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여성인권위원회 –
신입위원 환영 M.T 후기
글_김정아
변호사
깨끗한 숲내음 속에 흙냄새가 강하게 섞이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나무벤치를 적시기 시작했는데, 저는 산장 아가씨 흉내를 내는
게 좋았던지 이제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서인지 빗방울을 맞으며 숙소인 축령관 앞마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올해 여성위 신입위원 환영 M.T는 경기도 남양주 시에 위치한 축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공지메일을 받자마자 “음, 이건 나를 고려한
위치 선정인가?”라는 짧은 착각에 빠져 ‘전 카풀 배정 없이도 대중교통으로 도착 가능합니다!’라는 번개 같은 답신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올해의 M.T 장소는 물 맑고, 공기 좋고,
잠잘 곳 편안하고… 모든 게 다 좋았지만 딱 한 가지!
대중교통은 불편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대표변호사님의 극적인 양해로 사무실 차를 얻어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지만, 오히려 과하게 빨리 도착한 관계로 저 혼자
선발대보다 40분이나 일찍 와버렸습니다. 저는 관리사무소에서
여성위원 36명의 영수증과 열쇠꾸러미를 얻어 숲속의 집, 축령관에
들어섰습니다.
아무도 없는 M.T 장소였지만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외갓집에 온 듯 편안한 기분이 느껴졌습니다(‘친정에 온 것처럼’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아직 저에게는 ‘친정’이 없으니까요). 어느새
선발대가 도착하고, 이번 엠티 최연소 참가자인 차혜령 변호사님의 귀염둥이 효재의 눈웃음으로 텅 비었던
축령관이 금세 따뜻해졌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꽤 시간이 걸리는 장소였건만, 선발대를 필두로 10분 간격으로 변호사님들께서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례적으로 참가자 수가 많았다는 작년 M.T보다는 적은 인원이었지만, 40여명의 변호사님들께서 그야말로 친정을 찾아오듯 와주셨습니다. 변호사님들과
꼭 닮은 자녀분들과 저희 여성위원회 엠티의 특색이자 자랑인 베이비시터도 동행되었습니다.
어느 새 이한본 변호사님의 특제 참치카레와 양념갈비의 향기가 축령관을 가득 메웠습니다(선발대가
도착하자마자, 뚝딱뚝딱 음식이 준비될 줄 알았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신입위원 명단에 올라가 있는 초짜인 관계로 여성위 M.T의 진정한 일꾼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죠. 음식의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한 것은 이한본 쉐프님이 도착하신 후였습니다). 저희는 익숙하게 자신의 이름표를 적어 목에 걸고 각자의 잔에 맥주부터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그 어떤 음식도 아닌, 김수정 변호사님이
제공한 유기농 와인 한 박스였습니다. 이 날 처음으로 참석해주신 새내기 변호사님들은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 맛좋은 유기농 와인 때문에 유기농으로 익어버린 얼굴을 하고 시끌벅적한 M.T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참치카레를 안주삼아 와인 한 박스가 동이 나 버렸고,
즐거운 수다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타이밍 좋게 후발대까지 도착하고 난 후 저희 여성위원회의 영원한 사회자, 김진
변호사님의 진행 하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위원장님이신 김수정 변호사님을 박수로 추인하는
절차와 함께 조숙현 부위원장님, 정은영 총무간사님을 함께 환영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민변 여성위원회의 유구한 역사에 따른 역대 위원장님들의 소개와 인사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성위원회에 가입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여성위 위원장님은 김진 변호사님이셨기 때문에 그 이전 위원장님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정말 대단한 분들께서 여성위를 이끌어 오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언니를 대하듯 이러한 분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밤을 지새울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여성위는 놀랍고
행복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여성인권위원회를
편안한 외갓집 같은 곳으로 각인시켜 주신 김진 변호사님, 3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프로그램은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었고, 저희는 테이블을 끼고 둘러 앉아
서로의 얼굴을 돌아가면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명이 눈을 그리고, 다른
한명이 코를 그리며, 마지막 사람이 점을 찍는 엄청난 협동 작업에 의하여 뛰어난 작품들이 탄생하였습니다. 언뜻 보면 추상화 같기도 한 이 초상화들이 실제 모습과 절묘하게 닮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실례지만, 멕시코 여인을 닮은 이국적이고도 아름다운 제 초상화를 보신
분은 오지은 간사님께 맡겨 주십시오. 가보로 간직하려고 하였는데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신입회원부터 각자의 초상화를 들고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는데, 그 자리에 앉아 신입회원님들의
인사말을 듣고 있자니 작년의 제 모습이 겹쳐지는 듯했습니다. 그 후 일 년이 흘러 제가 이 자리에 당연한
듯이 함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신입회원 소개에 각 팀의 팀장님 소개마저 끝나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남은 술을 비우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어가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강철체력을 과시하는 신입회원들과, 그리고 그 신입회원들보다 더 강력한 위은진 변호사님(피부만 이십대인 것이 아니셨지 말입니다)께서는 밤을 홀딱 새셨습니다. 저 역시 저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선배
변호사님들이 걸어오신 길과 가고 싶은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소중하여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침은 조용히 찾아왔고 땅은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축령산을 오르지는 못했지만, 콧구멍을 벌름거리자 깨끗한 공기가 몸 속 깊이 들어와 머리까지 맑아지는 듯했습니다. 토요일 점심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 하니 조숙현 변호사님께서는
아침 먹는 데 10분도 안 걸린다며 출발을 만류하시고 맛있는 해장라면을 끓여주셨습니다. 급히 출발해야 한다고 했던 저희들은 국물까지 싹싹 비워내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대체 어떤 M.T에서 일찍 출발하는 이들의 빈 속을 걱정하며 급히 라면을 끓이고, 대체 어떤 모임에서 몇 시간동안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남양주 깊은 산속까지 왔다가 밤도 지나기 전에
다시 길을 떠나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의 버스 안에서, 불현듯 어색한 손님 같았던 작년의 제 모습과 그와는
달리 한 식구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어제의 제 모습이 상반되게 떠올라 기특하면서도 겸연쩍은 묘한 감정에 웃음이 비집고 나왔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그 이듬해에도, 저는 해가 바뀌는 시점에는 제 달라진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하다가 4월이 되어서야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변화를 깨닫게 될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푸근하고 편안한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