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민변은 나의 친정이다” 민변과의 10년 인연, 민변을 떠나는 노동위 전명훈 간사 인터뷰 외

2013-02-15 570

민변은 나의 친정이다

민변과의 10년 인연, 민변을 떠나는 노동위 전명훈 간사

 

 

인터뷰_  인턴 이광훈, 박진선

공병기, 김초희
녹취_ 인턴 이광훈, 박진선


 

 
매서운 추위도 어느새 누그러졌다. 다시는 오지 않을 같던 봄의 시작, 겨울의 끝자락에서 민변도 어느새 이별과 더불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거자필반 회자정리(去者必返 會者定離) 사람 만남의 어쩔 없는 법칙이라고는 하나, 민변 사무실 내에는 못내 아쉬운 분위기가 그득하다. 그러나 헤어짐은 결코 헤어짐이 아닐 것이다. 지난 2 13 이른 저녁. 서초동 아담한 카페에서 민변 노동위원회 전명훈 간사’를 인터뷰했다.
 
 
민변 인턴(이하 민변) : 사무실에서 만나던 분을 인터뷰이로 마주 앉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웃음)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조사하다보니 우리가 알던 전명훈 간사 인간 전명훈 다른 같았다. 대부분 인터뷰 바탕 조사자료를 페이스북을 통해 찾을 있었다. SNS 애용하시는 같은데, 일상부터 노동현안에 관한 생각, 현장 모습까지 다양하게 쓰고 계신데, SNS 통해 이루고자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신 건가.
 
전명훈 간사(이하 전명훈) : 페이스북을 많이 하긴 한다. 페이스북(페북) 친구 숫자가 대략 1500 정도는 되는 같다. 2011 희망버스 다들 트위터를 많이 하지 않았나. 김진숙 지도위원 관련해서 한진중공업 문제가 해결이 되었었고, 트위터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일상의 이야기를 올리기도 하지만, 노동위원회 이야기도 많이 올리곤 한다. 노동위 회의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밖에 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SNS 이용하면 나와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굉장히 수월해진다. 그래서 노동현안을 많이, 그리고 쉽게 알리기 위해 페이스북을 자주하는 편이다. 어느새 습관이 같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얻는 정보들도 굉장히 많다. 페이스북에 글도 많이 쓰지만 나와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다른 분들의 소식도 자주 확인하는 편이다.
 
민변 : 간사님 페이스북을 보면 일상의 모습들도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결혼 생활이었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안해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아 부럽다. 보통 대한민국의 남편들은 배우자를 지칭할 와이프라고 하지 않나? 안해라고 부르는 특별한 의미나 계기 같은 것이 있었나.
 
전명훈 : 물론 나도 처음엔 와이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와이프라는 말을 싫어한다. 영어식 표현이기도 해서 거부감이 있는 같다. 안해 뜻은 하나의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쪽에 있는 태양, 마음속의 태양. 그런 뜻이다. 당신은 마음 태양같은 존재? (웃음) 그래서 안해라고 쓴다.
 
민변 : 내가 보기엔 바로 그런 면이 보기 좋았다. 아내분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같다. 금슬이 좋은 비결이라도 있나.
 
전명훈 : 나와 성격이 굉장히 맞는다. MBTI 성격 비교 검사를 해보니 아내와 나는 정반대의 성격이 나왔다. 나는 ISTJ 유형인데, 아내는 ENFP 유형이다. 이렇게 서로 반대라서 걱정이 되었는데, 결혼해서 살다보니까 오히려 서로의 단점을 서로가 채워줄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애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이가 좋다. 지난 2 7일이 연애부터 결혼까지 14주년이었다.
 
민변 : 금슬이 좋다 보니 2세도 빨리 생기신 아닌가 생각하는데, 임신 8개월째라고 들었다. 기분이 어떤가. 아버지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지, 혹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있나.
 
전명훈 : 처음에 아내가 임신했다고 했을 솔직히 난감하고 당황했다. 임신 계획은 미리 세워두긴 했었지만 예상외로 빨리 생겼다. 아이가 예상치 못하게 빠르게 우리에게 와줘서 마음의 준비도 안되어 있었고 그래서 난감했던 같다. 하지만 요즘은 출산이 다가오니까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많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나도 나중에 자식하고 사이가 좋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된다. (웃음) 그래도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와 아버지와의 좋았던 것을 넘어서는 그런 관계, 친구 같은 다정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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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민변을 떠나는 이유도 육아를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태어나는 2세에게도 본인의 운동경험 등을 들려 생각인가.
 
전명훈 : 여러 가지 선택지를 보여줄 것이다. 군인이셨던 나의 아버지가 살았던 경로, 내가 살았던 경로,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고 보여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삶의 경로를 강요하진 않지만 다양한 선택지 아이 본인과 가장 맞는 길을 택하라고 같다. 그게 아이에게 행복한 길이지 않을까 싶다.
 
민변 :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진보에게도 꿈꿀 있는 욕망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서 책이 갑자기 떠올랐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녀들에게 너나없이 사교육을 시키고, 자신의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가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욕망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쪽이 있는가 하면, 그런 욕망을 애써 숨기는 쪽이 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그런 시각의 대척점에 있는 같기도 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전명훈 : 나는 그러한 욕망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대가 서로 다르긴 한데, 내가 살았던 과거는 당위 모든 삶을 지배하는 가치로 작용했던 같다. 본인의 욕망이 있었어도 그걸 숨기고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 아쉬움들이 많이 생기더라. 30대가 되고 40대를 눈앞에 놓고 있으니 여러 욕망들이 현실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아이돌이라던가 같이 가는 MT 같은 것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20 때는 데모 많이 하고 그랬다. 20대에 겪었어야 것들을 그때 못해봐서 지금 하려고 하는 아니냐는 아내의 냉철한
분석을 들으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욕망이 있으면 숨길 필요 없다. 드러내도 괜찮다. 자기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와 서로 어긋나지 않게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녀 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으면 키우고 싶지 않겠나? 그런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투영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바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욕망을 아이가 갖게 가치와 조화되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변 :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 마음인지.
 
전명훈 : 사실 개인적인 마음으론 대안교육을 시키고 싶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앞서 말했듯이 선택지를 것이다. 결정을 하는 것은 온전히 아이의 몫이다.
 
민변 : 예비 아빠로서 아빠가 되기 위해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단어로 말한다면.
 
전명훈 : 인내 기다림. 출산이 물론 나에게도 큰일이긴 하지만 아내에게 일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몸으로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자로서 군대에서 힘들었던 것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아내가 겪는 변화나 감정, 그런 부분들을 세심하게 보듬어 주는 것들이 중요할 같다. 아내에 대한 배려와 아내와 같이 육아와 살림을 하는 그런 인내.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같다.
 
민변 : 육아 때문에 일자리(민변) 떠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우려도 있을 것이고 격려도 있을 것인데, 어떤가.
 
전명훈 : 성별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다. 남성분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한국은 가부장적 사회라 아무래도 남자가 나이가 되면 활동가든 아니든 간에 가정의 중심을 잡아야 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크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많이 요구하지 않나. 민변 변호사님들도 그만둔다고 하니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육아문제 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지역도 옮기게 되니까 그러시는 같다. 반면에 여성분들은 부러워하는 분들도 많고 대부분 지지해주시는 편이다. 남자가 육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호응을 많이 해주셨다. 여기서 남녀의 차이가 조금 존재한다. 나는 내가 육아를 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연하게 아내와 서로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비단 나만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공동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민변 : 그런 소신 있는 결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전명훈 :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의 신뢰가 가장 크고, 역할분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시기에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노년까지 같이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공동 프로젝트로 같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아내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물론 내가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나도 의외로 상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 외부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안에선 남녀 성역할에 따른 각자의 역할을 아내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바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아내도 나도 하고 있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시스템이나 인식구조 등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변 : 노동활동가로서 오랜 시간 공부하고 활동하셨다. 노동 분야에서 활동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 같나.
 
전명훈 : 돌아보면 아주 현장 활동가는 아니었던 같다. 노조 활동하면서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고 직접 지원하시는 노동단체 활동가들도 있는데, 나는 후방지원 활동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민변에서의 나의 역할도 그랬다. 미시적으로 보자면 현장과 전문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 말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활동가라고도 있겠다. 갈수록 활동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90년대 이후 학생운동이 위축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예전엔 학생운동을 하다가 활동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한 생산구조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본다. 요즘 보면 활동가보다는 인권변호사 하겠다는 친구들이 많은 같다.
활동가가 되기를 꿈꾸는 분들이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응원하고 있다. 굉장히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 집안에서의 반응, 전망에 대한 우려, 노후에 대한 불안 등등 걱정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가 지나온 과정들을 친구들이 다시 겪게 것이라는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니만큼 격려해주고 싶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움직일 있는 활동가가 된다는 점에서 활동가는 하나의 직업일 수도 있고 본인의 전망일수도 있다. 나는 상당히 가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사회를 좋게 바꾸는데 주춧돌이 있지 않겠나.
 
민변 : 활동가로서 노동운동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나.
 
전명훈 : 노동운동 네트워크를 가지고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해가 갈수록 노동운동이 관료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현장에 계신 분들은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장성같은 것들이 많이 퇴각되었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같다. 최근 기아차 비정규 조합원 윤주형씨 장례식 과정에서의 갈등 등을 보면 그렇다. 장례도 진행하지 못하고 했던 이런 것들이 노동운동의 관료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료성이라는 것이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의 측면에서 보았을 관료성은 그렇게 좋은 영향을 주진 않는다.
상당 부분 제도에 포섭되기도 하고, 운동이 가져야할 진보성도 희미해지는 측면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 비판하기가 그렇지만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이후 노동운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새롭게 한국사회에서 떠오르고 있는 노동에서의 소수자 영역이다. 이런 영역들에 다가가야 한다. 87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일어났던 정규직 위주의 노동운동으로는 기존의 관료성을 뛰어넘긴 힘들 같다. 당장은 자신이 민변 노동위를 퇴직하게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노동영역의 소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으려고 한다.
 
민변 : 운동권이나 노동문제 관심을 가지게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전명훈 : 91년도 2 처음 집회를 나갔다. 강경대 열사 관련 집회였다. 명지대 1학년생이었던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 집단 구타로 인해 사망했다. 5월에 분신 정국 시작되었는데, 집회를 처음 나갔다. 나갔던 계기는 존경하던 선생님들의 해고였다. 당시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이 전교조 1세대였는데,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해고되시면서 받은 충격이 굉장히 컸다. 그것이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지 않았나 싶다. 이후에도 해고된 선생님을 만날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 나갔다. 10 명이 신촌로타리에 나가서 노제를 했다. 강경대 열사 노제. 그때 최루탄도 처음 맞았다. 대학을 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같다. 그리고 중간에 자퇴를 했다. 한국외대 물리학과를 다니다 자퇴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대학을 다니는 것이 운동이나 취업 모두에 도움이 같지 않았다. (웃음) 이후 가톨릭대 사회학과에 편입해서 졸업을 했다. 운동을 지속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노학연대 투쟁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노동을 나의 중심 화두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것은 사회학 공부를 하면서였다.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00년도이다. 상근으로 일하던 연구소에 있을 거제도에 내려가서 면접식 조사를 진행했었다. 조선업종 하청노동자 실태조사였다. 조사관으로 가서 이른바 협력업체 직원이라고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인터뷰를 했다. 나이 드신 노동자 한분이 말씀하시더라. 정규직 노동조합은 돈이 있어서 노동조합 변호사 등을 통해 자문을 받고 소송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노조도 없고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곳도 없다고. 처음으로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노무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했는데, 그땐 내가 전과가 있어서 집행유예 받고 3 동안 시험을 없었다. 학교를 2002년에 졸업하고 민변에서 간사 공채를 했는데 민변에 들어온 것이다. 민변은 법률가 단체인 만큼 내가 염두에 두었던 노동법 공부에 대한 생각들이 구체화되지 않았나 싶다. 결국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전공하기도 했다.
 
민변 : 활동가로서 도중에 포기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적은 없었나.
 
전명훈 : 민변에 2002년에 들어와서 2003년까지 1 반을 일하고 나갔다. 그땐 민변에서 일하는 힘들었다. 민변 상근 간사들 같은 경우엔 지위가 애매하다. 변호사 단체이고 회원들도 변호사이기 때문에, 곳에서 변호사가 아닌 사람은 상근 간사뿐이었다.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했었고, 나의 활동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깊었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힘들었던 시기는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노무사 시험을 대학원 다니면서 준비를 했는데, 2차시험에서 떨어졌다. 노무사 자격증 따고 나서 이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막혀버리니 아주 힘들었다.
 
 
민변 : 활동가로서 나이가 들면서 본인의 열정이나 사명감이 식었단 생각을 적이 있었나.
 
전명훈 : 열정이 식었다기 보다는 나이가 들면서 아무래도 보수화되는 측면이 있는 같다. 물론 나쁜 측면의 보수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르크스식으로 표현하자면 20대에는 생산관계측면에서 자유로웠다.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대학 다니고 운동하다 보니까 보다 급진적으로 활동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까 책임질 것들도 많아지게 되고, 보다 복잡한 관계들을 맺다 보니 힘들어졌다. 아내도 있고, 처가도 있고, 아이가 생기면 아빠도 되는 그런 관계에 있어서 본인이 책임을 져야 상황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조화시켜 나가야 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념과 지향과 이런 것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꺾이지 않도록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외부에서 보기에 나도 20대에 혁명을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보단, 이젠 내가 책임질 있는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이 든다.
 
민변 : 사회학과 법학, 양쪽을 모두 공부한 셈인데, 사회학과 법학, 개의 학문에서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점이 있나.


전명훈 : 노동법을 나중에 공부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는 주로 노동문제를 법을 중심으로 보게 되는 같다. 하지만 사회학의 시각으로 보면 노사관계의 문제, 구조의 문제, 주체의 문제, 관계의 문제 등으로 노동을 있다. 활동가들이 취하는 입장은 노동사회학적 인식, 사회과학적 분석 이러한 틀에 기반해서 움직이곤 한다. 내가 노동사회학이 아니라 노동법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사실 학문의 자유때문이다. 학문은 자유롭지 않나? 이런 , 저런 틀을 가지고 이리저리 적용해 있고, 연구방법론도 다양하다. 사회학의 단점은 추상적이다. 반면 법은 구체적인 답을 내어줄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현실적인 틀이 필요했다. 당장 현실에서 있는 무기가 필요했던 같다. 다만 법은 사고의 틀이 정해져 있어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는 같다. 그래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변 : 육아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광주로 내려가시는 것으로 들었는데, 광주에서도 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지.


전명훈 : 일단 단체활동 계획은 없다. 민변 노동위원회 간사를 하면서 논문 쓰는 것을 병행하려고 했으나 여유가 나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우선 논문을 써서 단계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작년에 문제되었던 청년유니온, 노동조합 설립신고 등이다. 내가 처음으로 살았던 지역이 광주가 아니라서 일단은 내려가서 적응을 하는 우선일 같다. 그리고 나서 단체활동을 할지 안할지를 판단해야 같다.
 
민변 : 민변에 오래 계셨다. 전명훈 간사님께 민변이란 어떤 존재이고, 그리고 민변에게 전명훈 간사 어떤 존재인가.
 
전명훈 : 나에게 민변은 친정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내가 사회운동을 하게 시작이기도 하고, 중간 공백은 있었지만 30 중반을 민변에서 보냈다. 중간에 나갔다 다시 복귀할 민변은 친정 같다라고 느꼈다.
민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글쎄 모르겠다. 그것은 민변이 나에게 대답해야 하는 아닌가? (웃음) 민변에게 나는 그럴 같다. 일종의 나사같은 존재? 중간에 굴러가도록 하는 보조자 같은 존재?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나는 만족한다.
 
민변 : 민변을 떠난 후에는 광주에 오래 머무실 같은데,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서울에 많지 않나. 특히 권영국 위원장님과의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다. 물론 다른 분들도 걱정이지만 위원장님의 외로움이 걱정되는데 (웃음) 어떻게 채워주실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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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훈 : 후임 간사를 뽑았기 때문에 그분이 채워주실 것이다. (웃음) 그리고 노동위 간사만 있는 아니라 여러 신입변호사님들도 계시고, 인턴들도 있으니, 그분들이 채워주시리라 생각한다.
 
민변 : 민변에 오래 계셨으니 다른 분들보다 민변의 좋은 점과 문제점,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올 같은데, 어떤가.
 
전명훈 : 민변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이 많이 있다. 민변에서 그런 모든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전체 회원 수에 비해 실제 활동하시는 변호사님들도 얼마 된다. 외에도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 많이 응답할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작년에 이미 발전전략TF 활동을 담은 보고서가 나왔다. 민변의 미래를 기획해나가는 내부적인 변화의 모습들을 보여준다면 민변이 돋보이는 자리를 차지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동위원회는 권영국 변호사님이 위원장을 하면서 상징성이 높아진 같다. 최근 들어 노동위의 활동성이 향상된 것을 느낀다. 그리고 예전에는 위원장 혼자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로스쿨 1, 41 변호사님들 중에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역할을 나누어서 노동위원회 업무가 위원장 사람에게 너무 몰리지 않았으면 한다.
 
민변 : 민변과 인연을 맺은 10 동안 가장 좋았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가장 인상깊었던 기억은.
 
전명훈 : 좋았을 때는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다. 소소하긴 하지만 잘했다라는 격려, 고생했다 격려 등을 들으면 힘들게 느껴지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곤 했다. 힘들었을 때는 여러 사례가 있다. (웃음) 내가 업무를 진행할 느끼는 것들인데, 노동위원회 위원들이 상근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A위원님은 a업무를, B위원님은 b업무를, C위원님은 c업무를 담당하는데, 나는 abc업무 모두를 종합해야 하는 지위에 서게 때가 많았다. 반면 위원 변호사님들은 a, b, c 각각의 업무의 측면에서만 나를 보게 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작년이었던 같은데 물리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어서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태업을 하겠다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었다. (웃음) 상근자들의 공통된 힘든 부분인 같다.
하나 힘들었던 것을 들자면, 회원, 상근자 모두 인간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풀어나가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거의 150 1 접촉을 하게 된다. 안에선 상근자들끼리 일을 나가면서 관계를 풀어나가기도 했지만 그런 인간관계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면 아무래도 부담이 생기곤 했다. 그것이 힘들었다.
 
민변 : 주변의 말씀들을 들어보면 일을 계획하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하더라. 그런데 보통 그런 사람들이 중독자라고 불리지 않나? (웃음) 자신이 중독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전명훈 : 중독자 맞다. 그것으로 인해 성과를 내고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 바꾸고 조절하고 있긴 하다. 아내와의 관계, 가정에서의 관계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위원장님은 내가 결혼하고 나서 나태해졌다고 하시더라. 농담 섞인 질책이셨을 것이다. (웃음)
 
민변 : 예전에도 한번 민변을 떠나셨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들었다. 번이고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같은간사님께 묻고 싶다. 이번에 민변을 떠나는 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나. (웃음)
 
전명훈 : (웃음) 민변을 떠나긴 하지만 아까 말했듯 민변은 내게 친정 같은 존재다. 그래서 민변을 떠나더라도 변호사님들, 간사님들과도 계속 연락하고 만날 것이다. 어쨌든 육아를 이유로 떠나긴 하지만 무언가 계속 나갈 것이고, 그러면 민변과는 언젠가 다시 어떤 형태로든 만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것이 간사라는 자리가 아닐지라도 민변과 내가 함께 나아갈 있는 지점, 계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길 소망한다.
 
민변 : 2012 민변 총회에서 멋진회원상 받으셨다. 지난 민변 생활 동안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것만은 내가 최고다! 할만한 영역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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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훈 : 나는 스케줄 짜는 것이 탁월하다. (웃음) 다른 민변 상근자분들도 워낙 뛰어난 분들이시라 어떤 하나가지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다. 내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분들에겐 다른 돋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외에는 특별히 잘했던 없는 같다. (웃음)
 
민변 : 노동위원회에 후임자로 오시는 분께 응원의 메시지 부탁드린다.
 
전명훈 : 민변 노동위 간사라는 자리가 다른 민변 사무처 상근자들과는 다르게 현장성을 요구하는 자리다. 넓은 안목으로 바라볼 있는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하셨으면 한다. 그런 것들을 수행하신다면 민변과 노동위와 함께 충실한 활동가로 성장할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고민이 생기실 수도 있다. 그러나 민변을, 그리고 노동위를 자신의 활동공간으로 인식하고 활동해주셨으면 한다.
 
 
민변 : 민변을 떠나면서 아쉬움이랄까, 소회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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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훈 : 돌이켜 보면 민변 노동위 간사 자리를 마치기 전에 쌍용차 문제, 한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또한 현장에서 노동위원장님, 위원님들과 함께 대응해나가곤 했는데, 투쟁에 함께 결합했던 노동위 간사로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아쉽다.
노동위 활동 가장 보람찼던 것은 희망버스하면서 김진숙 위원이 무사히 내려왔을 때다. 그때 울컥 눈물이 났다. 희망버스 때는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1 희망버스에 참가하지못했고 희망버스가 5차까지 가면서 법률지원단을 꾸려가는 모든 것을 내가 꾸려나가야했다. 연행자들 발생하면 거기에 맞춰 접견을 가고, 노숙을 하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당시에는 조금 힘들었다. 당시 희망버스가 연대하고, 결합했던 것이 가장 기쁨으로 남는다. 그게 작년 대선을 거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들어 너무 아쉽다.


민변 : 마지막 질문이다.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는 이상이 있는지. 어떤 세상이 되기를 꿈꾸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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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훈 :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 내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인 같다. 다양한 차이를 인정해주고, 그것이 차별로 들어나지 않는 그런 세상. 조금 평등하고, 조금 공정하고, 조금 정의로운 그런 사회를 꿈꾼다. 나는 그런 것들이 고정된 이념으로 표현할 없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사회주의일수도, 사민주의일수도 있고, 자유민주주의 일수도 있고, 아니면 모두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떻게 호명되든 간에 서로의 차이들이 차별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멀리서나마 민변과 계속 같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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