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창덕궁 후원 나들이
글_김행선 미국변호사
산천마다 개나리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의 한가운데 열린 궁궐 나들이를 위해 미군위 MT를 마치자마자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창덕궁으로 달려갔다. 창덕궁은 궁궐 자체보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궁궐 정원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후원(속칭 비원 )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고, 평소 보고 싶어했던 곳이어서 우중임에도 기대를 가득 안고 참여한 나들이었다.
창덕궁 정문을 지나자마자 한 눈에 들어오는 대전은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고 단청이 더 화려해서 그런지 좀 더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여성미가 돋보였다.
우리 궁궐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적의 침입을 막는 공성전투용의 일본 궁궐과, 여러 제후국들을 제압하여 천자의 위엄을 높이고자 규모와 높이에서 위압적인 중국의 궁궐과 달리, 우리 궁궐은 사람을 제압하지 않고 편안히 감싸 안는 화평한 기를 지닌 궁궐이라는 점에서 백성을 압제적 통치의 대상이 아닌 국가의 근본으로 섬기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치세정신을 느낄 수 있어 새삼 자랑스럽다.
그래서 우리 궁궐을 관람하는 일본관광객들은 궁궐담이 이렇게 낮은데 어떻게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느냐고 방비의 허술함을 비웃고, 중국관광객들은 궁궐이 중국 권문세가의 사가(私家)보다 규모가 작고 화려하지 않다는 점을 비웃는다는 말에, 난 그저 ‘우리 조상들의 깊고 넓은 정치철학을 단지 물신적 잣대로만 보는 너희들이 어찌 알랴’하며 그들의 단견을 웃어준다.
후원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절로 와~하는 탄성이 나오게 한 것은 진분홍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커다란 매화나무였다. 내가 생각하는 매화는 분재에 담긴 소박하고 아담한 자태를 뽐내는 꽃이었는데, 창덕궁의 매화꽃은 분홍색 물을 들인 튀밥을 나무에 다닥다닥 붙여놓은 것과 같이 화려하고 풍성해서 어떠한 감탄사로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고색창연한 궁궐과 매화꽃이 어우러지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 노래가사가 절로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옆으론 가뭄에 비가 오거나 장마철에 비가 그침을 기뻐한다는 낭만적인 이름의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때마침 내리는 봄비와 매화꽃이 어우러져 내가 옛 선비라면 절로 시구절(詩句節)이 떠오르지 싶었다.
본격적인 후원나들이는 십장생의 하나인 큰 돌을 깍아 세워, 지나는 임금과 신하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단청도 없이 소박한 규모의 전각과 연못, 정자였다. 이는 순종(?) 이 세자 시절 공부하던 공부방과 서책보관 장소라는데, 문(文)을 숭상하던 조선임금들의 끊임없는 면학면모를 알 수 있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경연과 강연으로 쉴 틈 없던 조선임금들의 하루 일과를 생각하면 왕노릇하기도 심히 고달펐겠다 싶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후 연경당이라는 양반집 사가를 본 따 지은 건물이 나오는데, 이는 순종(?)임금이 부모님이 노후에 편히 지내시라고 지은 전각으로, 입구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두꺼비상이 있고, 은하수, 오작교를 상징하는 실개천과 나무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행랑채와 마구간이 있는 마당 양쪽으로 여인네들이 기거하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남정네들이 기거하는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이 나란히 나있다. 안채 지붕막새는 음(땅)을 의미하는 사각형으로, 사랑채는 양(하늘)을 의미하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건축재료 하나하나마다 음양오행적 의미를 부여하는 세심한 조선건축의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문도 안채대문보다 사랑채대문인 솟을대문이 더 높게 되어 있고, 건물의 기둥도 안채보다 사랑채 기둥이 조금 더 높게 설계되어 있는 등으로 남존여비적 유교전통 또한 느낄 수 있어 여성인 내 입장에선 좀 씁쓸하였지만, 한편으론 오늘날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싶었다.
이를 지나면 초기에 규장각으로 쓰였다는 이층으로 된 화려한 전각과 편채가 있고, 그 앞으로 갖가지 꽃나무가 심어진 아름답고 인상적인 2개의 큰 정자와 연못이 나온다. 규장각은 1층은 각신들의 학문연구 장소로 쓰였고, 2층은 서책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는데, 주변 경관이 하도 아름다워 각신들이 학문에 전념하기 힘들었겠다 싶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후에 규장각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한다. 규장각 앞뜰에는 춘당대라는 큰 전각이 있는데, 그 앞에서 무술훈련과 임금 앞에서 치뤄지는 과거시험인 전시(춘당대과)가 열리곤 했다고 한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장원급제한 과거시험도 춘당대과였다는 궁궐지킴이 분의 설명도 흥미로웠다.
창덕궁 후원의 백미는 무엇보다 요소요소에 산재된 사각형, 육각형, 부채꼴 등 다양한 모양의 정자와 연못이었다. 안내하는 분 말로는 원래 연못에는 정식 명칭이 없어 후세가 관리편의상 연못에 있는 정자이름에 연못 지(池)자를 붙여 부르고 있다고 한다. 자연적 구릉과 지형을 살려 곳곳에 조성한 연못과 색색의 단청을 입힌 정자와 울긋불긋 피어있는 꽃들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이 바로 여기구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소규모 폭포와 인공 수로를 만들어 놓고 시(詩)를 새겨놓은 마지막 연못에선 우리 옛 조상들의 멋과 흥취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일본 교토와 오사카, 나라 등지의 유명한 정원을 가봤지만, 일본 정원은 연못과 연못 안에 조성된 인공섬과 다리, 정자, 석등 등으로 꾸며진 매우 정형화된 인공미를 뽐낸다면, 우리나라 정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인공미를 최대한 배제한 편안하고 유려한 자연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느껴진다. 중국 정원 역시 화려하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우리 정원과 다르다. 이 점에서 창덕궁 후원은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 가서 우리 조상들의 멋과 미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은 최고의 나들이 명소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궁궐지킴이 분이 해설해준 창덕궁의 3개의 큰 대문 중 하나인 시구문(屍軀門)에 얽힌 인현왕후의 슬픈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원래 궁궐에는 왕과 그 직계가족 외에는 궁궐 안에서 죽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궁녀나 내시들도 죽음이 임박하면 이 시구문을 통해 사가(私家)로 나가고, 미처 나가지 못한 죽음이 있는 경우, 살아있는 양 가마에 태우거나 관을 세워서 이 시구문을 통해 외부로 나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비가 되어 궁 밖으로 나갈 때도 이 시구문으로 나갔고, 다시 복위되어 입궐할 때도 이 시구문을 통해 입궐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폐비가 됨은 왕비로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시구문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내 나름의 추론을 하면서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 나들이를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