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 속에 나타난 법
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1. 대중예술을 통해 세상 보는 재미
0. 대중예술은, 수용자 대중의 경험과 욕구․욕망 등이 반영되어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대중의 취향을 이루며, 한 시대의 독특한 예술적 관습을 이룬다.
0. 예술이란 것이 어느 정도 그러하지만, 특히 대중예술은 당시 현실 체험의 냉정하고 정확한 반영만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욕구와 욕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예술의 수용자들은, 현실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구․욕망 혹은 상상하거나 꿈꾼 것과 일치할 때 그 예술에 대해 공감하고 심지어 현실감까지 느낀다.(김수현 드라마의 대사. 한국의 법정극 등)
그런 점에서 대중예술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이러한 예술을 즐겨 수용했던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욕구․욕망, 태도 등을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0. 오늘은 우리 대중예술 속에서 ‘법’이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아무래도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있는 식민지시대의 이야기가 중점을 이룰 것이다.
2. 신파의 세계 – 식민지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0. 식민지시대부터 짧게는 1950년대까지, 길게는 1960년대까지의 대중예술에서 나타나는 법 의식은, 지금의 우리의 상식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1) 실정법에 대한 잦은 무시. 그러면서도 죄책감이 없음. 죄책감은 다른 곳에서 발생함.
* <장한몽>. 심순애에게 버림받은 이수일은 고리대금업자에게 고용된다. 채무자에게 빚독촉하는 업무는 매우 파렴치한 짓으로 간주된다.
* 나운규 감독의 <풍운아>를 비롯한 식민지시대의 숱한 영화에서, 남성 주인공들은 대개 부자의 돈을 훔쳐다가 가난한 친구를 돕는다. (<아리랑>에서처럼 위험상황에 처한 누이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살인과 절도는 지나치게 빈번히 나타난다.
(2) 수갑 차고 끌려가는 장면, 법정 장면의 잦은 등장.
*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이 누이를 겁탈하려 한 오기호를 죽이고 마지막에 끌려가는 장면.
* <눈 내리는 밤>. 전옥이 연기한 주인공 어머니가, 아들을 괴롭히는 남편을 죽이고 끌려감.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가 시누이를 살해. 검사인 오빠의 손에 끌려감
* <검사와 여선생>. 어머니 같은 은사에게 구형을 내려야 하는 제자 검사.
0. 왜 이런 현상이 많이 등장하는가.
(1) 돈, 법 등 근대적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불편하게 심지어 폭압적으로 느낀다. 강한 힘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만들어내는 마음속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실제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다.
(2) 이들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것은 천륜과 인륜의 세계. 주로 가족 중심의 윤리성이다. (이들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실정법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윤리,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데에 대한 죄책감이다.) 이는 근대적 법과 돈의 논리가 아닐 뿐 아니라, 이 윤리성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윤리와 논리체계가 되지 못하는 가족 중심의 윤리로 축소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세적인 그것과도 다르다.
(3) 죄책감과 자기연민, 굴욕적인 패배, 훼손의 고통 등에서 야기되는 눈물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0. 신파의 구조
: 신파(성)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욕망이 해결되지 않는 강하고 악한 세상에서 패배당하는 무력한 주체의 비극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서민적인 비극(성)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1)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 하는 천륜과 인륜을 배반하도록 만드는 폭압적인 세상에 대해 주체는 패배한다.
(2) 그 세계의 질서에 무력하게 스스로 굴복하거나, 저항한다 하더라도 그 패배는 강한 굴욕(천륜과 인륜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당했다는 굴욕감)을 동반하는 패배이다.
(3) 자학이나 자기연민이 뒤범벅된 복잡한 감정상태가 야기된다.
(4) 이를 과장된 눈물과 탄식 등 독특한 방식으로 외화한다.
0. 신파를 발생시키는 사회의 특성
: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천륜․인륜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논리와는 배치되는 대목이 종종 발생하는 과도기적인 사회. 적어도 대중들이 천륜․인륜의 논리가 새로운 세상의 질서의 강력한 힘 앞에 굴복당한다고 느끼는 경험을 하는 사회. 그런 점에서 완전히 중세적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경우에는, 신파가 발생하지 않는다. 천륜이나 인륜의 논리가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 하늘이나 왕이 궁극적으로 그 부조화를 해결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기적이나 왕의 결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수용자 대중의 바람은 종종 신파 작품에서도 나타나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천륜이나 인륜의 가족중심적 윤리성이 마치 인간의 기본적 욕망과 맞먹을 정도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세상의 많은 관계들을 이러한 가족중심적 윤리로 환치하여 받아들이는 사회. 그 천륜이나 인륜의 문제는, 근대적인 법처럼 논리에 의해 유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임. 그런 점에서 나의 욕구가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과 개인의 계약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서구적인 근대사회와는 다르다.
: 타인 혹은 외적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확고하게 주장하고 관철하는 근대적 주체의 면모를 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토론을 통해 올옳고 그른 것, 최선의 것 등을 따져나가는 태도가 아니라, 내 편, 네 편의 관계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입장표명이 좌우되는 인간. 즉 윗사람이나 친한 사람에게 ‘아니오’를 하지 못하는 인간들. 그런 점에서 힘센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극복의 논리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인간. (살인, 방화, 절도, 자살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실정법을 위반하여 결국 ‘죄인’으로 전락하고, 실제로 실정법을 어긴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에 대한 죄의식을 동시에 갖는 양상을 띰.)
0. 1970년대 후반의 <수사반장>에서조차, 수용자가 문제를 해결하는 형사의 입장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와 동일시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가능하다. <수사반장>의 형사들이 피의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돌보아주는 인간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수사반장>은, 이렇게 피의자의 행동을 따라가게 만들면서, 이렇게 죄를 저지르면 결국 처벌을 받는다는 실정법에 의한 처벌의 원리를 교육시키는 방향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 점에서, 수사물을 일종의 두뇌게임으로 추리물로 만드는 서양 대중예술의 관습과 매우 다르다.
3. 70,80년대의 시대
0. <검사와 여선생> 방식으로 법을 다루는 작품이 현격히 사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학과 죄의식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신파적 사고방식의 탈피.
(1) 첩보물, 반공영화
0. 한국판 제임스본드. 멋진 신사이자 공산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영웅. <특수수사본부>
(2) 청년문화 속의 법
0. 청년문화 세대의 사고구조는, 타락한 세상(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과 때묻지 않은 순수의 대립이다.
: 돈, 권력, 힘,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 물질의 힘을 믿는 기성세대. 그에 의해 사라지거나 짓밟히는 약하고 어리고 가난하고 당장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순수하고 소중한 정신적인 가치 같은 것.
: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 꿈속에서 본, 신화에서나 있을 것 같은, 맑은 동해바다 속의 고래. 너무도 순수하여 정조를 잃고 결국 창녀로 전락하는 어린애 같은 여주인공 경아(<별들의 고향>)
0. 한편 이 시대는 매우 강하게 문화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때였고, 경찰이나 법과 관련된 장면이나 언급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 표현은 매우 우회적이거나 희화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0. <바보들의 행진>의 장발단속, 통금 위반, 교통단속 장면.
<어둠의 자식들>의 교도소 장면.
<영자의 전성시대> 경찰서 장면. 창녀촌 후리가리
<어우동>의 왕 경호 장면.
(3) 6월항쟁 이후, 공권력의 형상화
0. 시위진압에만 촉수가 발동하는 공권력
: <칠수와 만수> 후반부. 실수로 빌당 꼭대기로 올라간 도장공 두 사람을 고공시위로 착각하고 벌어지는 해프닝.
: <그들도 우리처럼>. 탄광촌에 숨어든 ‘도바리’ 운동권 학생 문성근, 망나니 같은 광산주 아들 박중훈, 그의 폭압 밑에 있는 윤락녀 심혜진의 삼각관계. 광산주와 결탁해 있으며, 혹시라도 숨어들 수 있는 불순세력에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 경찰. 감시하는 폭압적인 공권력.
(4) 그외
0. 1980년대 말의 약간의 변화
* 총기 사용을 위한 설정.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
* 사회문제 부각을 위한 법정극 설정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 법정극의 틀을 가진 작품은 연극에 연원을 둔 작품이 많다. 예컨대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법정 장면에서 한국적 리얼리티는 매우 적으며, 활발한 토론이 극 진행의 핵심이 된다.
4. 1990년대 이후 -몇 가지 변화
0. 경찰, 법조인의 등장이 매우 빈번해졌다.
: 표현의 금기가 옅어짐. 경찰이 이토록 풍자의 대상이 될 줄이야!
: 대중영화의 시대. 액션물과 수사물 등의 대중적 양식이 새롭게 각광을 받는 현상과 맞물려 있음.
0. 악을 제거하는 법조인
* 이러한 작품들은 대개 방송드라마이다. 영화에 비해 훨씬 보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공중파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 젊은 검사․변호사의 의지와, 그들을 제지하며 권력의 편에 서는 나이 든 상관의 대립.
사건을 파고 들어갈수록 정재계의 거물과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드라마 <모래시계>, <변호사들> 등
0. 멋진 직업인으로서의 법조인과 고달픈 하급직 경찰
* 돈 잘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그런 점에서 파워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검사와 변호사.
* 법을 다루는 사람이 일종의 직업인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탈권위의 양상이라는 점에서.
* <박대박> 등. 장난기 있고 실수투성이이고 인간적 면모도 있는, 그러면서 능력 있게 사건 해결도 잘 하는 멋진 직업인.
<가문의 영광>에서는 서울법대와 혼인을 맺으려는 조폭 집안을 설정함으로써, 학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고위층으로서의 법조인으로 의미 지음.
0. 조폭이나 마찬가지인 검․경
* 파워 있는 직업인이라는 점에서 법조인과 조폭은 동일계열의 인간으로 취급될 수 있다. 범죄의 세계에서 일하며, 돈과 힘이 있다는 점에서 같다. (일반사람들로서는 법조인과 친한 것이나 조폭과 친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의미가 된다.)
*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혹은 자기 원수 갚으려고 하는 짓. 삥땅, 협박, 뇌물, 검은 거래에 능숙하다. 범죄의 구조를 잘 앎으로 걸리지 않고 범죄를 행할 수 있다.
* 상당수의 영화에서 검경은 오히려 조폭보다 덜 인간적이고 솔직하지도 않음.
* 오히려 검사나 경찰 중에서도 조폭처럼 구는 놈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괜찮은 놈.
상당수의 검경은, “법대로 해봐!”를 외치며 교묘히 악행을 저지르는 세력을 처단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다.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법의 바깥으로 튀어나가야 한다.
0. 결국 90년대에 법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사회정의를 구현해주는 믿을 만한 산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데, 법의 세계만 고지식하게 합리성과 논리성을 고집하고 있다고 보는 영화가 많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법의 세계를 잘 운용하는 고급 기술자이자 이 사회의 고위층으로서의 법조인, 그리고 서민들의 세계에서 말도 안되는 합리성에 갇혀 답답하고 불쌍하게 사는 경찰의 모습을 그린다. (장진의 작품에서 빈번히 경찰서가 등장하는 것은 그곳이야말로 비논리적인 한국사회 속에서 표면적 논리성을 고집하는 웃기는 공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