 과학 아닌 것이 배척되듯이 인간 아닌 것은 이렇게 인간이 먹고, 파괴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도 마찬가집니다. 이성이 아닌 것은 격리, 거세의 대상일 뿐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모든 것은 문명과 비문명(야만)으로 구분되고, 이성적이지 못한 인간들- 광인, 병자, 거리의 방랑자 등-은 이성적인 도시와 철저하게 격리되어 집단적으로 수용 거세되었습니다. 그 수용소 이름이 General Hospital이랍니다. 병원의 기원이지요.
참 난감해집니다. 어릴 적부터 긍정적,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성, 과학, 계몽, 휴머니즘 등이 모두 부정 당하는 느낌입니다. 그것들은 환하게 빛을 받은 세계의 한쪽 면일 뿐이고, 그로 인해 그림자진 어두운 면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가요? 이 논리에 대해 막 반발하고 싶으신가요? 한가지만 더 듣고 반박하세요. 여기부터가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제 생각엔. 이상의 논리는 기존의 이성, 과학, 계몽, 진리 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대열에 끼지 못해 배척되고 거세된 것들을 주목하자는 겁니다. 이진경식 표현으로 하면 ‘동일성’으로부터 핍박 받았던 ‘차이’를 복원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자는 ‘동일성의 철학’에 대응하는 ‘차이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지요. 색종이를 여러 겹으로 접어서 예쁜 나비, 꽃을 만들거나 겹쳐지는 여러 개의 원으로 공통분모를 그려봤을 겁니다, 어렸을 때. 그 때 예쁜 나비나 공통분모로 되지 못하고 잘려 나간 나머지들을 그냥 내버리지 말고 그 나머지들도 좀 봐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아가 그 차이들이 만나 새로운 발전된 자아를 만들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정착민의 논리가 아니라 항상 이동하면서 내적으론 계속 변화 발전하는 유목민의 논리, 노마니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보고도 여전히 반박하고 싶으신가요? 대환영입니다. 공부모임에서 진지하게 토론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철학 책을 보니 정말 머리에서 쥐잡기 운동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옛날엔 저도 한 철학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봅니다. 위 논리는 공부모임에 초청된 이진경씨의 이야기를 제 방식으로 풀어본 겁니다. 이진경의 이야기는 다시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해석이고요. 이진경과의 대화 이전엔 참 궁금했었습니다. 맑스와 혁명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그가 왜 난데없이 근대철학을 끄집어내고 데카르트, 칸트 등 별 영양가도 없고 어렵기만 한 근대철학에 매달리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의 토론을 통해 의문을 해소했을 뿐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활동하면서 가치를 인정하고 추구했던 소수자, 약자, 인권의 문제를 지금까지는 헌법을 정점으로 한 법률적인 논리로만 이해했다면, 이진경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명하였다는 겁니다. 나아가 이진경은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통해 계속 변화 발전하기 위해 ‘소수자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입니까. 이러한 결론은 끝임없는 사유와 지속적인 토론,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겁니다. 각종 사회적 현안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고,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민변 입장에선 너무나도 소중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공부모임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진경 뿐아니라 연구집단 수유너머와의 교류를 통해 사유의 지평을 훨씬 더 넓혀 나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