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따라가 봤우다만, 거참 이상헌 일도 다 있십디다. 그 사이 눈이 나련 사뭇 해영허게 눈이 덮였는디 말이우다. 참 이상허게시리 순이 삼촌 누운 자리만 눈이 녹안 있지 않애여 마씸”
제주 ‘4·3 사건’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한 대목이다. 1948년 4월 3일부터 이듬해까지 한반도의 영원한 변방 제주에서 일어났던 그 참담한 학살의 이야기가 소설을 통해서나마 ‘육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78년이었다. 그해 가을 「창작과 비평」에 <순이 삼촌>을 발표한 작가 현기영 또한 제주에서 나고 자란, 바다 건너 사람들을 ‘육지사람’이라 부르는 섬사람이었다. 1948년 그 학살의 한 가운데서 남편을 잃은 ‘순이 삼촌’은 “밭을 에워싸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도 “깨난 보니 자기 우에 죽은 사람이 여럿이 포개져 덮연”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주도로변 그 옴팡진 밭에 난사된 구구식 총탄 속에서 살아남은 순이 삼촌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군인이나 순경을 먼빛으로만 보아도 질겁하고 지레 피하던” 순이 삼촌은 결국 자신이 평생 일궈먹던 그 옴팡진 밭을 찾아가 양지바른 데를 골라 드러누워 버린다. “머리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사이나가 흩어져 있고……”
내가 나고 자란 제주에서 ‘4·3’은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살아있는 엄연한 ‘역사’였다. ‘구술사’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른들로부터 ‘4·3’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실례로 내가 어렸을 적 어른들은 머리가 조금이라도 긴 아이들에게 “야. 너 산폭도같으다. 머리 좀 깍으라”라는 말을 하곤 했다. ‘산폭도’란 ‘4·3’ 당시 산으로 올라간 ‘폭도’, 산에서 내려온 ‘폭도’들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어른들은 그 머리가 긴, ‘폭도’라 불렸던 사람들을 기억해내고는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시작되는 제사”라고 있는 날이면 그날 그 기억들을 두런 두런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때 산에 올라간 사람은 무조건 폭도로 봤이니까. 하이간 굴속에 있는 사람은 영 행색이 말이 아니라서. 굶언 피골이 상접헌디다가 한겨울에 미녕옷 한 벌로 몸을 가리고 떨고 있는디, 동상 걸려 발구락 모지라진 사람도 더러 있었쥬.”
– <순이 삼촌> 중에서 –
한겨울 날씨가 맵차던 지난 1월말.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이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단신 기사를 통해 전해졌다. 영화 <지슬>을 통해 이제 제법 알려지게 된 셈이지만 ‘지슬’은 감자의 제주 사투리다. 그해 1948년 11월 주민들을 폭도로 몰아 사살하라는 소개령이 떨어진 뒤 ‘큰넓궤 동굴’에 숨은 주민들이 나눠먹은 ‘지슬’. 내가 어렸을 적에는 ‘지실’이라 했던 것 같다. 제주에서는 감자를 ‘지슬’ 또는 ‘지실’이라 했고, 고구마를 ‘감저’, ‘감재’라 했다.
영화 <지슬>은 제주에서 첫 개봉을 했다. 이례적이다. 아무리 독립영화라 하지만 국제 영화제 수상작, 그것도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이 서울 첫 개봉이 아니라 제주에서 첫 개봉이라니. 개봉 2주 만에 제주에서만 1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1,000만 관객의 한국 영화가 줄을 잇는 세상에, 개봉 2주 만에 1만 명이라 해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나, “영화를 생전 처음 보시는 것 같은 나이 드신 관객들도 많아 극장 관계자들이 놀라고 있다. 이 영화가 4·3의 슬픔을 안고 산분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 같다”는 기사(한겨레신문. 3월 15일치)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안도감’이다.
“숙명과도 같은 ‘4·3’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말하지 않고는 문학적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은 개인적인 절박감” 속에서 <순이 삼촌>을 썼던 작가 현기영은 박정희 정권 말기 모진 고초를 겪어야만 했고, 곧바로 판매금지를 당했었다. 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나는 고향 선배들이 몰래 건네준 <순이 삼촌>을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오멸 감독은 1971년생이다. 현기영 선생이 1941년생이니, 꼭 30년, 한 세대 차이가 난다.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예고편만 보아도 이 영화의 느낌을 알 것 같다. 화면 가득한 그 많은 ‘오름’들과, 아! 그 자연스런 제주 사투리. 육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 사투리 반 표준말 반 섞어서 써야만 했던 현기영 선생의 ‘소설’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이 ‘영화’는 넉넉히 뛰어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도 모두 현지 사람들이라 하니 사투리로 댄 대사 자체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이 영화를 만든 영화제작사의 이름이 ‘자파리’란다. 국어대사전에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제주에서는 어른들이 장난이 엄청 심한 아이를 가리켜 ‘자파리 센 놈’, ‘자파리 심한 놈’이라 했다. 아직도 ‘4·3’을 ‘좌익 폭동’으로 몰아세우며 ‘학살’의 희생자들을 욕보이는 이들에게, 오멸 감독! <지슬>로 자파리 한 번 멋지게 한 셈이다.
이제 나는 봄소식과 함께 남쪽 바다를 넘어 육지로 올라올 영화 <지슬>을 기다린다. 그렇다. 영화 <지슬>은 그 푸르른 제주 ‘바당’을 건너 꽃잎과 함께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