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고시랑]1985 남영동의 라디오 – 좌세준 변호사

2012-11-30 228

1985 남영동의 라디오


글_ 좌세준 회원



‘남영동 1985’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이번 학기 강의 중인 대학원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생강>이라는 소설을 함께 읽었습니다. <생강>은 “고문기술자 아버지와 그 때문에 자신이 꿈꿔온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딸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입니다. 작품 속 ‘고문기술자’는 이근안,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익숙해진 이름 이근안, 바로 그 사람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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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운영은 젊은 작가입니다. 1971년생이니까 고 김근태 의원(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던 1985년 그해 여름에는 중학생이었을 나이입니다. 저는 이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보다 나이가 어린 독자들, 20대의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생강>을 읽고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의 느낌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1985년은 제가 대학에 들어간 해입니다. 짜장면이 600원이었고, 500cc 생맥주가 50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 앞에 아예 진을 치고 있는 전경(전투경찰) 버스를 지나야만 강의실로 갈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1980년 5·18 광주 학살의 원죄를 안고 있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말부터 1984년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적정한 수준에서 수렴하는 유화정책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집권 후반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1985년의 시작부터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도처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과 신군부 세력은 과거보다 더 폭력적인 통치방법에 의존하게 되는데(조희연 교수, KBS <인물현대사> 이근안 편), 영화 ‘남영동 1985’나 소설 <생강>에 등장하는 고문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행된 야만적인 국가폭력이었던 것입니다.

  남영동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겨울이었습니다. 1988년 12월 21자 한겨레신문은 「김근태 족친 ‘이름 모를 전기고문기술자’, 경기도경 공안실장 이근안씨」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이근안의 사진을 실었습니다.

  “김근태(42)씨를 고문한 ‘성명불상’의 ‘전기고문 기술자’는 경기도경 공안분실장 이근안(50) 경감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김씨는 지난 6월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85년 9월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차례에 걸쳐 자신을 전기 고문한 ‘이름 모를 전기고문기술자’를 추적한 끝에 6개월여 만인 20일 사진을 통해 그가 바로 이 경감임을 밝혀냈다.” (1988. 12. 21. 한겨레신문 1면)

  그러나 이근안은 자신의 고문사실을 부인합니다. 위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근안의 변명이 실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근안 경감은 “85년 3월 30일자로 치안본부에서 경기도경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김근태씨 수사 사건에 참여한 적이 없다”면서 “79년 남민전 사건과 81년 전노련 사건 당시엔 연행돼 온 사건 관련자들을 감시하고 옆에서 심부름은 했으나 신문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수사에 참여한 적도 없다고 한 이근안은 기사가 나온 후 5일 만에 잠적합니다. 1999년 10월 28일 이근안이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당직실에 제 발로 걸어들어와 자수할 때까지 무려 11년 가까운 도피가 시작된 것입니다. 소설 <생강>은 바로 이와 같은 이근안의 도피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빠는 모나미 볼펜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볼펜 한 자루로 무얼 더 할 수 있는지는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고통 없이 송곳니를 뺄 수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 소설 <생강> 38쪽.

  소설 <생강>에 나오는 딸 ‘선’에게 아빠는 모나미 볼펜으로 이를 빼주고 다락방을 꾸며주는 아빠입니다. 그 아빠가 지하 조사실에서 ‘모나미 볼펜’으로도 ‘고문’을 한다는 것을 딸은 전혀 상상하지 못합니다. 신문에서 아버지의 수배 사진을 보고서도 “잠적. 아버지는 음모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근안이 실제로 대부분의 수배 생활을 자신의 집에서 지낸 것으로 밝혀진 것처럼, 소설 속에서 딸 ‘선’의 다락방에 숨어든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딸의 생각은 바뀌게 됩니다.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성난 짐승이다. – 소설 <생강> 176쪽.

  소설 <생강>을 가지고 학생들과 함께 할 수업을 준비하면서 저는 이근안의 고문과 관련된 자료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20여 년 전 신문, ‘고문의 한국 현대사’를 담고 있는 책 『야만시대의 기록』(박원순. 역사비평사. 2006), KBS 다큐 프로그램 <인물현대사>, 이근안 편,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 <남영동>(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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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들 중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고 김근태 의원이 쓴 수기 <남영동>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입니다.

  “정말 미웠던 것은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틀어놓는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그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파괴가 감행되고 있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詩的)이고자 하는 아나운서들 목소리,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 김근태 수기 <남영동> 중에서

  나머지 하나는 여러분들이 직접 찾아보실 수 있는 자료입니다. 유튜브에 들어가셔서 검색창에 ‘이근안’이라고 치면 볼 수 있는 동영상 제목은 「대공수사관 이근안 경감 충격 증언.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입니다. 수감생활 내내 성경을 읽었다는, 출소 후에는 목사가 되었다는, 최근 인천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도 “나는 목사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는 이근안을 보면서(2012. 11. 21. 한겨레신문 2면) 저는 자꾸 영화 ‘밀양’의 신애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유괴 살해한 남자를 교도소로 찾아가 ‘용서’하려 했던 신애는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살인범의 말을 듣고 면회실을 나오면서 정신을 잃습니다. 이근안은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남영동 대공분실 지하 조사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용서할 수 없었다는 고 김근태 의원. 27년이 지난 지금, 저는 남영동의 그 라디오 소리만큼이나 이근안의 ‘부인’(否認)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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